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슬슬 해가 중천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콘티상의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제는 해가 지기 전에 바닷가 풍경을 찍어야 했다.
“잘 들으세요.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바닷속에서 촬영이 있습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에요.”
조연출이 촬영 개시 전 출연자와 보조 출연자들을 모아놓고 신신당부를 했다. 여름 영화라는 특수성을 살리기 위해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는 역할이 여럿 필요했다.
남녀 주인공이 해안가에 앉아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등 뒤 배경이 썰렁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왈라(현장 사운드)부터 따고 촬영 들어갈게요. 물장구 치고 놀거나 친구를 바다에 빠뜨릴 때 왁자지껄한 소리 있죠?”
음향 감독과 조연출이 참여한 가운데 간단한 설명이 이루어졌다.
“바다에 온몸 담글 필요는 없으시고요. 허리까지만 입수하신 다음에 움직이면서 소리 내 주시면 됩니다. 최대한 생동감 있게! 격렬하게 움직여 주세요. 물소리도 같이 잡혀야 해서요.”
이번에도 단역 제안을 받은 다율은 다른 보조 출연자들과 함께 바다로 다가가 입수했다.
다율은 산속에서 살아온 까닭에 바다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고, 발을 담가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다에서 어떻게 노는지 잘 몰랐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단편적인 지식을 얻었을 뿐이었다.
지방 촬영 때 울산과 삼천포에 가 보긴 했으나 바닷가를 산책한다든가 따로 시간을 내 해수욕을 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바다 풍경은 그저 멀리서 ‘와 멋있다.’ 정도로만 감상했다. 그래서 다율은 잘 몰랐다. 바다의 무서움을.
헉. 신기해.
무릎까지 잠겼을 때는 그냥 물살이 발을 간질이는 느낌이 낯설기만 했는데, 막상 허벅지와 허리까지 수위가 차자 파도가 철썩일 때마다 그 힘에 의해 몸이 들썩거렸다.
시야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 바다가 엄청나게 크고 넓게만 느껴졌고, 비릿한 바다 냄새 때문에 오감이 골고루 자극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파도 소리도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철썩철썩. 귓전이 아플 정도로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물방울이 얼굴에 튀어 눈을 질끈 감아야 하기도 했다.
이게 진짜 바다구나. 넋을 놓은 다율을 보고 해안에 있던 권지하가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 매니저, 바다 처음 본 사람처럼 왜 그래요.”
“저 진짜로 바다 처음 들어와 봐요.”
“정말요?”
권지하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네. 멀리서 지나간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바닷물도 안 먹어 봤겠네요. 엄청 짠데.”
“저 짠 거 잘 못 먹는데.”
“물에 안 빠지게 조심해요. 옆에 구조 요원분들 안내 잘 따르고요.”
“네! 배우님.”
사운드 추출이 무사히 끝났다. 그다음으로는 물장구를 치며 노는 것처럼 연기하는 신이 이어졌고, 해가 떨어짐에 따라 더 이상 슛을 들어갈 수 없었다.
“일몰입니다! 오늘 촬영 마무리하겠습니다.”
스태프들의 선언으로 촬영이 종료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권지하 배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율과 권지하는 지나가는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권지하는 감독을 찾아가 따로 인사를 했다. 내일 촬영도 기대하겠다는 말을 하며 감독이 먼저 퇴장했다.
다율은 권지하의 배우용 의자와 대형 파라솔을 철거한 다음 뻣뻣한 근육을 스트레칭했다. 첫 촬영인 데다가 예상 밖의 단역 투입까지 겪은 탓에 몸이 긴장했던 듯했다.
“오늘 힘들었죠?”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에 커다란 타월을 얹어 주며 말을 걸었다.
“아니에요. 배우님이 훨씬 고생하셨죠. 저 때문에 여러 번 촬영하기도 했고…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스태프분들한테도 민폐였고 배우님 다음 신 촬영도 지연됐잖아요.”
시무룩해하는 다율에게 권지하가 눈을 맞췄다.
“열심히 하느라 그런 거잖아요. 보기 좋았어요.”
“정말요? 배우님한테 칭찬받으니까 기분 좋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말 한마디로 날 구름 위에 떠다니게 만드는 사람. 다율은 권지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오늘도 또 한 번 확인했다.
***
다음 날부터 며칠에 걸쳐 카페 신과 해안가 대화 신 촬영이 계속되었다. 권지하는 멜로 연기 최적화 배우라는 별명에 걸맞게 대사 하나를 해도 사람 마음을 녹이는 톤으로 뱉었다.
김혜현도 연기 경력이 상당했으나, 이 극은 권지하가 혼자 끌고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권지하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엄청났다.
다율 역시 현장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권지하를 모자람 없이 보조했다. 밤의 동침으로 그를 따뜻하게 데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사흘간 이어지고, 다율이 기대하던 날이 왔다. 바로 권지하가 밥차 뷔페를 스태프들에게 대접하는 날이었다.
