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45화 (45/95)

45화

다율은 과연 권지하가 매료될 만큼 아름다운 컷들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시작 부분부터 집중력을 발휘해 영화를 봤다.

내용은 짙은 멜로를 다루고 있었는데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난 연인들이 끝내 행복해진다는 내용이었다. 중간 과정에서 두 연인이 겪는 일들이 너무나 슬프고 아련해 다율은 그만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훌쩍훌쩍.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다율은 눈물 콧물을 다 뽑고 있었다. 권지하는 휴지를 뽑아서 다율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렇게 감동적이에요?”

“네.”

다율의 코까지 닦아 준 권지하가 피식 웃었다.

“이제 그만 자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네. 얼른 누워요.”

말은 태평하게 했지만 막상 커다란 침대 앞에 서니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다율은 침을 꿀꺽 삼키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권지하가 바로 그 위로 엎드렸다. 팔꿈치로 몸을 세워 체중은 실리지 않았지만, 얼굴만큼은 아주 가까웠다.

권지하의 그림자가 제 몸에 드리워지자 다율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최근 권지하가 좋아하는 사람이 혹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솔직히 자신감이 조금 차올랐다. 또한 호기심도 들었다.

이 상황. 배우님의 마음을 확인해 볼 기회이지 않을까? 만약 날 좋아한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갔을 때 기뻐하실 거야.

다율은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권지하의 목에 양팔을 감았다.

“매니저님?”

뜻밖의 행동에 권지하는 조금 놀랐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실 테니까 제가 더 따뜻하게 해드리려고요. 제 위로 누우세요.”

“진심이에요?”

“물론이죠. 자, 어서요.”

다율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활짝 내밀었다. 그리고 권지하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으로 이끌었다. 살끼리 착, 소리를 내며 자석처럼 맞붙었다.

“절 만져 보세요.”

다율이 작게 속삭였다. 권지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다율의 뺨을 매만졌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또 촉촉한 감촉이 손바닥으로부터 온몸을 관통했다. 그러다가 슬슬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만.”

“네?”

권지하가 벌떡 일어났다. 침대를 벗어난 그는 아무런 말 없이 황급하게 복도로 나가 버렸다.

“어…? 배우님.”

“먼저 자요. 조금 있다가 돌아올게.”

갑자기 왜 저러시지. 화장실이 급하신가?

“네. 알겠어요.”

다율은 적극적으로 권지하를 만질 기회가 날아가서 아쉬웠지만, 화장실이 급한 사람을 붙들고 스킨십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

영화 촬영장의 새벽은 동이 터 오르기도 전부터 시작된다. 스태프들은 정신없이 사방을 뛰어다니며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를 체크하고, 배우의 동선에 지장이 없도록 치밀한 리허설을 실시한다. 수십 명이 땀 흘려 단 하나의 컷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였다.

“음향 감독님, 송출 확인해 주세요.”

“네. 확인 완료입니다.”

“슬레이트 준비됐습니다.”

“그럼 배우님 모셔오겠습니다.”

사방이 어수선한 가운데 스태프들끼리 인이어로 소통하는 소리가 다율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렸다. 곧 조연출이 다율의 인이어에 대기실에 계신 배우님을 모시고 와달라 부탁을 넣었다.

“지하, 아니 주한 배우님. 카페 세트로 와달라고 하시네요.”

“그래요. 갑시다.”

바리스타 역할인 탓에 권지하는 흰 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도회적인 매력을 잘 살린 패션에 다율은 눈 호강을 제대로 하는 중이었다.

다율과 권지하가 세트장 옆에 세워 놓은 임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다율은 그를 따라 바닷가를 걸었다. 길게 뻗은 백사장에 아침 해가 조금씩 떠오르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어제 늦은 오후와 밤에 접했을 때도 멋졌지만, 이렇게 이른 새벽의 고요한 바다도 너무나 근사했다.

“시간 없습니다. 해 다 뜨기 전에 슛 건집니다.”

조연출이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며 스태프들을 재촉했다. 오늘 찍는 대망의 첫 번째 신은 아침 일찍 카페 문을 열고 이른 손님을 맞이하는 권지하의 모습이었다.

코디네이터가 권지하의 머리를 흔들림 없이 고정한 다음 재빠르게 빠졌다. 카메라 여러 대와 붐마이크, 대형 조명판이 그를 둘러쌌다.

“신 3에 1!”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쳤다. 각 부문을 맡은 팀장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레디, 액션을 다 같이 외쳤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권지하는 어스름 속에 카페 앞으로 다가가 셔터를 올리고, 매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어두운 바닷가와 대조되는 따뜻하고 밝은 불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카페를 운영해 온 사람처럼 권지하는 능숙한 자세로 커피 드립 도구들을 다루었다. 물을 끓이고 원두를 고르고 컵을 놓는 동작 하나까지도 모두 섬세하고 완벽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율은 마음속으로 끝없이 감탄했다.

