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43화 (43/95)

43화

둘은 총감독과 그 아래 팀장들, 음향 감독 그리고 미술 감독 등에게 인사를 일일이 한 다음 촬영장을 벗어났다.

“오늘은 상견례만 하는 날이라 빨리 끝났네요.”

“다행이에요. 우리 배우님 머리 아프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다율이 부랴부랴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권지하를 챙겼다. 그런데 권지하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만, 다율을 막아 세웠다.

“나 머리 아픈 거 다 나았고요. 우리 오늘 저녁에 같이 놀까요?”

“리조트에서요?”

“아뇨. 실은 여기서 우리 집이 가깝거든요. 집에 들러서 부모님께 인사하면 좋을 것 같은데.”

“와. 좋아요!”

안 그래도 언제 찾아뵙나 했는데 집이 바로 이 근처라니. 조금 급한 감은 있었으나 다율은 스케줄상 오늘이 최선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정신없이 촬영에 들어가고 또 야간 촬영도 예정되어 있으므로, 오후에 넉넉하게 시간을 내려면 오늘이 적격일 것이었다.

“그럼 내가 일단 집에 전화할게요.”

“좋아요!”

권지하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예요. 강원도 왔는데 잠깐 집에 들르려고요.”

다율은 옆에 얌전히 서서 권지하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대화 중에 다율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다율의 귀가 쫑긋 섰다.

“응. 다율이랑 찾아뵈려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가야죠.”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들뜬 목소리도 들렸다.

-다율이도 온다고? 미리 말하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었을 텐데.

“하하. 괜찮아요. 맛있는 건 다음에도 많이 해 주실 거잖아요. 그럼 다율이 데리고 지금 출발할게요. 여기 동해시라서 얼마 안 걸릴 거 같아요.”

-그래. 그럼 다율이랑 손 꼭 잡고 얼른 와.

“네.”

내 이름도 아시는구나. 다율이라고 친근하게 불러 주셨어. 매니저님보다 훨씬 듣기 좋다.

다율은 싱글싱글 웃으며 조수석에 올랐다. 권지하가 운전대를 잡고 곧 큰 도로로 차를 몰았다. 해안도로를 끼고 한참 드라이브하는 동안 창밖에서는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들어왔고, 바다에는 오후의 햇살이 비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름다운 풍경에 다율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놀러 온 것 같네요.”

“놀러 가는 것 맞는데. 재미있게 놀아도 돼요.”

권지하의 말에 다율은 마음이 더욱 들떴다. 기분 좋은 소풍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차는 해안가를 뒤로하고 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느 정도 깊게 들어가나 했더니, 다율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울창한 숲길이 펼쳐지는 동안 계속해서 산속으로 달렸다. 천연 국립공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수풀이 울창한데도 관광객은 전혀 보이지 않아 신기했다.

“와. 되게 깊은 곳에 집이 있나 봐요.”

“네. 그래서 차 없으면 나다니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면허를 일찍 땄죠.”

“그러셨구나.”

하긴. 이런 데 살다 보면 운전을 빨리 배워야겠구나. 다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으로 펼쳐진 녹음을 구경했다.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차도가 닦여 있긴 했지만 통행하는 차는 없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사람이 사는 집이 나오기는 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깊은 산속까지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평평한 길이 나타났고, 이윽고 그림처럼 잘 가꿔진 작은 숲과 졸졸 흐르는 계곡이 펼쳐졌다. 그 너머에 고풍스러운 서양풍 저택이 보였다.

“다 왔네요.”

“와! 저 집이에요?”

“네.”

배우님은 혹시 왕자님인가? 소설 속에서나 이런 집이 있는 줄 알았는데. 집까지 멋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다율은 감탄하며 차에서 내렸다. 곧 권지하의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달려 나왔다.

“지하야! 다율 매니저님!”

“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

다율이 씩씩하게 인사했다. 권지하의 어머니는 살갑게 다율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더 잘생겨졌네요.”

“저요?”

“우리 지하가 매일같이 전화로 칭찬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배우님이 내 칭찬을…?

다율은 활짝 웃으며 헤헤거렸다.

권지하의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제자리에 서서 왔냐며 두 사람을 무뚝뚝하게 맞이했다. 하지만 반가운 기색은 감출 수 없었는지 입가에는 은은한 웃음이 감돌았다.

“손님을 여기 세워두면 안 되지. 얼른 들어가자.”

“네.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길을 안내했다. 대문 너머 정원은 크기가 어마어마했으며, 모든 나무가 제 빛깔대로 관리되고 있었다. 지나치게 인위적이지 않게 가꿔진 정원의 모습에 다율은 기분이 좋아졌다.

나무 냄새, 흙냄새 다 싱그럽다. 이 돌계단도 멋져!

