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49화 (49/95)

49화

“치우는 거 도와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주연 배우님이 뒷정리라니요.”

“나 호텔리어 역할 맡은 적 있어서 접시 잘 나르는데.”

“그래도 안 돼요. 배우님은 이 밥 사 주시기까지 했잖아요. 제가 치울게요.”

“흠… 그러면 이 매니저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내가 뭐 하나 줘도 되나?”

뜬금없는 소리에 다율이 권지하를 쳐다봤다. 그게 대체 뭐냐는 무언의 눈빛에 권지하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 끝나고 바닷가 산책해요.”

“밤바다 산책요? 너무 좋아요!”

“산책하고 돌아가서 쉬면 딱 좋을 거 같아요.”

“저 얼른 끝내고 올게요. 기다리세요!”

다율은 부리나케 접시를 나르고 커다란 테이블을 접어 굴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1시간 걸릴 일을 20분 만에 끝낸 그는 해맑게 웃으며 권지하에게 달려왔다. 꼭 주인더러 산책을 가자는 강아지의 모습 같았다.

두 사람이 바닷가에 도착하니 낮에 있던 피서객들이 싹 빠져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 인적이 없고 고요했다. 쏴아, 철썩. 밤에 듣는 파도 소리는 다율의 귀에 노래처럼 들려왔다.

“좋네요.”

“상상해수욕장 좋죠.”

그게 아니라 배우님이랑 걷는 게 좋아요.

다율은 권지하 옆을 걸으며 그의 서늘한 손등과 제 손등이 스치는 것도, 그가 자신에게 맞춰 보폭을 좁게 걸어 주는 것도 다 좋았다. 가끔 파도가 강하게 쳐 높게 치솟을 때마다 가슴도 함께 울렁이는 듯했다.

“나도 좋네.”

“…배우님도 좋아요?”

“응. 엄청나게.”

권지하가 다율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다율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와서만은 아니었다. 가슴으로부터 열이 뿜어져 나와 얼굴이 뜨거워졌다.

“…저도 많이 많이 좋아요.”

“그럼 기분 좋은 김에 저기까지 걸을까요?”

권지하가 씩 웃은 다음 해안가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빨갛고 키 큰 등대가 하나 서 있었다.

“와. 불빛 나오네요. 먼 바다까지 비춰요.”

“여기 오기 전에 찾아봤었어요. 어디가 가장 낭만적일까 하고.”

“왜요?”

“매니저랑 낭만적인 시간 좀 가지려고.”

권지하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다율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다.

“밤바다 진짜 낭만 있네요.”

다율은 자신도 밤바다에 반했음을 고백했다. 멀리까지 비추는 빛의 물결, 새까매 보이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푸르름. 그리고 차분한 허밍 같은 파도 소리. 거기에다가 좋아하는 사람이 곁을 걸어 주니 밤바다를 사랑하지 않고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뛰어들면 안 돼요. 위험하니까요.”

“음… 그렇겠죠? 전 낮에도 수영을 못 하니까요.”

“바다 처음이라고 했었나? 그렇게 말했었잖아요.”

“네. 바닷물에 들어가니까 너무 신기했어요. 몸이 자꾸 둥둥 뜨면서 발이 흔들렸어요.”

다율이 촬영 때 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자 권지하가 인상을 썼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그 느낌 싫어해서 수영하는 걸 안 좋아하거든요. 몸 컨트롤 못 하면 위험할 수 있어요. 조심해요.”

“알겠어요. 꼭 조심할게요.”

“그럼 약속.”

권지하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율은 싱그럽게 웃으며 그 손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

오늘은 상상해수욕장의 숲속에서 캠핑하는 신을 찍을 차례였다. 스태프들은 인디언텐트와 산뜻한 타프를 팽팽하게 쳤다. 조명팀은 반사판과 조명을 이곳저곳에 설치했다. 그러자 느지막한 오후인데도 텐트 안을 선명하게 담을 수 있을 만큼 시야가 밝아졌다.

배우들은 감독과 회의를 열었다. 이 신은 권지하가 여자주인공과 캠핑을 와서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신이었다.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건네면서, 평생 너에게만 커피를 내려 주겠다는 대사가 백미였다.

담백하면서도 인간적이고, 또 너무 화려하지 않은 대사로 마음을 표현해야 했기에 연기 내공이 더욱 필요한 장면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다율은 이 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려 영원히 네 커피를 책임지겠다는 말을 하다니. 하지만 일이고 연기니까 어쩔 수 없지. 배우님이 내 애인도 아닌데 간섭할 자격도 없고.

티는 내지 않지만 기분이 처진 다율에게 또 한 번 엑스트라 제의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티끌만 한 배역으로, 커플 근처에서 바비큐를 하는 캠핑족1 역할이었다.

“컷! 매니저님. 배우님 텐트 쪽 쳐다보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권지하 쪽을 쳐다보면 안 되는데 시선이 자꾸 거기로 갔다. 여배우와 진중한 연기를 하고 있는 권지하의 눈빛이 너무나 매혹적인 탓이었다.

