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직은 해가 뜰락 말락 하네….”
서서히 일출의 기운이 몰려들며 구름이 분홍빛, 연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빨간 해는 아직이었다.
그리고 다율이 소원하듯 수평선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장신의 실루엣이 걸어오고 있었다. 권지하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아주 조금씩 해가 떠올랐다. 사위가 밝아 오며 하늘이 아름다운 주황빛을 뽐냈다.
“배우님….”
권지하가 다율 앞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당황, 화, 다급함이 엉망으로 섞여 있었다.
“그냥 산책 나왔었어요. 죄송해요. 주무시고 계시길래.”
“내 앞에서 없어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권지하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을 넘어서 애틋함마저 담겨 있었다. 마치 다율이 사라지면 정말로 이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애절함이.
“안 되겠다.”
권지하가 한숨을 내뱉더니, 조심스럽게 다율의 두 손을 잡았다. 갑작스럽게 손이 닿는 바람에 다율이 놀랐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이다음에 일어났다. 권지하가 모래사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율을 올려다보았다.
“배우님.”
“다율아.”
“…배우님.”
“너 없이 못 살겠다는 말, 이제 돌려서 하지 않을게.”
권지하가 다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여유롭고 나른한 웃음을 짓는 남자의 눈은, 지금 진지함과 절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니저가 아니라 그냥 다율이로서 나랑 함께해 줘.”
권지하가 다율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서늘한 손인데도 온기가 느껴지는 듯 신비한 감각이 다율의 온몸을 휘감았다.
“배우와 스태프 말고, 그냥 너랑 나로 있자.”
“배… 배우님.”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다율은 너무나도 얼떨떨해 현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발아래가 구름으로 변해 두둥실 하늘로 날아오른 것 같기도 했고, 파도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귀까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요?”
“나 권지하가 이다율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
다율의 뺨이 조금씩 아침 햇살 빛으로 물들어 갔다.
“마, 말도 안 돼.”
“이제는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권지하가 다율의 손등을 끌어다가 입 맞췄다. 흠집 나면 안 되는 보석처럼 조심스럽고 또 신중한 손길로 다율을 매만지는 탓에, 다율은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저 같은 애가 뭐… 뭐가 좋으시다고.”
“너 같은 애라서 좋아.”
권지하가 다율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율의 심장이 드디어 한계치를 넘었다.
“배우님!”
다율이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으며 권지하의 목을 감싸 안았다. 권지하가 그런 다율을 꽉 끌어안으며 등을 쓸어내렸다.
“고마워요, 절 좋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다율은 벅찬 숨을 몰아쉬며 권지하의 가슴에 기댔다. 권지하가 다율을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껴안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했네. 다율이는 하고 싶은 말 없어?”
“저… 저는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율이 권지하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직은 부끄럽고, 용기가 모자랐다. 권지하처럼 멋진 고백을 하기에 다율은 어른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대답, 들려드릴게요.”
권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다율을 끌어안았다.
***
아, 쑥스럽고 창피하고 또 행복하다. 간질간질 누가 내 발바닥에 강아지풀을 가져다 대는 것만 같아.
다율과 권지하는 아침 내내 바닷가에 머물면서 서로를 쓰다듬고, 마주 보고, 또 기대었다. 선선한 아침 바람을 맞으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이 다율은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권지하는 빠르게 상황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호칭도 바꿔야겠어.”
“네?”
“분위기 잡는데 배우님, 이러면 일 생각나잖아.”
“아… 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뺨을 빨갛게 물들인 다율이 물었다. 지하는 다율의 뺨을 쓸면서 말했다.
“뭐가 좋을까. 형은 어때?”
그 말에 다율은 귓바퀴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혀, 형이요?”
“응. 내가 더 나이 많으니까. 싫어?”
다율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지하 씨도 부끄럽지만 형은 정말 미치도록 쑥스러웠다. 형이라니 세상에. 지하 형?
그 말을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입 밖에 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다율은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고 고개를 저었다.
밤새 그렇게 노느라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비록 길게 자지는 못했지만 다율은 충만한 애정에 피로감은 전혀 없었다.
