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하하. 그렇게 직설적인 표현은 부끄러운데.”
“엄청 화려하네요. 와, 이 양탄자 좀 봐.”
다율은 바닥을 수놓은 화려한 무늬의 카펫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권지하는 다율의 인테리어 취향이 이런 쪽이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수납장이 별로 없네요.”
“물건이 많이 없어서.”
“수납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다람쥐의 저장 본능이 튀어나왔다. 다율은 썰렁하고 멋진 벽 한구석을 가리키며 자기 키만 한 수납장이 있으면 딱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오케이. 인테리어는 화려하고 요란하게, 수납장은 큰 놈으로. 적극 참고할게요.”
신혼집을 상당히 화려하게 꾸며야겠군. 수납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그쪽도 신경 써야겠고. 그래, 최대한 취향을 맞춰 줘야지. 내가 데리고 살 거니까.
권지하는 다율이 읊어 주는 인테리어의 장단점을 핸드폰에 메모했다.
한 바퀴 인테리어 구경이 끝나고 다율은 권지하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책상 위에 희귀한 사진이 보였다.
“교복! 교복이다!”
세상에. 다율은 펄쩍 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저 감탄했다.
액자에 담긴 것은 대략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권지하였다. 멋지고 잘생긴 권지하는 교복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의자에 앉아 무표정하게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지금과 아주 비슷한 이미지이면서도 앳된 느낌이 살아 있었다.
소년미 넘치는 배우님 진짜 멋있다. 그런데 좀 귀엽기도 해.
다율은 사진 속의 미소년을 보며 눈에서 꿀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런데 이 산속에 학교가 있나? 다율은 호기심이 일었다.
“학교는 이 근처 학교에 다니셨어요?”
“근처는 근처인데 좀 특수한 학교를 다녔어요. 내가 어릴 때 몸이 약했어서. 홈스쿨링 하던 때도 있었고.”
“아. 그러셨구나. 몰랐어요.”
사진 속 권지하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였지만,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학교 다니시려면 힘드셨겠네요. 그럼 부모님이 데려다주셨나요?”
“아뇨. 자전거 타고 다녔어요.”
“와… 자전거 타고 저 숲길을 달렸다고요?”
청춘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겠네. 다율은 지금보다 조금 앳된 권지하가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것만으로 청량한 기운이 물씬 풍겨 왔다.
“덕분에 맑은 공기는 실컷 마셨죠. 운동도 되고요.”
“그러게요. 너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애들 교육 생각하면 역시 도시 생활이 좋은 거 같기도 해요.”
권지하가 스치듯 말했다. 다율도 그 의견에는 동의하는 바가 있었다. 어릴 적 너무 깊은 산속에 살아 수인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배우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맞아요. 교육은 역시 대도시죠. 오죽하면 학군이 집값에 영향을 끼치겠어요.”
“음. 역시 매니저님 생각도 그렇죠?”
전원주택을 좋아하지만 아이 교육을 위해서는 서울이 좋겠다고 하는군. 어디서 살아야 할지 갈등되네. 권지하는 고민이 깊었다.
방에서 실컷 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9시였다. 내일 촬영을 위해 준비를 하려면 슬슬 동해로 돌아가야 했다.
“저희 이만 가 볼게요.”
“벌써 가니? 자고 가지 그래.”
“숙소에 체크인도 해야 하고 내일 아침부터 바로 촬영이라서요. 가서 준비 좀 해야 돼요.”
“아쉽네.”
“나중에는 질리도록 자고 갈 건데요, 뭐.”
“그건 그래.”
어머니는 아쉬워하다가도 나중을 약속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눈치였다.
“같이 또 올게요.”
권지하가 대문을 나서며 말했다. 다율은 설마 자신을 또 데리고 이 집에 오겠다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래. 또 같이 와. 아니, 와야지.”
권지하의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다율은 진심으로 초대받은 듯해 마음이 뿌듯해져 왔다. 이 집에 또 오고 싶어. 맛있는 밥도 얻어먹고.
“잘 지내다 갑니다. 또 뵐게요. 어머님, 아버님.”
다율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어머니는 다율의 손을 잡고 권지하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네. 알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세요.”
매니저에게 으레 하는 말인 줄로만 알고, 다율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 가죠, 이 매니저.”
“네!”
다율은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는 동안 몇 번이나 저택을 돌아보았다. 즐겁고 행복하고 따뜻한 집을 두고 가자니 발이 좀처럼 안 떼어졌다.
자연스럽게도 다율의 머릿속에는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떠올랐다.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하면서 자신을 키워 주신 할아버지와도 헤어졌다.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던 때, 포근한 가정을 꿈꿨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꿈이었다.
