60화
“배우님 추우시잖아요. 괜찮아요.”
“난 괜찮아. 여름인데 더위 먹으면 안 되지.”
“체온도 낮으시면서….”
“숙소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이렇게 가자.”
저체온증 환자가 추위를 감수하다니. 어쩌면 이것은 권지하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애정 표현일지도 몰랐다.
“출발은 조금 있다가 할게요.”
“왜?”
“…이러려고요.”
다율이 권지하에게 다가가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다율아.”
권지하는 조금 놀랐다. 다율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다니 기분이 좋기도 했고 기뻤다.
“나도 해 줘도 돼?”
“…물론이죠.”
다율이 눈을 접어 웃었다.
권지하의 서늘한 손이 다율의 목 뒤를 감싸 자기 쪽으로 당겼다. 다율은 순순히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이윽고 입술 위로 서늘한 입술이 느껴졌다. 입술을 겹치고 자신의 뺨과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는 권지하가 너무나 다정해, 다율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물을 감춰야 할 때였다.
오후가 되자 두 사람은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전제작 드라마였던 <시티 오브 나이트> 1화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공식 트위터에 팬들을 위한 셀프카메라와 시청 독려 트위터도 올려야 했고, 홍보 기사가 각 포털 사이트에 잘 게재되었는지 체크도 해야 했다. 바쁘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데 권지하가 다율이 앉은 의자로 다가와 뒤에서 다율을 끌어안았다.
“너무 일만 하지 말고 나랑 뽀뽀도 좀 하자. 응?”
“배우님, 저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요.”
쪽.
권지하가 다율의 입술을 훔쳤다. 오늘따라 권지하는 행복해 보였다. 다율은 아주 잠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그런 권지하를 지켜봤다.
“시작한다.”
“와, 저때가 꼭 옛날처럼 느껴지네요. 불과 몇 달 전인데.”
호수공원에서 혼자 고독을 맛보고 있는 권지하의 독백 신, 여자주인공과 불같이 화를 내는 신이 차례로 지나갔다. 다율은 촬영 당시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맞아. 저 장면에서 배우님 연기가 압권이었지.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저 장면 너무 멋있었어.
“저건 또 저렇게 짧게 편집됐네요. 하루 종일 인공 비 맞으면서 촬영하셨는데 너무 짧게 지나가는 거 아니에요?”
“원래 드라마란 게 다 그렇지 뭐.”
“저는 시청자 게시판 좀 살펴볼게요.”
다율은 다시 노트북을 펴 시청자 게시판과 팬 커뮤니티 등을 살폈다. 드라마 자체도 그렇지만 특히 권지하의 연기에 관한 호평이 한가득이었다. 권지하 곁에서 가까이 도움을 주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니. 다율의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까 헌터와 마주친 일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나는 과연 언제까지 배우님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왜 그렇게 멍해. 표정도 안 좋고.”
“네?”
“더위 먹은 거 아니지?”
권지하가 다율의 이마를 짚었다. 다율은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더위 먹은 것 같은데. 흠… 시원한 거라도 하나 먹을까? 여기 리조트에 수박빙수랑 수박주스가 유명하다던데, 룸서비스 시킬게.”
“정말요?”
“응. 달고 맛있다고 소문났더라고. 조금만 기다려.”
권지하가 룸서비스를 요청하자 얼마 가지 않아 호텔 직원이 소담한 빙수와 시원해 보이는 주스를 가지고 방으로 왔다. 빙수는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고, 주스는 머리가 얼얼할 만큼 시원했다.
“맛있지?”
“네. 갈증이 다 풀려요.”
“오늘은 시원하게 자자.”
“배우님은요.”
“더위 먹은 사람한테 양보해야지. 에어컨 켜고 자.”
권지하가 다율을 배려해 주었다. 다율은 사실 더위 따위 먹지 않았으므로, 우겨서 에어컨을 끄고 잤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도 더욱 정성껏 권지하의 몸을 데워 주었다.
다음 날, 다율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모든 배우 매니저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드라마 방영 익일 아침’이 온 것이다. 어젯밤 시청률이 공개되는 시간이 다가오자 다율은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제발 잘 나오게 해 주세요.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시청률을 확인했을 때, 다율은 흡 하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까지 KTBC에서 방영한 모든 드라마를 통틀어 이렇게 높은 1화 시청률은 처음이었다.
다율은 맹 실장에게 보고 문자를 보낸 다음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권지하는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내 배우님. 잘하셨어요. 어쩌면 저 없이도 잘하실지 몰라요.