게다가 여배우와 권지하는 촬영이 중단되고 짬이 생길 때마다 귓속말을 했다. 정확히는 김혜현이 일방적으로 권지하의 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권지하의 등을 때리기도 했다.

비록 권지하는 그녀만큼 웃지 않았지만,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야. 다율은 괴로웠다. 저 여배우는 <시티 오브 나이트>의 윤혜미와 달랐다. 권지하를 스스럼없이 대했으며, 꽤나 친해 보였다.

내가 모르는 배우님의 모습도 알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슬퍼졌다.

“컷! 캠핑족이 우울한 표정 지으면 안 돼요. 다시 갈게요.”

“앗. 죄송합니다.”

또다시 상념에 잠긴 탓에 자연스러운 캠핑족 연기에 실패했다. 다율은 스태프들에게 사과하고 정신을 연기에 집중했다.

깐깐한 감독에게 다섯 번 만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다율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권지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배우님. 물 드세요.”

다율이 생수병을 건네고 권지하가 받아 들었다. 다음 촬영 신은 캠핑장에서 마음을 확인한 남녀가 바닷가에서 정열적인 포옹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마찬가지로 다율의 마음을 짓누르는 신이었으나, 일은 일이었고 촬영은 빨리 끝날수록 이득이었다. 캠핑 용품을 철수하고 이동식 카메라 레일을 바닷가로 옮기는 스태프들을 따라, 배우들과 다율도 바닷가로 옮겨 갔다.

먼저 바닷가에서 남녀를 비추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촬영 감독과 카메라맨 두 명이 바다에 들어가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향했다.

“물살이 세. 조심하자.”

“네. 오늘 파도 많이 치네요. 카메라 안 흔들려야 할 텐데요.”

그들의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오늘은 해안가 쪽으로 거센 파도가 쳐 포말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 파도가 다시 바다 깊은 곳으로 되돌아가면서 건장한 남자 스태프들의 다리가 휘청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람 또한 거세서 여배우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너무 심하게 뒤덮었다. 권지하도 셔츠 자락이 과하게 바람에 날렸다. 촬영을 잠시 쉬어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의 강풍이었다.

바람 때문에 잠깐 촬영 멈출 수도 있겠네. 배우님이 바로 쉴 수 있도록 의자 펼쳐놔야겠다.

다율은 해안 가까이 다가가 모래사장에 배우용 접이식 의자를 깔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의자를 고정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강풍에 모자가 휙 날아가도 재빠르게 반응할 수 없었다.

“어어, 내 모자…!”

워낙에 바람이 요란하게 불어 다율의 모자는 데구르르 해변을 구른 다음 거의 날듯이 도망갔다. 다율은 빠르게 뛰어 모자를 쫓아갔다. 하지만 모자는 바다 안에 솟아 있는 바위에 걸쳐지고 말았다.

상당히 높고 뾰족한 바위라 그곳까지 가는 일 자체가 벅차 보였다.

어떡하지. 저 모자는 배우님이 지난번 쇼핑에서 사 주신 건데, 포기하기 아까워.

“이 매니저?”

아직까지 바닷가에 있던 권지하가 다율을 발견하고 이름을 외쳤다.

“뭐 해요!”

“모자가 날아가서요.”

“위험하니까 줍지 마요! 내가 주워다 줄게.”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다율은 권지하의 촬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카메라 앞을 얼쩡거리는 것만으로도 민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뛰다시피 하며 바위를 향해 아찔한 곡예를 시작했다.

다율은 양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아 보려 애쓰며 바위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권지하는 퍼뜩 놀라 다율 쪽으로 뛰었다.

“하지 말라니까!”

“거의 다 됐어요.”

지금 다율이 서 있는 지점은 바위의 끄트머리였다. 지상으로부터 수 미터, 그 아래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대로 떨어지면 크게 다칠 가능성이 있었다. 다율은 겁이 나 얼른 모자를 주워 들었다. 그때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다율의 몸이 강한 바람에 흔들렸고, 이내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어어.”

풍덩. 다율은 그대로 바위 밑 바다로 낙하했다.

“으읍!”

산속 출신인 다율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심지어 물에 뜨는 법조차 잘 몰랐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려 보았지만 다율은 꼬르르 소리와 함께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때 풍덩! 해수면에 요란한 소리가 나며 누군가의 그림자가 물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권지하였다.

그는 황급하게 팔을 저어 잠수했다. 수영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다율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권지하는 최대한 숨을 참고 가라앉아가는 다율의 손목을 잡았다.

“꺄악!”

“배우님!”

“매니저랑 물에 빠졌어!”

대기하고 있던 구조 요원들이 물속에 긴급 투입되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빨리 물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권지하와 달리, 다율은 물을 조금 먹었다.

“켁… 켁.”

다율이 입에서 물을 뱉어냈다. 안전요원은 물을 토했으니 괜찮을 거라며 다율을 그늘진 곳으로 옮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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