그 이후로는 어땠던가. 수인 헌터에게 쫓겨서 서울로 온 이후로는 가족을 보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 오늘 지하네 집에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 쓸쓸해지고 가족이 보고 싶어졌다.
나도 내 가족과 스위트홈에 머무르고 싶어. 알콩달콩하게 아기다람쥐도 키우고, 든든한 배우자도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 꿈은… 이루기 어렵겠지. 지금은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는 데 급급하니까.
다율은 입맛이 썼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련하게 가족의 그림을 그렸다.
***
동해로 돌아온 두 사람은 촬영장 바로 근처에 위치한 리조트로 들어섰다.
“짐은 제가 옮길게요, 배우님.”
“아니에요. 내가 들게요.”
“제가 매니저잖아요. 제가 해야죠.”
다율과 권지하가 투닥거리는 동안 직원이 달려와 두 사람 몫의 짐을 모두 들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체크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호텔 측에 모든 스태프와 출연진에 대한 정보가 통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런트 데스크 직원도 발 빠르게 두 사람의 객실을 찾아 줄 수 있었다.
“객실은 이미 배정되어 있습니다. 배우님 객실은 최상층에 위치한 오션뷰 스위트룸입니다. 여기 카드 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율과 권지하는 객실 키를 받아 들고 최고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 다율은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큰 창을 통해 짙푸른 밤바다가 거칠 것 없이 눈에 들어왔고,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별처럼 빛났다.
“정말 근사하네요. 최고예요.”
권지하와 함께 짤막한 지방 촬영을 경험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근사한 리조트에 투숙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다율은 여행 온 사람처럼 신이 났다.
다율은 넋 나간 표정으로 객실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와! 욕실 넓다. 거실도 따로 있네요. 여기서 열 명이 자도 넉넉하겠어요.”
무엇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다. 다율은 운동장만 한 객실을 이 잡듯 뒤지다가 침실을 발견했다. 과연 기대한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커튼에 우아한 침대가 돋보였다. 거기에 세련되고 모던한 장식물과 미술품까지, 침실은 아늑하면서도 멋이 흘러넘쳤다.
“엇, 그런데 침대가 하나네요?”
초대형 킹사이즈 베드가 덜렁 한 개만 놓여 있는 모습에 다율은 다소 놀랐다. 객실의 크기로 짐작했을 때는 최소 침대가 두세 개일 줄로만 알았다.
“당연히 한 개 있는 객실로 해달라고 미리 요청했죠. 나 이 매니저 없으면 못 자잖아요.”
“아… 그렇네요.”
여기서도 껴안고 자야겠구나. 이렇게 낭만적인 기운이 가득한 침대에서도…!
다율은 아파트에 있는 평범한 침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로맨틱한 침대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설레면서 엉큼한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집에서도 같은 침대를 쓰고 리조트에서도 같은 침대에 눕다니. 이거 완전 연애 아니야? 그것도 어른의 연애…! 성인 간의 스킨십…!
침대를 보면 볼수록 다율의 망상은 깊어져만 갔다.
혹시 내가 나를 제어 못 하면 어떡하지? 배우님의 마음도 확실하게 모르는데 일을 저지를 수도 없어. 아직 어른의 문을 넘기에는 자신이 없다고. 스물두 살 먹고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난 아직 성숙하지 못한가 봐.
다율은 어느새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하고서 침대 근처를 뱅뱅 맴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권지하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용기가 안 나….”
“뭐라고요?”
“네?!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와요. 나는 다른 욕실에서 씻을게요.”
“알겠습니다.”
다율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씻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리나케 세면도구와 헤어밴드를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열심히 몸을 씻고 뽀득뽀득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니 피로가 한결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율은 면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을 하고서 응접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곧 가운 차림의 권지하가 머리를 적신 채로 등장했다.
“룸서비스라도 시킬까요?”
“좋아요.”
권지하가 다이닝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와인과 치즈,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얼마 안 가 정갈한 음식과 와인병이 트레이에 실려 도착했다. 다율은 엊그제 귀가 튀어나온 사건을 되새기며 술은 조금만 마시기로 결심했다.
스파클링 와인을 한 잔씩 나누어 따르고, 두 사람은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마침 TV에서는 영화를 방영해 주고 있었다.
“어. 내가 좋아하는 영화네요.”
“배우님이 좋아하는 영화요?”
인간 문물을 잘 모르는 다율은 처음 보는 영화였다.
“이거 킨 영화제에서도 상을 탔던 영화인데… 매니저님은 그때 어려서 잘 모를 수도 있겠다.”
“네. 잘 모르겠어요.”
권지하의 설명에 의하면 권지하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상업 데뷔 영화로,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꼭 이 감독과 같이 작업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화면 한 컷 한 컷에 영혼이 담겨 있고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