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네? 아닙니다. 저 직장인입니다.”
“아… 옷차림이 조금 어려 보여서. 학생 아니셨구나. 죄송합니다.”
“네. 지금도 일하러 온 길인데….”
그런 건 왜 물어보지. 다율이 눈을 끔뻑거리자, 남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율은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뺨을 슥슥 닦았다.
“그러시구나.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네? 시간이라니요?”
혹시 사이비 종교 권유나 옥장판 외판원은 아닐까. 다율은 연애 쪽으로는 눈치가 없었으나, 어린 나이에 고생을 많이 해 보고 사회적으로는 다사다난하게 경험이 많았다.
인상 좋은 사람이 친절하게 굴면서 말을 걸면 거의 다 사기라고 보면 되지.
다율은 남자와 깊이 이야기해 봤자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남자는 꽤 끈질긴 성격인지 뒤돌려는 다율의 앞을 가로막으며 계속해 말을 걸었다.
“지금 바쁘시면 전화번호만 좀 알려 주세요.”
“죄송해요. 제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요.”
다율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빠져나가려는 차였다. 등 뒤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엇, 선배님.”
“배우님!”
남자가 다율의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알은체를 했다. 다율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권지하가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권지하 선배님.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 현수 역 맡은 정재우입니다.”
“알아요. 우리 몇 달 전에 미팅에서 봤잖아요.”
권지하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으나, 그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쯤은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기계적이었다. 다율은 살그머니 권지하의 눈치를 보며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어… 그런데 선배님. 혹시 이분이랑 아는 사이세요?”
다율을 보며 정재우가 물었다. 권지하의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내 매니저인데.”
“매니저요?”
정재우는 깜짝 놀란 얼굴을 만들다가 곧 화색을 띠었다.
“그랬구나.”
“안녕하세요. 권 배우님 매니저 이다율입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여주인공 동창 현수 역, 정재우입니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스치듯 CF와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다율은 그제야 눈앞의 인물이 요새 꽤나 인기 있는 남자 배우임을 기억해 냈다.
정재우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다율은 별생각 없이 그 손을 맞잡으려 했다. 그 손 사이로 권지하가 팔을 뻗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우리 시간 없으니까 얼른 가죠.”
깔끔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에 정재우의 악수는 묵살되었다. 다율은 권지하의 온기 없는 얼굴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일을 하러 가는 와중이었고, 미팅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하는 게 맞았다. 물론 이렇게까지 차갑게 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율은 권지하의 말이라면 다 듣는 매니저였다.
“네. 알겠습니다.”
다율은 정재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차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중에 뵐게요!”
정재우는 멀어져 가는 다율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다. 다율이 뒤를 돌아보려 하자, 권지하는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
“우와. 이건 언제 사놓으셨어요?”
차에 오른 다율에게 권지하가 호두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따끈따끈하게 김이 오르고 겉은 바삭한 게 갓 구운 듯했다.
“우리 매니저님 주려고 재빠르게 사 왔죠.”
“너무 맛있다.”
다율이 오물오물 호두과자를 먹었다. 역시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따뜻하고 맛있었다. 그런데 권지하에게도 하나 권하려고 돌아보니, 그는 상당히 저기압인 것 같았다.
“배우님, 컨디션 안 좋으세요?”
“아니에요. 그냥 잠깐 머리가 아파서….”
권지하가 이마를 짚었다. 다율은 호두과자를 내려놓고 권지하에게 바짝 몸을 숙였다.
“갑자기 왜 그러시지.”
“지난번에 안 끌어안고 잤더니 컨디션이 확 떨어진 것 같아요.”
“헉. 어떡해.”
“몸살 날 것 같네요.”
다율은 마음이 아팠다. 권지하의 컨디션을 지켜 줘야 했는데, 눈치 없이 귀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하룻밤을 같이 보내 주지 못해 안타까웠다.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갈래요?”
“쉬었다가…?”
“제가 따뜻하게 해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저기 쉼터 있네.”
권지하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휴게소 쉼터를 가리켰다. 다율은 차를 서행시켜 구석진 쉼터로 이동했다.
“어… 다 왔다.”
“네.”
“으음… 그러면요.”
다율이 우물쭈물거렸다. 권지하는 다율이 왜 이렇게 망설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이런 거 처음이지만요….”
다율이 먼저 손을 뻗어 권지하의 손등에 얹었다. 그리고 권지하의 손을 살짝 감싼 후 들어 올려 자기 입술 쪽으로 가져왔다. 권지하는 다소 놀랐다. 스킨십에 있어서 다율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매니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실까 봐….”
다율이 눈을 내리깔더니,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권지하의 손등 한가운데에 입술을 내려앉혔다. 촉. 작은 소리가 조용한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다율의 뺨이 장밋빛으로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따뜻한 얼굴에 열이 오르자 권지하의 찬 손에 금방 열기가 전염되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권지하의 손이 따뜻해졌다.
