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46화 (46/95)

46화

찰칵찰칵. 다율은 입꼬리를 씰룩씰룩 올리며 권지하를 다각도로 찍었다.

“얼굴만 크게 나오게도 찍어 볼래요?”

“그래도 돼요?”

“왜 안 돼. 내 매니저인데.”

“그럼 부탁드릴게요.”

권지하가 다율의 핸드폰 가까이 다가왔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다율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어쨌든 무사히 사진 찍기를 종료했다.

내 프로필 사진, 늘 산과 들이었는데 드디어 배우님 사진으로 바꿔 보네. 사실 다율의 프로필 사진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대자연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꽃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다율과 업무 때문에 처음 연락을 트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다율이 제법 나이가 있는 사람인 줄 오해하기도 했다.

다율은 흐뭇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 너무 맛있어요.”

“쓰진 않아요?”

“딱 좋아요.”

사실 다율의 입맛에는 살짝 쓴맛이 감돌았지만, 권지하가 타 준 것이라면 사약도 맛있을 판이었으므로 다율은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다면 달았다.

권지하도 자기 몫의 커피를 내려 다율의 옆자리로 와 앉았다.

“이렇게 이 매니저랑 모닝커피 같이 마시니까 좋네요.”

“네. 저도 너무 좋아요.”

“꼭 신혼부부가 된 것 같지 않아요?”

“네?”

다율은 난데없는 신혼부부 타령에 깜짝 놀랐다. 권지하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 태평했다.

“아니. 보통 보면 신혼 때 부부들이 커피 많이 마시잖아요. 한쪽은 침대에 누워 있고 한쪽이 커피 만들어서 가져다주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 많이 보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어… 그렇네. 말이 되네요.”

“하하. 그러니까 우리도 신혼부부 같단 소리예요.”

권지하가 씩 웃으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다율은 이야기에 휘말려들어 그게 헛소리인 줄도 모르고 환하게 웃었다.

-다음 슛 갑니다. 해변으로 배우님 모실게요.

“아, 가야겠어요. 배우님.”

“응. 그래요.”

다음 신은 남자주인공이 새벽 바다를 혼자 산책하는 장면이었다. 다율은 권지하를 해안가까지 데려다준 다음, 파이팅을 외치고 구석으로 빠졌다.

“레디, 액션!”

촬영팀이 다 같이 촬영 개시 신호를 외쳤다. 그 신호에 맞추어 권지하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컷! 한 번만 다시 갈게요.”

간단한 장면같이 보였지만 촬영팀은 조명이 약했다는 둥 카메라 워킹 속도가 예정한 것과 다르게 빨랐다는 둥 의견을 나누며 재촬영을 결정했다. 그런 다음 여러 번 똑같은 장면을 찍었다. 드디어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서 촬영이 끝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타이트 샷. 얼굴만 찍을게요.”

“네.”

권지하가 또 똑같은 자세로 걸었다. 다율은 벌써 열 번도 넘게 바닷가를 왕복하고 있는 권지하의 인내심이 대단해 보였다. 그때마다 아련함과 쓸쓸함, 슬픔 등의 감정을 담아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권지하의 연기력이 빛났다.

영화란 거 엄청나구나. 드라마도 찍는 과정이 엄청 힘들어 보였지만 영화는 특히나 더 꼼꼼하고 섬세한 작업 같아. 이런 과정을 묵묵히 견디면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는 내 남자, 아니 내 배우… 최고다.

다율의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왔다.

“오케이입니다.”

휴. 드디어 통과구나.

꼴랑 카페 오픈 신 하나, 바닷가 걷는 신 하나 찍었을 뿐인데 벌써 11시 반이었다. 다율은 권지하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에 미니 선풍기를 틀어 준 다음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냉풍기가 가동되는 천막 아래 테이블을 준비했다.

마침 전화가 와 받아 보니 도시락 차를 대동하고 온 팬 매니저였다. 다율은 한달음에 달려 나가 트럭을 세트장 구석에 세우게 하고, 팬 매니저와 함께 현수막 그리고 엑스배너를 차에서 내렸다.

<권지하가 쏜다!-천상천하 권지하 일동>

다율은 아기자기한 현수막과 홍보 배너를 트럭 앞에 설치한 다음, 도시락 묶음을 풀었다. 깔끔하면서도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에는 각종 고기반찬과 더불어 비타민제, 수제 쿠키가 붙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권 배우님, 감사합니다.”

스태프들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주자, 그들은 권지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다율에게 인사를 하는 스태프도 있었다. 다율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권지하 몫의 도시락을 찾았다.

권지하의 도시락은 팬클럽에서 따로 준비한 초호화 4단 찬합이었다. 랍스터와 소갈비, 살치살 구이 같은 메뉴들이 듬뿍 들어간 특제 도시락이었기 때문에 덩치가 컸다. 거기에다가 목에 좋다는 배숙까지 텀블러에 한가득 담겨 있어, 다율은 거의 제 덩치만 한 도시락을 번쩍 들어 올려야 했다.

“으쌰.”

다율은 빠른 걸음으로 도시락을 옮겼다. 권지하가 있는 천막까지 도착한 그는 서둘러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이 매니저 도시락은요?”

