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당연하죠. 시청자분들도 많이 궁금해하실 겁니다.”
“음… 다정한 편인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다율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설마 배우님이 엉뚱한 소리를 하진 않겠지? 만약에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들통나면 어떡하지.
“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요.”
너무 궁금하네. 하지만 듣기 싫기도 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 다정했던 배우님은 별로야. 상상만 해도 질투 나잖아.
다율은 알지 못했다. 권지하가 지금껏 진지하게 대한 사람이라고는 다율이 유일하다는 것을. 당연히 잘난 권지하니만큼 연애 경험이 차고 넘칠 것이라고 다율은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다정하게 대해 줬을 거라고 상상하며, 있지도 않은 상대를 향해 질투를 발산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엄청 궁금하네. 내가 배우님을 알기 전의 배우님이 너무 알고 싶어. 어떤 사람과 어떤 연애를 하셨을까? 나랑… 비슷했을까?
다율의 마음속에서 호기심과 질투심이 싸움을 벌였다. 어느덧 연애 관련 인터뷰에 지나치게 몰두한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살금살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권지하는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다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풉 웃었다.
“예를 들자면 잘 자라고 머리를 쓸어 넘겨 주거나, 술에 취했을 때 업어 주거나… 그렇게 해 본 적 있어요. 아플 때는 죽도 직접 먹여 주고요.”
“천하의 권지하 배우님이 그렇게까지 다정한 행동을요? 그분은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겠는데요.”
“아뇨. 보니까 멀쩡하게 살아 있던데.”
“농담도 잘하시네요!”
리포터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다율은 가슴이 철렁했다. 잠깐만, 나한테 해 줬던 거잖아. 설마 이거 내 얘기 아냐?
“그럼 연락도 엄청 자주 하셨겠네요. 일어났어, 자기야? 점심 먹었어요? 저녁에는 길게 통화하고요. 두세 시간 통화하다 보면 배터리 다 닳아 있고요. 맞지요?”
“어… 그렇진 않은데.”
리포터의 질문에 권지하가 고개를 저었다. 리포터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다정다감한 남자면서 연락은 잘 안 하세요?”
“네. 메시지나 전화는 잘 안 해요.”
“그건 조금 의외네요. 그러는 이유가 있나요?”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서요.”
권지하가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다율도 빠르게 눈치를 채고 피디 방향으로 엑스 자를 그려 보였다.
“컷!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권지하와 다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권지하는 다율을 향해 미소 지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였다. 만약 컷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카메라로 포착했다면, 누군가는 눈치챘을 것이다. 권지하의 애정 어린 시선이 향하는 곳은 곧 다율뿐이라는 것을.
영화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것으로 인터뷰가 끝났다. 취재가 끝난 후 권지하와 제작진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율 역시 옆에서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편집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희야말로 취재 협조 감사합니다. 그럼 매니저님, 저희 현장 스케치 좀 녹화하고 갈 건데요. 촬영장 소개 도와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저 따라오세요.”
다율은 제작진을 데리고 대기 부스를 나갔다. 대기 부스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 세트장부터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집을 소개하면서 한 바퀴를 돌았다. 세트장 투어가 끝났고 다시 그들을 주차장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걷고 있는데, 리포터가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매니저님. 누군지 아세요?”
그가 소곤소곤 다율의 귀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누군지 아냐니요.”
“권지하 배우님이 좋아하는 사람이요. 누군지 아시냐고요.”
리포터의 은근한 물음에 다율은 곤란해졌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캐내려는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팬미팅 때 밝히셨잖아요. 좋아하는 사람, 팬분들이라고요.”
“어허, 그걸 누가 믿습니까. 그건 팬들 기분 좋으라고 하는 멘트잖아요.”
“진짠데요. 배우님이 그렇게 직접 말씀하셨는데 왜 안 믿으세요.”
“아이구, 정말.”
리포터가 다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런 거 말고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매니저님은 아실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스캔들 인정 한번 안 한 배우가 대뜸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했다? 저는 촉이 왔거든요. 아! 이거는 진짜구나 하고요.”
리포터는 집요하게 대답을 유도해 냈다. 다율은 거기에다 대고 ‘실은 그거 전데요.’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없었고 방송 관계자에게 정색을 하기도 어려웠다.
다율이 곤란해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다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배우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권지하였다.
“미술 감독님이 세트장 보수하셔야 한다고 해서, 오후 촬영이 취소됐어요.”
“아, 그래요?”
