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56화 (56/95)

56화

새벽부터 시작한 덕에 오후 무렵에 촬영이 끝났다. 스태프들은 장비를 철수하며 배우들과 인사를 나눴다.

“배우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여러분도 고생 많으셨어요.”

권지하는 평소보다 빠르게 사람들과 인사를 하더니, 시계를 계속 봤다.

“바쁜 일이라도 있으세요, 배우님?”

“아.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해서.”

“무슨 뜻이에요?”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거든. 나 따라갈래?”

“어… 혹시 데….”

“상상하는 거 맞아.”

데이트로구나. 데이트야! 다율은 펄쩍 뛸 만큼 기뻤지만 사회적 체면과 촬영장이라는 특수 배경을 생각해 자중했다.

간단하게 씻고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해가 지기 전 숙소를 나섰다. 차는 상상해수욕장 인근 도로를 빠져나간 이후부터 급격한 정체에 휘말렸다. 조수석에 앉은 다율은 땅콩 캐러멜을 까먹으며 도로를 살폈다.

“왜 이렇게 차가 막히죠?”

“다들 우리처럼 놀러 가서.”

“대체 어디 가는 건데요?”

“불꽃놀이.”

“와! 불꽃놀이요?”

다율은 깜짝 놀랐다.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된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는 다율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접체험이야 해 봤지만 직접, 그것도 권지하와 같이 불꽃을 보러 간다니 굉장히 특별한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불꽃놀이라니. 신기하고 좋아요.”

“좋아할 줄 알았어.”

“어떻게 아셨어요?”

“나랑 하는 건 다 좋아하잖아.”

권지하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맞는 말이었기에, 다율은 배시시 웃었다.

“지름길로 가야겠네.”

“지름길도 알아요?”

“어젯밤에 미리 연구했지.”

“정말요?”

“다율이 데리고 가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권지하가 세상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다율은 권지하의 배려심에 다시 한번 감동을 받았다. 정말이지 권지하를 좋아하지 않는 법 따위, 알지 못했다.

“서둘러서 가 볼게.”

“네!”

국도 변으로 빠진 차는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민가만 있는 그런 평범한 동네였다. 풍경도 대단치 않고, 그 어떤 특별한 구경거리도 없었지만 다율은 가슴이 들떴다.

카레이서 역할을 맡은 적 있었던 권지하답게 그는 빠르게 마을을 빠져나와 불꽃놀이가 열리는 해안에 도착했다.

“다행이다. 아직 시작 안 했나 봐요.”

“딱 맞춰 왔네. 그럼 적당한 자리 찾아서 앉아 볼까?”

다율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권지하와 그는 차례로 모자를 눌러쓰고 해변으로 다가갔다. 삼삼오오 모여 돗자리를 펴고 앉은 가족,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연인들 틈을 지나 해변 끄트머리에서 돌로 된 벤치를 하나 찾았다.

“여기 앉아요.”

“그래.”

그들이 벤치에 앉음과 동시에 피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꽃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소리였다. 곧이어 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밤하늘이 노란 빛깔로 뒤덮였다. 마치 민들레 홀씨 모양처럼 터지는 불꽃, 별처럼 반짝이는 불꽃, 팝콘을 튀기는 듯한 소리가 나는 신기한 불꽃이 차례로 터졌다.

“헉.”

다율은 좀 놀랐다. 이렇게까지 폭죽 소리가 클 줄은 몰랐다.

“놀랐네.”

권지하가 다율의 두 귀를 살짝 막아 주었다. 다율은 그의 손이 닿는 느낌이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곧 다율은 편안하게 권지하의 품에 몸을 기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불꽃이 밤하늘에 그림을 그렸다. 과감하게, 때로는 우아하게 피어오르는 불꽃은 다율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있었구나. 내가 모르던, 처음 보는 이런 불꽃….

권지하는 손을 놓고 고개를 틀어 다율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촉촉한 갈색 눈망울에 반짝거리는 불꽃들이 비쳤다.

“밤하늘보다 이게 더 아름답네.”

권지하가 낮게 읊조렸다. 다율은 퍼뜩 깨어나며 권지하를 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다율의 가슴은 심각할 만큼 빨리 뛰었다. 다율은 긴장이 됐다. 어두운 해변, 단둘이 있는 상황, 그리고 낭만적인 불꽃놀이. 아무도 우릴 알아보지 못하는 이 상황은 연애를 하라고 판을 깔아 준 것이나 다름없다.

