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동해 시내를 벗어나 양양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일의 애매한 시간이라 피서객들이 도로를 점거하지 않은 덕이었다. 스무스하게 양양 시내로 들어선 차는 화려한 호텔 앞에 멈추어 섰다.
“여기 옥상이야.”
“야경 멋있겠어요!”
다율은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권지하의 말대로 호텔은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건물은 새까맣게 윤이 나고 창문에 밤하늘이 반사되었다. 그간 서울의 멋진 호텔을 많이 가 봤지만 이렇게 바다 조망을 가진 고층 호텔은 처음이었기에 다율은 기대가 커졌다.
“올라가자.”
“네!”
그들이 로비로 들어서자 곧 직원이 나와 정중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57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율은 57층이라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높은 건물인 줄은 알았지만 강원도에 이 정도 높이의 건물이 있는지는 잘 몰랐다.
직원이 루프탑 전용 엘리베이터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다율과 권지하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57층까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내려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가니 활짝 열린 문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우와….”
호텔 한 층 규모를 다 개방한 루프탑은 시원한 조망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이에 사방이 뻥 뚫려 있고 왼쪽으로는 바다가 오른쪽으로는 불을 밝힌 도심이 보였다.
“창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매니저, 이리로 와요.”
“네!”
다율은 홀린 표정으로 권지하의 뒤를 따랐다. 창가에 앉으니 조망이 더 좋았다. 밤바다가 발아래 깔려 있는 감각이 비현실적이었으며, 저 멀리 어선과 등대의 불빛이 신비로운 광경을 선사했다.
“저 영화 찍는 것 같아요.”
“하하. 찍어 본 적도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네?”
“아니… 그건 그렇네요. 제 말은 그만큼 환상적이라는 거예요.”
“알아듣고 있어. 다율이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네.”
권지하가 다율의 발그레한 뺨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다율은 기쁨을 숨기지 않고 따라 웃었다.
무알코올 칵테일과 버섯으로 만든 애피타이저, 크림치즈와 호두를 곁들인 사과 샐러드가 나왔다. 다율은 풍경을 눈에 담고, 권지하를 눈에 담느라 조금 바빴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요리를 먹었다. 눈도 입도 즐거워 식사 속도가 빨랐다.
스테이크는 다율의 손바닥보다도 컸는데, 원래 잡식성인 다율은 먹음직스러운 고기 앞에 침이 흐를 지경이었다. 성급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려 하자 권지하가 그의 접시를 가져갔다.
“내가 썰어 줄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고기가 먹기 좋은 크기로 썰렸다. 권지하는 당연하다는 듯 한 조각을 집어 다율에게 먹여 주었다. 서울에서도 해 본 적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단둘이 집에서 야식을 해 먹었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공개된 장소였고 다른 손님과 서버들도 있었다. 남들이 지켜본다는 생각에 다율은 쑥스러워졌다.
배우님이 나 좋아하는 티가 나면 어떡하지? 설마 누가 알아보진 않겠지.
다율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이미 고기를 받아먹어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맛있다!”
“이것도 먹어 봐.”
권지하는 양양 송이를 곁들였다는 오일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아 다율에게 먹여 주었다. 이 또한 엄청난 맛이라 다율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산속에서 생밤과 도토리, 가끔가다 이름 모를 열매만 먹고 살아온 몸이었으나 역시 인간 음식이 백 배는 맛있었다.
“혹시 권지하 아니야…?”
“옆에는 그, 매니저인가? 예능에서 봤는데.”
“맞는 것 같아. 사진 찍자!”
건너편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커플이 두 사람을 알아봤다. 그들은 살짝 카메라를 가리고 권지하와 다율의 사진을 찍었다. 비록 화질은 흐릿했지만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사진은 SNS에 게시되기 무섭게 여기저기 퍼졌고 팬 카페와 트위터에도 올라왔다.
[권지하 목격담.JPG]
여기 강원도인데 호텔에서 권지하 봤다. 매니저랑 같이 밥 먹고 있던데 완전 잘생김. 사진으로 인증함.
ㄴ미친 미모가 화질을 뚫고 나온다
ㄴ초점이 흔들리는데도 이목구비 살아 있는 거 실화냐
ㄴ다율 매니저한테 파스타 먹여 주는 중인가
ㄴ그런 거 같은데? 가만 보면 열애설은 윤혜미랑 날 게 아니라 매니저랑 나야 맞는 듯
일반 커뮤니티 반응이 이 정도였고, 트위터에서 두 사람을 엮는 커플 분자들은 더했다.