“아, 저는 일단 배우님 도시락 사진 찍고 이따 먹으려고요.”

“무슨. 지금 당장 먹어야지, 수량 안 맞아서 동나면 어쩌려고요.”

“배우님 거 챙기는 게 우선이에요. 죄송한데 사진 좀 찍을게요.”

다율이 나름 단호하게 대답하며 도시락 메뉴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그러자 권지하는 못마땅하다는 듯 쯧, 소리를 냈다.

“안 되겠네. 이리 앉아요.”

“네?”

“내 옆에 앉아서 이거 같이 먹어요.”

“배우님 도시락이잖아요. 저는 이따가 남은 거 먹으면 되는데,”

“토 달지 말고 얼른 앉아요.”

권지하가 다율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힘이 워낙에 세 다율은 그대로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권지하가 스테이크를 한 점 집어 들었다. 딱 봐도 마블링이 끝내주는 고기였다.

“자. 한입 먹어요.”

“배우님 먼저 드세요.”

“아냐. 매니저님부터 먼저 먹고 나 먹을게요.”

“괜찮은데.”

“얼른 아 해요.”

다율의 코앞으로 고기가 다가왔다. 냄새가 끝내줬다. 다율은 조금 민망했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떤가 싶었다.

“아.”

“잘 먹네.”

오물오물 고기를 씹는 다율에게 권지하가 음료수를 쥐여 주었다.

“팬분들 정성이 가득해서 그런가? 진짜 맛있네요. 배우님도 얼른 드세요.”

“난 이 매니저 밥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권지하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다율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은근한 눈빛에 다율은 그가 의식되었다.

엄청 설렌다. 기분 좋아.

“자, 이것도 먹어 봐요.”

“고맙습니다.”

“이것도.”

밥 한 숟가락에 눈 맞춤 한 번이 오갔다. 다율은 밥이 너무 달아 설탕을 씹는 기분이었다.

다율이 강하게 우겨 도시락의 절반 이상은 권지하가 먹었다. 사이좋게 식사를 마치고, 다율은 커피차에 다녀오겠노라 했다.

“배우님은 뭐 드실래요?”

“같이 가서 고르죠.”

“아, 그럴까요?”

둘은 천막에서 나와 커피트럭이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식사를 마친 스태프들이 줄을 지어 음료를 주문 중이었다.

“곡물 셰이크 있네요. 저거 먹을래요?”

“앗, 맛있겠어요. 배우님은 커피 드실 건가요?”

두 사람이 메뉴판을 보며 종알대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정재우가 튀어나와 다율의 앞에 섰다.

“선배님. 매니저님. 식사하셨습니까?”

“아, 먹었어요. 정 배우님도 맛있게 드셨어요?”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도시락 감사합니다.”

정재우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권지하는 별말 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하지만 정재우의 시선이 다율의 얼굴에 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캐치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거 드세요.”

“어?”

정재우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음료 컵을 꺼냈다.

“오늘 제일 인기 많은 자몽에이드예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시켜서 재료 떨어지려고 하길래 제가 하나 받아놨어요.”

“…이걸 왜 저한테?”

다율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정재우는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자기 혼자 쑥스러워했다.

“다율 씨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저를요?”

“네. 받아 주세요.”

“어… 일단 감사합니다.”

“받아 줘서 고마워요.”

누가 봐도 핑크빛 기류를 형성하려는 구애의 몸짓이었다. 권지하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허공에 대고 헛웃음을 지었다.

“배우님. 우리 이거 나눠 마실….”

다율이 뒤를 돌았다. 그는 권지하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왜 이러시지.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내 매니저는 내가 챙겨요. 정재우 씨는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아… 선배님, 오해 마십시오. 다율 씨가 바쁜 것 같아서 제가 챙긴 겁니다.”

정재우는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유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기가 센 편이었다.

“흠. 그래요?”

권지하는 한마디를 더 보탤까 하다가 다율을 보고 울컥하는 마음을 참았다. 여기서 더 뭐라고 하면 다율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갑시다.”

“다율 씨, 시원할 때 드세요. 전 가 볼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다율은 자몽에이드를 들고 정재우에게 인사했다. 권지하는 물끄러미 다율을 바라봤다.

“배우님. 왜요?”

“그거 나 줘요.”

“네?”

“갑자기 자몽에이드가 마시고 싶어서요.”

“배우님 단것 안 좋아하시잖아요.”

“아까까지는 그랬는데, 이건 내가 먹어 치워야겠어.”

권지하가 손을 뻗자, 다율은 그에게 음료 잔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음료수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권지하에게 양보할 수 있었다.

“네. 그럼 배우님 드세요. 저는 곡물 셰이크 먹을래요.”

“그래요.”

권지하는 자몽에이드 잔에서 빨대를 빼고 컵을 꽉 움켜쥔 채, 음료를 원샷했다. 벌컥벌컥 음료수를 들이켜는 그의 모습을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아. 잘 마셨다.”

“맛있으세요?”

“응. 앞으로 정재우 배우가 이런 거 줄 때마다 나한테 가져와요.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다율은 해맑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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