다율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권지하라는 배우는 이미 완성형이기에, 자신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고.
***
“오늘은 보조 출연자 없이 우리 식구끼리만 촬영할 거예요. 고정 단역들만 출연하는 날이야. 오케이?”
촬영 감독은 어제 페스티벌 신에 동원되었던 보조 출연자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고 알려 주었다. 다율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율은 촬영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젊은 남자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수염 난 헌터가 근처를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각별히 살폈다.
수상쩍은 그림자는 저녁까지도 보이지 않았고, 촬영은 무사히 종료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율의 불안함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아. 피곤하네. 다율아, 우리 얼른 가자.”
“네. 배우님.”
다율은 권지하와 함께 리조트로 돌아갔다. 권지하가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다율은 거실 전면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어둠에 잠긴 밤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밤이라 그런지 짙은 바다 색이 빨려드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
다율은 어두운 얼굴로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주 길게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결심이 섰다. 권지하와 멀어져야겠다는 그런 결심이.
이튿날 두 사람은 서울로 향했다. 권지하의 CF 촬영과 팬 사인회가 잡혀 있는 주간이어서 스케줄을 조정하고 영화 촬영을 며칠간 쉬기로 했다. 대신 그가 없는 촬영장은 서브 남주와 여자주인공이 지키기로 했다.
사실 권지하는 광고 감독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기가 막히게 구현해 내는 배우라서 CF 촬영에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남들의 절반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촬영이 끝나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남는 시간은 데이트에 쓸 수 있었다. 권지하는 이번 남성 화장품 CF 촬영은 정말 빠르게 마치리라 결심했다. 팬 사인회 역시 칼같이 끝낸 후, 다율과 달콤한 주말을 보낼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서울 집은 그대로였다. 그동안 집안일을 봐주는 분을 따로 고용해 먼지도 청소했고,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해달라고 부탁을 해 놓았더니 효과가 톡톡했다.
“집에 오니까 좋다. 그렇지?”
권지하가 거실에 들어서며 물었다.
“네.”
다율은 대답은 그렇다고 했지만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 여기는 다율에게도 집이었다. 힘든 서울 생활 속에서 지하와 함께 살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곳을 집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한다.
수인 헌터를 마주친 이후로 다율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멀리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매니저 일을 하면서 남들에게 모습을 노출하는 건 미친 짓이었고, 심지어 유명 연예인 권지하와 더불어 예능에 출연하고 그의 작품에서 단역을 맡아 얼굴을 박제하는 건 나 잡아가라고 광고를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지내다 보면 권지하마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다율이 사라지려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 헌터는 아주 잔인하고 위험한 인간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냥을 하고, 총도 쓴다. 그렇다면 이 집에도 쳐들어올 수 있고 촬영장이나 방송국에도 나타나 과격한 테러를 저지를 수 있다.
그때 자신과 꼭 붙어 있을 권지하도 덩달아 위험해진다. 자칫하다가 대신 총이라도 맞으면 어떡할 건가.
한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율은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졌다.
다율이 두려운 생각에 빠져 있는데, 권지하가 다율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뭐 해.”
“아… 아뇨.”
“기운이 없댔지?”
“조금요.”
다율은 대강 둘러대며 소파에 앉았다. 권지하가 흠, 하더니 다율 옆에 앉았다.
“삼계탕 먹을까?”
“삼계탕은 왜요?”
“여름이잖아. 소화하기도 쉽고 기운 나는 음식 하면 삼계탕인데. 배달시켜 먹자.”
단 30분 만에 삼계탕이 도착했다. 권지하는 다율을 식탁에 앉히고 음식의 김을 식혔다. 펄펄 끓는 삼계탕을 일일이 후후 불어 식힌 다음, 권지하는 다율에게 삼계탕을 먹여 주었다. 살점도 먹기 좋게 발라 주었다.
다율은 권지하가 주는 음식을 곧장 잘 받아먹었다. 속은 타들어 갔지만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점심시간을 연출하고 싶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권지하는 혼자 외출을 했다.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아, 네.”
다율로서는 잘되었다 싶었다. 안 그래도 짐도 싸고 집 안의 자질구레한 소지품도 정리해야 하는데 권지하가 자리를 비워 준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다녀오세요.”
“응. 얼른 올게.”
“네.”
권지하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다율은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짐을 쌀 시간이 주어져 다행인 한편으로,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뒷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조금만 툭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다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