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47화 (47/95)

47화

오후 촬영에는 여자주인공 김혜현의 첫 등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여자주인공 ‘희영’ 역할의 김혜현은 최근 예능 촬영을 위해 외국에 나가 있다가 바로 동해로 오는 상황이었다.

촬영장에 고급 세단이 한 대 도착한다 싶더니, 시원시원하고 늘씬한 외모의 여배우와 그녀를 따르는 스태프들이 내렸다. 김혜현은 감독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 큰 소리로 인사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제 상견례 불참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오늘부터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만 주세요. 안 그래도 지하랑 호흡 맞추는 게 기대돼서 엄청 열심히 연습하고 왔어요.”

김혜현은 바로 옆에 서 있던 권지하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권지하가 아직 신인일 때 그와 같이 단막극을 찍은 적이 있는 사이였다. 김혜현 쪽이 훨씬 선배였고 나이도 연상이었지만 그녀가 권지하를 편안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지하 오랜만이다.”

“그러게, 누나.”

권지하는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또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하며 김혜현에게 인사했다.

“여전히 얼음왕자님이네. 싸늘하다 싸늘해.”

“제가 그래요?”

“어. 냉기가 폴폴 뿜어져 나오는 게 옛날하고 하나도 변한 게 없네.”

김혜현은 권지하에게 핀잔을 주더니, 여기저기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 성격 좋은 사람인 듯했다. 한참 인사를 하러 돌아다니던 김혜현은 다율을 발견하고 어머 소리를 냈다.

“그 매니저 맞죠! 예능!”

“앗, 안녕하세요. 배우님, 반갑습니다.”

“와… 진짜 권지하 인생 부럽다. 이렇게 귀여운 매니저가 있으면 얼마나 일할 맛이 날까. 야, 너 매니저님한테 잘해라.”

“뭐라는 거예요.”

김혜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권지하의 옆구리를 찔렀다. 다율은 칭찬을 받아 좋았지만, 권지하가 다른 여배우에게 반말까지 들으며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기분이 심란했다.

배우님하고 나는 서로 존댓말 하는데. 저분은 우리 배우님하고 진짜 친한가 봐. 부럽다.

다율은 김혜현이 신경 쓰였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 오후 촬영 내용도 다소 의식되었다.

해변가를 자유롭게 걷던 여자주인공이 권지하의 카페에 들르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재회를 한다. 두 사람의 감정 표현이 중요한 장면이기에 감독은 권지하와 김혜현 단둘이서 리허설을 하길 원했다.

다율은 먼발치에서 눈을 맞추며 대사를 주고받는 남녀를 지켜봤다. 부정하고 싶지만 늘씬한 남녀가 마주 보고 서 있으니 그 자체로 그림이 됐다. 주변 스태프들도 소곤거리면서 두 사람의 조합이 좋아 화면에 예쁘게 잡히겠다고 말했다.

김혜현 배우가 부럽네. 우리 배우님한테 반말도 하고 잘 어울리기도 하고… 온종일 마주 보고 서서 연기도 하고.

다율이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촬영팀장 중 한 명이 다율에게 다가왔다.

“매니저님. 잠깐 시간 되세요?”

“네? 어떤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매니저님이 단역 하나 맡아 주셨으면 해서요.”

“단역이요?!”

다율로서는 전혀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촬영팀장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조 출연자 섭외가 꼬여서 서울에서 인원 수급이 제대로 안 됐어요. 죄다 여자분들만 와 버려가지고… 역할상 20대 초반 남자가 필요한데,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아… 보조 출연자가 모자란 상황이시구나.”

영화 촬영은 주연과 조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지나가는 행인, 수상구조대, 카페 손님 모두가 다 나름의 역할을 맡은 단역이었다. 그런 보조 캐스팅 또한 영화의 일부였으며 적재적소에 알맞은 성별과 나이를 고려해 의상까지 입힌 후에 화면에 담는 것이 중요했다.

여러 번 촬영 현장을 오가면서 보조 출연자 부족으로 애를 먹는 상황을 본 적이 있었기에, 다율은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매니저님. 그럼 의상팀 가서 옷 좀 갈아입어 주세요.”

“네!”

다율은 빠르게 권지하의 휴식 장소를 정리해 놓고 음료까지 세팅한 다음 의상팀으로 향했다. 거대한 트레일러 하나가 통째로 의상팀의 창고로 쓰이고 있었는데, 코디네이터는 트럭을 뒤져 다율에게 하와이안 셔츠와 반바지를 쥐여 주고 탈의실로 들여보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다음에는 촬영팀장이 다가와 콘티를 설명해 주었다.

“지나가는 양아치 역할이에요.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 카페로 갈 때 길 가로막고 번호 따려다가 망신당하는 역할입니다.”

“헉. 그러면 대사도 있겠네요?”

“두어 마디만 해 주시면 돼요. 너무 외워서 경직되게 하지 마시고요, 맘에 드는데 번호 좀 달라고 껄렁거리시면 됩니다.”

