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58화 (58/95)

58화

“끙….”

부끄러운데, 이거? 다율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왜?”

“아, 아니에요.”

권지하가 비릿하게 웃으며 다율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었다. 품이 커서 옷깃은 살짝 늘어졌고 소매가 풍덩해 여러 차례 걷어 올려야 했다. 그래도 워낙에 피부가 흰 편이라 하얀 옷감과의 조화가 볼만했다.

“예쁘네.”

“감사합니다.”

다율은 옷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권지하의 냄새가 좋았다. 직접 옷을 입혀 주는 자상함도, 소매를 걷어 주는 섬세함도 다 좋았다. 그래서 말갛게 웃었다.

“세트장 다 완성됐어요. 빨리 모여 주세요.”

“배우님 모실게요. 전 출연자 원위치.”

촬영 개시 신호가 떨어졌다. 대기 부스를 나선 권지하는 다율과 함께 디제잉 부스로 이동했다. 권지하는 여주인공이 있는 인파 뒤쪽에 서고, 다율은 군중 중간에 적당히 섞였다.

“자, 그럼 신나게 노는 장면을 찍어 볼게요. 디제잉 시작하면 다들 크게 열광해 주세요. 최대한 몸짓은 과격하게, 방방 뛰고 옆 사람하고 어깨동무를 해도 됩니다. 아주 정신을 쏙 빼놓고 논다고 생각하고 연기해 주세요. 자, 그럼 리허설 가 볼게요.”

“알겠습니다!”

레디, 액션 소리에 맞추어 디제잉 음악이 흘러나왔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클럽 음악에 다율은 깜짝 놀랐다. 귀청이 뜯어져 나갈 것 같은데, 이거에 맞춰서 춤을 추라고?

당황한 다율과 달리 다른 출연자들은 능숙하게 춤을 추고 삼삼오오 무리를 만들어 눈빛을 교환하기도 했다. 다율은 외딴섬처럼 혼자 어정쩡한 몸짓을 지었다. 마치 와우기획에서 춤으로 망신을 당한 그날 같아, 다율은 트라우마가 자극되었다. 손과 발이 함께 나갔고, 박자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춤이라기보다는 몸부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대로 이상한 춤만 추다가 컷을 당하면 안 되는데 어쩌지.

다율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우뚝 솟은 키의 권지하와 김혜현이 보였다. 권지하는 인파에 휩쓸리는 김혜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를 보호하는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앗. 배우님 저기 계시네.

“지하 배우님, 지금 아주 좋았어요. 혜현 배우님은 조금만 더 격하게 휘청이자. 거의 나 넘어져, 큰일 나, 이런 느낌으로 가 보자고요.”

연출이 두 배우 앞에 서서 연기 지도를 했다.

“그럼 전체적으로 다시 가 봅시다! 전 출연자 원위치!”

다율은 다시 앞을 보고 춤출 준비를 했다. 그때 촬영팀장 중 한 명이 다율에게 다가왔다.

“저기, 다율 씨. 다 좋은데 조금만 더 흥겹고 신나게 해 주세요. 어색하게 움직이지 말고 자연스럽게요.”

“아… 노력한 건데. 죄송합니다.”

“충분히 잘할 수 있어요. 잘 모르겠으면 옆 사람 따라 하시고요.”

다시 음악이 흘러나왔다. 액션 신호에 맞추어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몸을 흔들고, 펄쩍 뛰고 팔을 높이 들며 환호했다. 다율은 페스티벌도 콘서트장도 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런 몸짓이 영 익숙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를 내 보려고 노력하며 깡충깡충 뛰었다.

몸이 제대로 컨트롤되지 않아, 그는 뛸 때마다 점점 뒷줄로 밀려났다. 처음에는 중간 줄에 있었으나 어느덧 뒷줄까지 흘러가고 말았다.

“컷! 잠시만 휴식할게요.”

“휴. 힘들다.”

“아니, 왜 여기까지 왔어요?”

누가 뒤에서 등을 두드린다 싶더니, 김혜현이었다. 권지하도 그 옆에서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아… 열심히 뛰다 보니까 여기까지 와 버렸네요.”

“너무 재밌다, 다율 씨. 진짜 매력 있어.”

김혜현이 시원하게 웃었다. 다율은 목 뒤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했다. 권지하는 웃음을 참는 얼굴로 스태프가 건네는 생수병을 받아 들었다.

“마셔. 목마를 텐데.”

“감사합니다.”

다율은 생수병 뚜껑을 따 마른 목을 축였다.

“페스티벌 와 본 소감은 어때?”

“아, 저 실은 콘서트 이런 거 안 가 봐서 힘들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랬구나. 그러면 다음에 콘서트 같이 가자.”

“좋아요.”

권지하가 자연스럽게 다율의 젖은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혜현이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권지하 이 재수 없는 놈.”