권지하가 감사의 의미로 사비를 털어 서울에서 출장 뷔페를 부른 만큼, 다율은 오늘 저녁이 훌륭한 식사 자리가 되길 바랐다. 그래서 식사 시간 한참 전부터 케이터링 회사 직원과 해안가에 적당한 자리를 확보하고 대여섯 명씩 앉을 수 있는 테이블마다 꽃과 주류를 준비했다.
“차려 놓고 보니까 근사하네요.”
“네. 배우님과 스태프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다율은 뿌듯한 마음으로 스태프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감탄과 환호를 연발하며 테이블에 차례로 착석했다.
권지하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자, 스태프들이 잘 먹겠다며 꾸벅 인사를 했다. 권지하는 맛있게 먹길 바란다며 감독과 스태프들, 보조 출연자들에게까지 일일이 인사를 했다.
다율은 커다란 접시를 들고 뷔페 줄로 가 권지하의 뒤에 섰다. 다율이 좋아하는 음식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에 권지하는 다율의 접시에 여러 가지 메뉴를 담아 주었다.
“고맙습니다, 배우님.”
“많이 먹고 또 먹어요.”
“물론이죠!”
다율은 밝게 웃으며 꽉 찬 접시를 받아 들었다. 테이블을 살피니 감독과 각 분야의 팀장들이 한 테이블, 주연 배우들끼리 한 테이블이었다. 거기서 꽤 떨어진 곳에 배우들의 매니저 테이블이 따로 있어서 그쪽에 앉으려고 이동하는데 권지하가 다율을 불렀다.
“매니저님, 이리로 와요.”
“저 거기로 가도 돼요?”
“당연하지.”
좀 눈치 보이는 행동 아닌가? 다율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권지하가 말했다.
“나 생선 가시 바르기도 귀찮고 치킨 살점 바르기도 힘드니까 내 옆에 와서 식사 보조 좀 해 줘요.”
지극히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다율은 그 말이 어색해하는 다율에 대한 배려임을 잘 알았기에, 싱긋 웃으며 쪼르르 그 테이블로 달려갔다.
식사를 하기 시작하는데 정재우가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도 주요 배역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율 씨. 여기서 먹네요. 잘됐다.”
“아, 네. 배우님, 맛있게 드세요.”
눈앞에 호두 크랜베리 샐러드가 있었기 때문에 다율은 정중하게 인사한 후 접시를 싹 비우는 데 열중했다. 정재우는 이후로 몇 차례 말을 걸어 보려 애썼으나, 다율은 리필왕이 되어 부지런히 음식 코너와 테이블만 오갈 뿐이었다.
대화 타이밍을 놓친 그와 달리 김혜현은 적당한 주제를 딱 맞게 꺼냈다.
“우리 매니저님. 아니 다율 씨. 몇 살이에요?”
“저 스물둘이요.”
“나이보다 어려 보이네. 애인 있어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공격에 다율은 놀랐다.
“애… 애인이요? 있을 리가.”
“잘생겼는데 왜. 귀엽고 뽀둥하기도 하고. 정말 없어요?”
“없어요.”
옆에서 권지하의 은근한 눈빛이 느껴졌다. 다율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살짝 권지하의 눈치를 봤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면 이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네?”
“다율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요.”
이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예전에 서울에서 한참 드라마를 찍을 당시 권지하가 다율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있다’ ‘배우님만큼 멋있다’라고 솔직하게 답했었다.
그러니 그때와 말이 달라지지 않게 해야 할 텐데. 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다율 딴에는 권지하와 잘 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라고 여겼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율은 살짝 고개를 돌려 권지하를 보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 말에 권지하가 은은하게 웃었다. 김혜현은 어라,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다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면서 입꼬리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둘이 뭐 있나 봐. 천하의 권지하가 툭하면 웃네.
김혜현은 타고나길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도맡으며 30년 외길 인생을 살아온 몸이었다. 시베리아마냥 차가운 미남 권지하가 누구한테 살살 녹으려나 궁금했는데, 말랑하고 보드라운 스타일에 약했군.
김혜현은 음료수를 쪽 빨아들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정재우의 표정에는 먹구름이 한가득이었다. 그 역시 눈치가 빠른 편이었는데, 다율이 제게 관심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가 권지하와 은근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도 연기자는 연기자인 터라 기분 나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럴수록 다율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뺨을 연한 꽃잎색으로 물들인 다율에 대한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투쟁심이 솟아나기도 했다.
네 명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식사가 끝났다.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
“우리 후배님, 나 배 터지게 먹었다. 내일 의상 안 들어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저도 잘 먹었어요. 배우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에서 일어난 다율은 케이터링 회사 직원과 함께 뒷정리를 시작했다. 식사 인원이 많아 정리에도 한참 시간이 걸릴 듯했다. 다율이 접시를 나르는 동안 권지하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