다율이 정원을 둘러보며 함박웃음을 짓자, 권지하 가족도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얘는 전원주택 파야.

속으로는 세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했다.

***

응접실로 안내된 다율은 손님용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음식을 준비할 테니 기다리라며 다율과 권지하를 놔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 응접실은 화려하고 멋졌다. 하지만 고급 가구와 장식물보다도 더욱 다율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거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권지하의 사진이었다.

“배우님 어렸을 때네요?”

“응. 팬미팅 때 공개하지 않은 것들이에요.”

협탁 위에도, 벽에도 액자가 한가득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찍은 것, 혼자 찍은 것 등 사진은 다양했다.

“이건 열 살 때네요. 내 생일날이었어요.”

얼굴에 케이크 크림을 묻히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진이 지금과 너무 닮아 귀여웠다. 다율은 쿡쿡 웃었다.

“이건 열두 살 때쯤인 것 같은데요. 하기 싫다는 수영 시켜서 기분 안 좋았던 날이네. 수영복 보니까 기억이 나.”

사진 속 소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찌그러진 튜브를 들고 있었다.

“이때는 기분이 아주 좋았나 봐. 날아다니네.”

권지하가 가리킨 것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권지하가 누나와 함께 펄쩍 뛰어오르는 사진이었다. 누나 역시 권지하를 닮아 인상이 날카롭고 얼굴이 하얀 미인이었다.

“와. 둘이 똑같아요.”

“많이들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봐도 이렇게 닮았을까 궁금해지네요.”

“음. 그거는 매니저님이 직접 누나 보고 판단해요.”

“뵐 일이 있을까요?”

“많이 있지.”

내가 배우님 누나를 볼 일이 많이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다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주방 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와서 밥들 먹어!”

“네!”

다율과 권지하가 주방으로 가자,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본 듯한 거대한 식탁이 다율의 시야를 꽉 채웠다.

헉. 엄청나다.

“차린 게 별로 없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진짜 맛있는 거 많아 보이는걸요! 잘 먹겠습니다.”

“다율 매니저가 좋아한다고 해서 급하게 견과류 멸치볶음이랑 땅콩조림 좀 해 봤는데, 솜씨가 없어서…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다율은 아몬드와 땅콩의 이중 공격에 감동했다. 그뿐 아니라 온갖 고기볶음과 찜에 생선구이, 맛깔스러운 샐러드와 치즈 종류까지 상 위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호텔 뷔페에서도 본 적 없는 이색적인 요리도 몇 가지 보여 다율은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보기 좋네.”

“음. 보기 좋다.”

부모님은 식탁 위에 아예 팔꿈치를 괴고 다율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부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자, 다율은 부담이 됐다.

“매니저님 그만 쳐다보세요. 닳겠어요.”

“크흠. 닳진 않겠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그만 쳐다보마.”

아버지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권지하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다율을 감상했다. 이따금 맛있는 반찬을 다율의 앞에 놓아 주기도 했다.

“제가 할게요. 어머니, 식사하세요.”

“너무 재밌는데. 밥 먹는 것만 봐도 재밌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켁.”

다율은 결국 사레가 들렸다. 컥컥대는 다율에게 권지하가 물컵을 건넸다.

“제…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어머, 미안해. 많이 부담됐나 봐.”

“아뇨. 그냥…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요.”

황금다람쥐들은 일찌감치 새끼를 독립시키고 야생에서 홀로 살아가게 한다. 그 점이 고유의 문화고 본능이기도 했지만, 다율은 식구 하나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이 굉장히 외로울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반찬을 권유당하다니. 물도 건네주고, 지켜봐 주기도 하다니.

다율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는 느낌이었다.

“감사해요. 정말로요.”

너무 맛있는 밥이에요.

다율은 밥을 꼭꼭 씹어 삼키는 내내 목이 메었다.

***

다율이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자 가족들은 박수를 쳤다. 권지하의 아버지도 허허 웃으며 짝짝 손뼉을 치는 바람에 다율은 귀가 다 빨개졌다. 이게 뭐라고 박수까지 쳐 주신담. 그러면서도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내 방 구경할래요?”

“배우님 방이요?”

말도 안 돼. 이건 대박 행운. 로또 당첨보다도 더 진귀한 기회가 아닌가.

다율은 불쑥 튀어나오려는 팬심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권지하의 방은 2층이었다.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집 떠난 지가 몇 년 돼서 썰렁하긴 한데… 그래도 최대한 어릴 때 모습 많이 남겨놨거든요. 자, 들어와요.”

“네.”

방 안은 도련님 방답게 간단한 가구로만 꾸며져 있지만 굉장히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느낌이었다. 침대에는 벨벳 천이 깔려 있었으며, 테이블은 마호가니 재질이었다.

“우와… 왕자님의 침실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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