“왜. 불만 있어?”

“스르륵 넘어가는 게 꼭 능구렁이 같아. 그쵸, 다율 씨?”

김혜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율은 김혜현의 표현이 재미있어 쿡쿡 웃었다.

그때였다. 김혜현의 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그녀의 뒤가 탁 트였다.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보였다. 깡마른 몸에 코와 입의 피어싱이 튀었다.

…저 사람이다.

다율은 얼굴을 굳혔다. 아까 보조 출연자 중에 낯익은 실루엣을 지닌 사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던 그 사람. 가까이서 보니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저 남자는 배우님 팬미팅 날 스태프로 참가했던 사람이야. 나와 배우님이 식당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불쑥 나타났지. 그때는 어두웠고 지금은 밝은 곳이지만, 확실히 덩치나 머리 스타일이 비슷해.

여기까지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젊은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며 지내는 사람은 많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남자가 먼발치에서 다율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율은 남자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지금 그는 대놓고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도 느낌이 썩 좋지 않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뭔가 불쾌하고 불길해.

“왜 그래. 표정이 안 좋네?”

“아,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서.”

다율이 억지로 웃었다.

“본촬영 들어갑니다! 이제부터는 리허설 아니니까 진짜 잘해 주셔야 돼요. 힘들어도 스마일 장착하고 완전 열광의 도가니 만들어 주세요!”

촬영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며 확성기에 소리를 질렀다.

“아, 저 제 자리로 가 봐야겠어요.”

“그래. 이번에는 떠내려오지 말고.”

권지하와 김혜현은 뒤에 남고, 다율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중간 자리로 다시 걸어와 자리를 잡은 다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빽빽하게 밀집해 서 있는 상황이라 누가 누군지, 어디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지 확실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이 인파 속에 분명 그가 있다.

우연이야, 우연. 그냥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야.

다율은 필사적으로 심장을 진정시키려 해 보았으나,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배우님의 스토커인가?

가끔가다 스태프를 가장해 권지하의 행사장에 들어오는 팬들이 있었다. 그들 때문에 소속사가 골머리를 썩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는 권지하가 아닌 다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권지하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율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꾸만 나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설마 나를 쫓아다니는 거라면 목적이 뭐지.

다율은 살아오면서 딱히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빚도 진 적 없고 누군가와 원한 관계를 만든 일도 없었다. 단 한 가지, 자신의 정체 때문에 속리산에서 도망쳐 나온 것만 제외하고는.

설마… 수인 헌터?

거기까지 생각한 다율은 얼어붙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옆에 선 보조 출연자들이 다율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까부터 혼자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손톱을 물어뜯는 다율은 상태가 많이 나빠 보였다.

“슛 들어간다는데요.”

“아, 네. 알겠습니다.”

다율은 깜짝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일단은 촬영 중이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촬영에 전념해야 했다. 하지만 두근거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

여러 차례 슛을 찍고 마침내 촬영이 끝났다.

“다음 신도 바로 이어서 가니까 화장실 다녀오실 분들만 다녀오시고, 자리 유지해 주세요. 앞 장면이랑 연결돼서 아까랑 자리가 달라지면 화면이 이상해집니다. 자기 원위치 꼭 기억하세요!”

조연출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휴식 시간을 줬다. 사람들은 힘이 빠졌다며 대부분 그냥 자리에 앉아 있기를 택했다. 다율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대열을 이탈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관객석을 살폈다.

역시나 피어싱을 한 남자가 스르륵 일어났다. 다율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조금씩 남자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뛰었다.

“배, 배우님!”

다율은 권지하의 대기 부스로 뛰어갔다. 후다닥 달려가 이미 대기 부스 안으로 쏙 들어간 다율을 보며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남자는 입 안의 차가운 피어싱을 한번 혀끝으로 톡 건드린 다음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메시지 창으로 들어가 문자를 보냈다.

[박중호: 천재욱, 네가 말한 놈 찾았다.]

곧 답장이 도착했다.

[천재욱: 어. 어때 보이냐?]

[박중호: 겉으로 봐서는 짐승 새끼인지 잘 모르겠는데. 근데 내가 하도 쳐다봤더니 눈치 깐 것 같아.]

[천재욱: 야. 제대로 해야지 벌써 들키면 어떡하냐. 일 망칠래?]

[박중호: 이 더위에 강원도까지 쫓아와서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그게 할 소리냐? 진짜로 이다율이 수인이어서 건강원에 팔면 그 몸값 내가 70% 가져간다.]

[천재욱: 웃기지 마. 50 대 50이야. 근데 확실해? 아니면 완전 허탕 치는 셈에다가 자칫하면 산 사람 인신매매 아니야. 역풍 맞을 수도 있다고.]

천재욱과 박중호는 한참 동안 문자로 기 싸움을 했다. 박중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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