연기라고는 와우 기획에서 오디션을 볼 때 발연기를 해 본 것이 전부인 다율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연기가 스크린에 박제될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걱정되는데요. 저 연기 잘 못해서….”

“기본만 하시면 돼요. 기본만.”

촬영팀장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때 저 멀리서 권지하가 다율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도 다율이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파이팅 동작을 보였다.

이건 배우님한테 중요한 영화지. 내가 망설이면 안 되겠다. 협조해야겠어.

다율은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자, 메이크업 가자!”

다율은 간단하게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를 만졌다. 그런 다음 해안가로 나가 동선을 안내받았다.

“여주인공이 카페 쪽으로 다가올 거잖아요. 다율 매니저님은 바닷가에서 등장해서 여자주인공 앞을 가로막으면 돼요. 그러고 바로 대사 칩니다.”

“네!”

촬영팀 막내가 슬레이트를 들고 카메라 앞으로 달려 나왔다.

“신 4에 하나!”

“레디, 액션!”

저 멀리서 김혜현이 걷기 시작했다. 다율은 동네 건달에 빙의하기로 결심하고 바다에서 육지 방향으로 발길을 뗐다. 그런데 메소드 연기에 대한 욕심이 과해서일까. 다리에 쓸데없이 힘이 들어갔다.

“컷!”

촬영감독이 칼같이 다율의 연기를 잘랐다.

“다시 갈게요. 다율 매니저님, 지금 다리가 어색하거든요? 자연스럽게 걸어 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다율은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으며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레디, 액션!”

이번에는 과하게 자연스러웠다. 다율은 스르륵 걸어 여배우를 지나쳐 버렸다.

“컷! 집적거리는 역할인데 무심하게 지나치면 안 되죠. 다시 갈게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율은 창피해서 다람쥐 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자신이 연기를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많은 스태프 앞에서 또 권지하 앞에서 발연기를 선보이자니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컷! 손발이 같이 나갔어요. 원위치.”

“컷! 눈길이 혜현 씨를 향해야죠! 원위치로 가세요.”

다율은 제대로 된 대사도 치지 못하고 여러 번 컷을 당했다. 다시 찍을 때마다 빙빙 해안가를 맴도는 게 꼭 트레일러에 실린 회전초밥 신세가 된 듯했다.

이대로라면 배우님한테 폐가 되는 게 아닐까. 너무 죄송하다.

다율은 절망에 빠져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잠시 쉬고 있는데, 권지하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 매니저.”

“배우님….”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저 너무 못하죠.”

“아니. 너무 잘하고 있어요. 영화 처음 찍는데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그냥 자연스럽게 해요.”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상냥하게 웃음 지었다. 다율은 울먹임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요.”

“응. 지금 혜현 누나한테 대시하는 역할이잖아요.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사람 떠올리면서 자신감 가지고 해 봐요. 나 괜찮지? 나한테 전화번호 줘. 나랑 사귀자. 이런 마음가짐으로요.”

“아… 좋아하는 사람 떠올리면서요?”

“네. 그렇게 해야 연기에 힘이 실려요.”

오, 그렇게 하는 거구나. 그럼 난 배우님 떠올리면서 하면 되겠네?

다율은 새로 마음을 다잡고 제자리로 가 섰다.

“다시 갈게요. 슛 들어갑니다. 다들 집중하실게요.”

다율은 김혜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최면을 걸었다. 저건 권 배우님이다. 내가 좋아하는 권지하님이야. 잘생기고 섹시하고 다정하고 혼자 다 하는 남자가 지나가네? 말을 안 걸 수가 없지!

다율이 불쑥 튀어나가 김혜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헤이, 잠깐 스톱.”

촌스럽기 짝이 없으면서도 질척이는 대사였다. 그야말로 양아치라는 배역에 딱인 어휘에 촬영팀은 순간 놀랐다. 갑자기 다율의 연기력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예쁜데 내가 그냥 보낼 수가 없어. 전화번호 좀 알려 줘.”

“너 뭔데.”

“뭐긴. 당신의 눈빛에 빠져 버린 한 마리 짐승.”

“미친 거 아니야?”

김혜현은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정색했다. 다율은 훗, 웃으며 김혜현의 앞으로 작은 발을 디뎌 다가갔다.

“컷! 오케이!”

까다로운 감독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다율은 뛸 듯이 기뻤다. 비록 카메라 한구석에 걸리는 작은 역할이지만 권지하의 영화에 참여했다는 점이 너무나 기분 좋았다. 엄청난 추억을 쌓은 느낌도 들었다.

“다율 씨 연기 잘하네요.”

“매니저 맞아요? 연기 신이네.”

스태프들이 다율을 칭찬해 주었다. 다율은 고맙다며 그들에게 쑥스러운 인사를 보냈다. 권지하는 먼발치에서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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