둘은 더 이상 늑장을 부릴 수 없는 시간이 되자 준비를 하고 나섰다. 로비를 나서 세트장으로 가는 길 동안 둘은 자주 눈을 마주쳤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청명한 햇빛이 다율의 기분을 더욱 선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몰래 연애하는 것 같아. 아니, 이미 시작되었나…?
다율은 권지하와 간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마 권지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율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촬영 현장에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리포트 프로그램 팀이 찾아오는 날이어서 세트장 앞이 더욱 북적였다.
“오늘 영화가중계에서 나오기로 했어요. 인터뷰 있습니다.”
업무 모드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며 다율이 말했다. 일부러 딱딱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요.”
권지하는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다율의 얼굴이 또 빨개질 것이다. 그러니 업무 모드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영화 홍보에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으니 열심히 인터뷰해 달라는 맹 실장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알겠어요. 잘해 볼게요.”
다율은 리포트 팀을 맞이하기 위해 일찌감치 주차장으로 나섰다. 들어오는 차량마다 혹시나 영화가중계 차량인가 싶어 고개를 쭉 빼고 살폈다. 한참 기다린 끝에 큰 차가 들어오고 리포터와 피디, 카메라맨이 차례로 내렸다.
“안녕하세요! 영화가중계입니다.”
“안녕하세요. 권지하 배우님 매니저 이다율입니다.”
다율은 빠르게 달려가 피디와 스태프들에게 굽실굽실 인사를 했다. 장난스러운 이미지로 유명한 남자 리포터가 다율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예능에서 보고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요. 언제 시간 되시면 저희 패널로도 한번 나와 주세요. 화면발 잘 받으시니까.”
“감사합니다.”
다율이 해맑게 웃으며 리포터에게 인사했다. 다율은 주차장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촬영 현장으로 영화가중계 팀을 안내하기 위해 길을 앞장섰다. 그들은 아름다운 바닷가와 어우러진 카페 세트장에 감탄하며 다율의 뒤를 따랐다.
“배우님. 영화가중계 팀 오셨어요. 지금 모셔도 될까요.”
다율이 부스 문을 빼꼼 열고 물었다. 권지하는 메이크업을 수정 중이었다.
“네. 그렇게 하죠.”
“여러분,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리포터와 카메라맨, 스태프 여럿이 대기 부스로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 있던 권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과 악수했다.
“안녕하십니까.”
“와. 너무 잘생기셨네요. 카페 바리스타 역할이시죠? 앞치마도 엄청 잘 어울리세요!”
리포터의 과장된 말에 권지하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우리 여기 앉아서 편안하게 이야기 좀 나눠 볼까요? 배우님 가운데 앉으시고요. 네네. 제가 옆자리에 좀 앉겠습니다.”
다율은 카메라맨 뒤로 숨고, 리포터와 권지하만 화면에 잡히도록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이번 영화 내용 소개 좀 해 주시죠.”
“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다정한 시선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다정한 시선이라. 어떤 뜻일까요?”
“제가 맡은 주인공 주한 역은 참 다정한 사람이에요. 메마른 풀 한 포기 그냥 못 지나치고, 지나가는 길고양이한테도 정을 주죠. 그런 주한이 까칠한 여자주인공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면서 극이 시작돼요.”
다정한 시선. 다율은 그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남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권지하는 자신에게 있어 한없이 다정하다. 어젯밤 다율을 돌봐 준 것만 봐도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다율이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를 찾자면 역시 그의 다정함이 좋아서였다.
“듣기만 해도 상당히 로맨틱한데요. 그러고 보니 배우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주한 역할처럼 실제 연애할 때도 다정하신 편인가요?”
리포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화가중계 피디는 ‘오.’ 하면서 감탄을 했고 다율은 당황했다. 사전에 약속된 바가 없는 질문이었다. 사생활과 관련될 수 있는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하여간 방송국 놈들은 예의가 없었다.
“잠시만요.”
다율이 입 모양으로 말하며 팔을 내저었다. 하지만 권지하는 살짝 눈빛을 보내며 말을 끊지 말라는 신호를 줬다.
“제가 실제 연애할 때가 궁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