[권지하 이다율 데이트 파파라치 떴다. 이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어.]
ㄴ트친님. 둘이 결혼식장 들어가는 건 보고 눈을 감으셔야죠.
ㄴ아니죠 애 낳는 것까지 보고요.
다율은 식사를 마치고 습관처럼 SNS에 들어갔다가 ‘실시간 트렌드’로 뜬 자신들의 사진을 보고 식겁했다. 그러나 권지하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내 매니저랑 밥 먹고 돌아다니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어… 문제….”
“아무한테도 피해 안 주고, 논란거리도 아니잖아. 그냥 내가 하도 요즘 안 보이니까 사진 하나에 사람들이 과민반응 하는 것뿐이야. 우린 편하게 다니자.”
듣다 보니 맞는 소리라 다율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하고 들어가자고.”
“와. 저희 커피도 마셔요?”
“응. 감독님이 이 근처에 좋은 카페 소개해 주셨어. 명색이 극 중 바리스타인데 좋은 데로 모셔야죠.”
권지하가 엷게 웃으며 다율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다율이 모르는 게 나을 법한 가격의 식사를 계산하고, 앞장서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온 다율과 권지하는 차를 두고 걸어서 한적한 주택가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이라 조용했고, 고급 주택들이 잘 가꾸어져 운치가 있었다. 가끔씩 주택 1층을 개조해 센스 있는 인테리어를 갖춘 카페들이 눈에 띄었다.
“여기야.”
평범한 카페라기보다는 집 같았다. 2층 주택을 개조했는지, 잔디가 깔린 마당이 딸려 있었다. 다율이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자 2층 옥상에 손님이 두어 팀 있고 그 외에는 비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이 지긋한 여주인이 두 사람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어디 앉으시겠어요?”
“어… 저 바깥에 있고 싶은데. 여기 마당에 있어도 괜찮나요?”
다율이 권지하에게 물었다. 권지하는 고개를 끄덕한 다음, 주인에게 메뉴를 물었다. 그녀와 권지하가 어려운 말로 몇 마디를 나눈 끝에 다율은 초콜릿 향이 강하고 고소한 커피를, 권지하는 깔끔하고 스모키한 커피를 마시게 됐다.
“커피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대. 밖에서 기다리자.”
권지하가 나무 아래 그림처럼 놓인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다. 다율은 별생각 없이 의자에 앉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권지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배우님.”
“응?”
“자… 잠깐 걸으실래요? 여기 정원이 상당히 넓네요.”
“그렇네.”
“배우님 집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기… 뒤쪽으로 가는 길도 보이고요.”
다율 딴에는 용기를 쥐어짠 말이었기 때문에, 이 이상으로는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별말 없이 앞장섰다.
머리 위로는 달이 걸려 있고, 구름 사이로 숨었다 드러났다 하며 은은한 빛을 비추었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낮의 열기를 말끔히 거두어 갔으며, 나뭇잎이 춤추며 부대끼는 소리가 다율의 귀에는 노래처럼 들렸다.
아. 분위기 좋다.
다율은 신이 나서 조금 씩씩하게 걸었다. 그 바람에 권지하와 손등이 부딪쳤다.
“죄송해요.”
“….”
“배우님?”
권지하가 다율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그 손을 잡았다. 다율은 너무 놀라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배우, 배우님?”
“손잡고 걷자.”
다율의 얼굴이 뜨끈뜨끈한 호빵처럼 익었다. 달밤에 데이트하면서 손을 잡고 있어. 나… 배우님이랑 분위기 끝내준다.
맞닿은 손을 따라 서로의 체온이 전해졌다. 다율은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어젯밤, 권지하는 다율을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혼란스러워서 다율은 제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다율은 권지하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배우님 사랑해요.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어요.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정원을 산책하자고 말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사랑 고백은 서투를 수도 있겠지. 어설프게 말하면서 바보처럼 덜덜 떨 거야. 하지만 배우님은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 진심을 다해 말하자.
다율이 결심하고 입술을 떼려는 찰나, 두 사람의 눈앞으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애옹.”
“어, 고양이가 다 있네.”
권지하가 신기한 듯이 말했다. 카페에서 기르는 고양이인지 털이 반질반질하고 목에 예쁜 리본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