리포터는 건수 하나 물었다는 듯 황급하게 마이크를 꺼냈지만 권지하는 고개를 저었다.
“제 매니저 좀 데려갈게요. 선약이 있어서요.”
다율은 갑자기 나타난 지하가 고마웠다. 하지만 선약이라니 들은 바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지하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 멀리 나가서 밥 먹기로 했잖아. 그렇죠, 이 매니저?”
“아… 네! 맞아요. 저기… 그 어디냐. 양양까지 가서 밥… 밥 먹기로 했는데! 스테이크!”
다율이 어색하게 연기했다. 권지하는 다율의 답안이 맘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리포터는 쩝, 아쉬워하며 두 사람을 풀어 주었다.
“휴… 도와줘서 감사해요, 배우님.”
“도와주다니 뭘.”
“되게 곤란했거든요. 뭘 자꾸 물어보는데….”
“뭘 그렇게 물어봤는데?”
“…배우님이 좋아하는 사람이요.”
다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권지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말해 주지 그랬어.”
다율은 펄쩍 뛰었다.
“안 되죠, 그건!”
“안 될 게 뭐가 있는데.”
다율은 할 말이 없어졌다. 권지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율은 가까스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럼 오늘분 촬영 끝나신 거죠? 리조트 들어갈까요.”
“아니, 안 들어가.”
“네? 그럼요.”
“양양 가서 스테이크 먹어야지.”
“그건 아까 제가 급하게 지어낸 이야기인데요?”
“그 코스가 맘에 들어서.”
권지하가 씩 웃었다. 다율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진짜로 가요? 스테이크?”
“당연하지. 우리 매니저님이 먹고 싶어서 메뉴 정한 것 아니었어?”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돼요?”
이거 너무 데이트잖아. 단둘이 레스토랑에서 칼질? 세상에, 첫 데이트 하는 거야?
지금까지 권지하와 수많은 맛집을 가고, 함께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때는 지하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모르던 때였다. 고백을 받은 후에 같이 레스토랑에 가자니 새삼스럽게 의식되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럼. 되고말고.”
권지하가 다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율은 닁큼 그 손을 잡았다.
“당장 가요!”
“메이크업만 지우고 나서자고.”
“네. 기다릴게요.”
권지하가 머리 세팅을 풀고 메이크업을 지우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다율에게는 10년 정도로 느껴졌다.
다율은 발을 동동 구르며 권지하가 앉은 의자 근처를 맴돌았다. 메이크업 담당자는 다율을 보며 뒤에 급한 스케줄이 있나. 그렇다면 메이크업은 왜 지우는 걸까 생각했다.
“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배우님, 가요!”
권지하가 말끔한 낯으로 풀려나자마자, 다율은 그의 손목을 잡고 뛰다시피 걸었다. 그래 봤자 보폭이 권지하만큼 크지는 않아 엄청 빠르게 가지는 못했지만.
차에 오른 다율은 마음이 급해져서 권지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배우님. 일단 양양으로 갈까요?”
“내가 예약해 뒀어.”
“네? 예약이요?!”
내비게이션을 켜던 다율이 깜짝 놀랐다.
“좋은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 루프탑에서 밤바다 보면서 식사하는 곳이라는데 괜찮아?”
“루프탑… 밤바다… 너무 멋있겠는데요.”
다율은 흥분감을 감추느라 죽을 맛이었다. 그냥 레스토랑도 아니고 루프탑 레스토랑이라니.
드라마에서 봤다. 루프탑은 곧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는 곳. 다율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곳에 지금 권지하와 자신이 가는 것이다.
마음이 급하니 자연히 차 속도가 빨라졌다. 안 그래도 해안도로에 차가 별로 없어, 두 사람은 빠르게 도로를 누볐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 바다는 노을빛으로 물들고 선선해진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간 바다를 잘 몰랐지만 이것 하나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 바뀌는 타이밍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노을 좀 보세요. 멋있어요.”
“오늘따라 멋있네.”
“풍덩 빠지고 싶을 만큼 바다가 예뻐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권지하가 핀잔을 줬다.
“장난이었어요. 그만큼 예쁘다는 거죠.”
“예쁘긴 하네.”
권지하가 석양을 등지고 다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율은 노을 대신 자신을 쳐다보며 말하는 시선을 느꼈다. 바람은 시원하고, 노을이 그러데이션된 수평선은 그림 같고, 제 옆에는 권지하가 타고 있다. 다율은 오늘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