잠깐만, 지금 이 분위기라면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권지하와 연애 아닌 연애를 시작한 다율은 눈치가 제법 늘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지하는 곧 진지한 목소리로 다율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는 이렇게 멋진 곳에서 고백하고 싶었어. 네가 물에 빠져서 너무 급하게 내 마음을 드러내게 됐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다시 내 마음을 말하고 싶었어, 다율아.”

“배우님….”

권지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이건 꽤 오래전부터 준비했는데 이제는 줄 때가 된 것 같아.”

그가 꺼내든 것은 심플하게 생겼지만 은은한 광택이 고급스러운 팔찌였다. 언젠가 다율을 너무도 구속하고 싶던 시절에 신중한 마음을 담아 골랐던 것. 그것을 이제는 채워 주고 싶었다.

“다율아. 난 진심이야. 난 너랑 계속 함께하고 싶어.”

권지하가 다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율의 눈동자가 떨렸다.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도 권지하의 감정은 더 크고 깊어 보였다.

“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답을 망설이는 걸 알아. 하지만 난 저번에도 말했듯 충분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내 곁을 떠나지 마, 어떤 일이 있어도.”

권지하는 그 어떤 필모그래피에서도 보여 주지 않았던, 갈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다율을 바라보았다. 다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날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수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율의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약속할게요.”

다율이 손목을 내밀었다. 권지하는 스스로 속박을 당하겠노라고 자처하는 다율이 더없이 흡족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율에게 팔찌를 채웠다. 가느다란 손목 위에서 빛나는 팔찌는 그 어떤 불꽃과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신기하다… 팔찌 처음 차 봐요.”

다율은 팔목에 와 닿는 팔찌의 촉감이 생소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서늘함이 마치 권지하의 손을 연상시켜 그게 더 좋기도 했다.

“저… 너무 늦지 않게, 답 들려드릴게요.”

이렇게나 큰 마음을 받았는데 언제까지고 모르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다율은 늦지 않게 권지하에게 제 답을 들려주리라 마음먹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지극히 낮은 확률을 뚫고 권지하가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하면 실로 아찔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 내가 사실은 한낱 수인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다율의 가슴이 콕콕 아파 왔다.

다율은 권지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할까? 다람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은근슬쩍 떠본 다음, 다람쥐가 참 괜찮은 동물이라고 주입시켜 보면 어떨까.

다율은 진지하게 이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람쥐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누다가 ‘내가 바로 다람쥐다.’라고 고백하면 권지하의 충격이 덜하지 않을까 싶었다. 객관적으로 무척 허접한 계획이었지만 다율은 이만하면 충분한 빌드업이라고 여겼다.

다율은 당장 실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꽃놀이가 끝난 후 다시 촬영장 앞 리조트로 돌아오자 밤이 깊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불꽃놀이 이야기를 하며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즐거웠어요. 데려가 주셔서 감사해요.”

“말로만?”

“네?”

“정말 고마웠으면 다른 걸로 표현해 봐.”

“어… 어떻게.”

“예를 들면 이런 거.”

권지하가 다율에게 슥 다가오더니 뺨에 입을 맞췄다. 다율의 눈이 땡그래졌다.

“헉.”

겨우 뺨 뽀뽀에도 다율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번에는 다율이가 해 볼까?”

권지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율은 은은하게 끼쳐 오는 향수 냄새와 더불어 시각적인 미모 공격에 머리가 아찔했다.

“어서.”

권지하가 은근하게 다율을 재촉했다. 다율은 심호흡을 한 뒤,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나서 용기를 내 권지하의 뺨으로 입술을 돌진시켰다.

촉.

“어?”

그런데 맞닿은 건 뺨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권지하가 두 사람이 닿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 버린 것이다.

“히끅!”

다율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했다.

“이러시는 게 어딨어요!”

“어기 있긴. 여기 있지.”

권지하가 활짝 웃었다. 다율은 권지하의 어깨를 찰싹 치려고 팔을 휘둘렀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의 손목을 확 휘어잡고 다시 한번 뽀뽀를 시도했다. 쪽. 쪽.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힘에 다율은 뽀뽀 세례를 받았다. 부끄러움은 다 다율의 몫이었다.

새벽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씻고 침대에 누웠다. 다율은 언제나처럼 권지하의 팔을 베고 누워 그의 품에 가슴을 기댔다. 어차피 한 번도 업무로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오늘따라 권지하의 서늘한 품을 파고드는 일이 떨리고 또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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