그다음으로 다율은 권지하의 두 손을 잡아 자기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끝마다 입을 맞추고, 살짝 입술을 비비기까지 하는 모습에 권지하는 혈압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곳은 고속도로고 공공장소. 변태적인 시선으로 다율을 핥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네요.”
그래서 최대한 간결하게 소감을 밝혔다. 다율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되물었다.
“진짜요?”
“네. 아주 좋아요. 조금 더 해 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손 말고 다른 데도 될까?”
“네?”
“얼굴에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마나 내 볼에. 어때요?”
다율의 동공이 흔들렸다. 권지하가 망설이는 다율의 얼굴 앞으로 슥, 고개를 내밀었다. 다율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할 뻔했다.
“아, 안 돼요.”
“왜?”
“그건… 그, 그게….”
배우님이 너무 잘생겨서 제가 입술 박치기를 해 버릴 것 같아요…! 물고 빨고 이상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요.
우리 배우님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돼.
열혈 매니저 다율은 손을 내려 자기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서였다.
“얼… 얼른 가야 하니까요!”
“아… 그렇네. 벌써 1시가 넘었어.”
“바쁘다 바빠!”
다율이 차를 급 출발시켰다. 그는 F1 레이서를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드리프트로 쉼터에서 빠져나온 다음,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
미팅 장소는 상상해수욕장 근처에 위치한 리조트로, 건물 전체가 제작본부로 쓰일 예정이었다. 권지하와 다율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감독을 찾았다. 해안가에 위치한 세트장에 나가 보니 중년의 여감독은 배우들의 동선을 체크하고 장비 세팅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오, 권 배우. 오랜만이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권지하 배우님 로드 매니저, 이다율이라고 합니다.”
“반갑네요. TV로 본 적 있는데 예능 잘하더군.”
“감사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다율은 영화 촬영장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한 감이 있었지만, 친절해 보이는 감독과 그녀의 우호적인 태도에 힘이 났다.
“그럼 일단 미술팀하고 미팅을 해 볼까요.”
“네. 알겠습니다.”
감독이 세트장 근처를 맴돌던 미술 감독을 불러냈다. 권지하와 감독, 미술 감독 그리고 다율은 모래사장 한구석에 준비된 촬영용 천막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저게 주인공 유주한의 카페로 쓰일 공간이거든요. 핸드드립 전문점답게 겉을 핸드페인팅으로 꾸몄고요. 바닷가로 창을 냈어요.”
상상해수욕장은 풍경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다율도 익히 그 명성을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와 보니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른 바다에 새하얗고 고운 모래, 그리고 그 한구석에 멋지게 세워진 작은 카페가 너무나 근사했다.
이게 바로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거구나. 다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카페 촬영은 당장 내일부터 개시될 예정이라 실내 인테리어도 다 갖춰 놓은 상태입니다. 이따가 한번 들어가서 소품들 위치 확인해 보실게요.”
“그러죠.”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저도 의견 내겠습니다.”
다율은 옆에서 깨알같이 메모를 하면서도 권지하의 당당한 모습과 스태프들이 그를 존중하다 못해 떠받드는 모습에 조금 놀랐고, 또 뿌듯했다.
많이 멋있고 또 자랑스럽네. 이 사람이 내 배우라니.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씩 웃었다.
“매니저님은 팬분들 서포터 위치 정해 주셔야 돼요. 밥차랑 커피차 매일 들어올 예정이죠?”
“아, 네. 맞습니다. 동선에 방해 안 되는 구역에 세울 예정인데요. 저 트레일러 너머에 설치하도록 할게요.”
“커피차랑 밥차는 지방 촬영의 꽃이죠. 배우님, 정말 감사해요.”
“팬분들이 많이 신청해 주셔서 저도 기뻐요. 맛있는 것들 많이 올 거예요.”
이번 영화 서포트 신청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원이 몰렸다. 팬 카페, 커뮤니티, 개인까지 수없는 팬들을 다 받아 줄 수 없는 노릇이라 다율은 선착순 메일을 받아 순번을 지정해 주는 노동까지 했다.
그래도 매일 핫도그, 추로스, 닭꼬치 같은 간식과 함께 음료 트럭이 촬영장을 찾아 준다니 다율은 굉장히 행복했다. 권지하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팬들이 얼마나 이 영화를 기대하고 있는지 잘 보여 줄 수 있는 면면이기도 했고.
“그럼 오늘은 이만 숙소 들어가 보시고요. 내일 아침부터 이 촬영 시트대로 진행 시작할게요.”
두 사람은 촬영 감독에게 내일 분량의 콘티를 전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