진짜 여기 살면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 같잖아. 너무 신기해.

지잉. 다율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다율 매니저님. 오늘 팬 매니저님들이 도시락 트럭이랑 같이 현장 방문하실 거예요. 12시 도착 괜찮나요?]

소속사 직원이 보내온 문자였다. 다율은 아차 싶었다. 이따가 도시락 차가 들어올 자리를 미리 봐두어야 했다.

저쪽에 트레일러랑 장비 못 세워 놓게 조치해야겠어.

다율은 종종걸음으로 세트장 외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큰 그림자와 쿵, 부딪쳤다.

“으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율보다 키가 큰 사람이라, 처음에는 얼굴을 잘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니 상대는 어제 봤던 조연 배우 정재우였다.

“어제 그분이시네요.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네. 그렇네요.”

“권지하 선배님 촬영 때문에 일찍 나오셨구나.”

“네. 지금 저쪽 카페 세트장에서 촬영 중이시거든요. 그럼 전 이만.”

다율이 몸을 틀어 그를 지나치려 했다.

“어어, 지금 많이 바쁘세요?”

“저쪽에 차 들어올 자리 좀 보려고요.”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정재우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그는 성격이 유하고 붙임성이 좋은 편인지, 일하러 가려는 다율에게 따라붙어 어느덧 편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새벽부터 고생이시네요. 배우들이 촬영 있으면 매니저도 같이 나와야 하잖아요.”

“이게 제 일인걸요.”

“프로페셔널하시네요. 대놓고 싫어하는 매니저들도 있던데.”

“저는 배우님하고 같이 다니는 거 좋아해서요.”

다율이 싱긋 웃었다. 정재우는 홀린 듯한 표정을 짓더니, 성큼성큼 앞서가는 다율을 따라잡으려 보폭을 크게 해 걸었다.

“음… 이따가 여기 들어오면 될 것 같은데.”

다율은 적당한 공터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자잘한 일을 맡아 해 주는 팬 매니저에게 사진을 전송하고, 소속사 직원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배우님 슛 끝났습니다. 30분 뒤에 모니터링 끝나고 다시 한번 슛 갈게요.

인이어로 촬영 감독의 지시가 떨어졌다.

“어, 저 이만 가 봐야겠어요.”

“저도요.”

“촬영 신 있으세요?”

“지금은 없는데, 그냥 현장에 있으려고요.”

두 사람은 서둘러 걸어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사실 정재우의 출연 분량은 오후에나 한 컷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세트장 앞에서 대기할 예정이었다.

“아. 그럼 이따가 도시락도 드시겠어요. 저희 팬분들이 서포트 도시락차를 보내 주시기로 했거든요.”

“그래요? 기대되네요.”

두 사람이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권지하가 다율을 불렀다.

“이 매니저.”

“앗, 네.”

“이리 좀 와 봐요.”

다율이 정재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희 배우님이 부르시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권지하에게 달려갔다. 그는 카페의 바 안에 서 있었다.

“배우님. 부르셨어요?”

“응. 나 잠깐 쉬는 시간이라서, 매니저님한테 커피 한잔 내려 주려고 불렀지.”

“정말요?”

다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권지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핸드드립 주전자를 짠 하고 꺼내어 들었다.

“카페 상상에 오신 걸 환영해요.”

“우와. 진짜 바리스타 같아요.”

“원두 골라 주세요. 신 거, 부드러운 거, 꽃향기 나는 거… 이건 좀 씁쓸하고 탄 맛 나는 거예요.”

권지하가 원두들을 하나씩 설명해 주면서 통을 살짝 열어 냄새를 맡게 해 주었다. 다율은 커피에 대해 잘 몰랐지만, 기왕이면 아로마가 특이한 커피를 마셔 보고 싶었다.

“꽃향기로 할게요.”

“탁월한 선택이세요. 그럼 물 데울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시고요. 편하게 앉아 계세요.”

“네. 헤헤.”

권지하가 은색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보글보글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따뜻하게 끓은 물을 곱게 갈린 원두 위에 흠뻑 적시자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와. 향기 좋아요.”

“맛도 괜찮을 거예요.”

권지하는 주전자를 요령껏 돌리며 커피를 내렸다. 또르르, 소리와 함께 풍성한 향의 커피가 한 잔 가득 완성되었다.

“저 이거 사진 찍을래요.”

“좋지.”

“프로필 사진으로 해 놔야지.”

“기왕이면 내 사진은 안 될까?”

“배우님 사진을요?”

“응.”

그렇게 말하더니 권지하는 주전자를 한 손에 쥐고 전문 바리스타 같은 포즈를 취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