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41화 (41/95)

41화

배우님도 산속에서 자라셨구나. 괜히 반갑네.

권지하의 집은 동해안에서 한참 안쪽으로 파고들어 가면 있는 산 속에 있었다. 깊고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저택이 그의 본가였는데, 지금은 권지하의 누나도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부모님만 넓은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럼 배우님도 어려서 산 뛰어다니고 개울에서 물장구치고 놀았겠네요?”

수천 평의 대지에 가꾸어진 정원과 그에 딸린 숲, 고급스러운 목재로 지어진 건물과 별채. 권지하의 가족이 누리는 삶은 누구나 동경할 법한 호화로운 전원생활이었지만, 다율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수준의 질문을 던졌다.

“뛰고… 개울?”

“여름에는 수박도 서리해 먹고, 밤이면 원두막에서 옥수수도 먹고요!”

“음… 실내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만 먹었는데.”

권지하는 딱히 개구진 편도 아니었고, 주변에는 서리할 만한 농작물도 없었다. 어려서는 홈스쿨링으로 바빴고 흙을 가지고 노는 타입도 아니었으므로 흔히 말하는 시골 아이처럼 자라지는 않았다.

“그래요? 산골이라고 해서 전 배우님도 새까맣게 타서 놀러 다니고 그러셨을 줄 알았어요.”

“하하. 아니에요. 우리 집에 가서 사진이라도 보여 줄까요?”

“사진요?”

“팬미팅 때 공개한 사진은 일부고, 우리 집 가면 앨범 있거든요. 촬영 중에 시간 비면 우리 집 다녀올래요?”

“진짜요? 가도 돼요?”

다율은 너무 기쁘다 못해 영광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집에 초대라니, 앨범을 직접 보여 준다니. 거절할 수 없는 유혹에 다율은 신이 나 방방 뛰었다.

“좋아요!”

“저번에 우리 부모님도 뵈었잖아요. 안 그래도 매니저님 한번 집에 데려오라고 성화세요.”

“헉. 정말요?”

권지하의 부모님이라면 또 강렬한 기억이 스쳤다. 수인권 운동을 하는 어머니가 굉장히 좋은 분 같았고 화통한 아버지도 매력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그때 부모님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셨지. 신혼집을 구하려거든 시골이 낫냐 서울이 낫냐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왜 나한테 물으셨을까. 매니저의 신혼집이 왜 궁금하신 거지. 난 그분들 입장에서 제3자일 뿐인데, 어째서?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면 해답의 실마리가 잡힐 것도 같았지만,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아뇨. 지난번에 뵀던 부모님 생각이 나서요. 참 좋으신 분들이셨어요.”

“그렇죠? 부모님도 이 매니저 마음에 드셨대요.”

“와, 진짜요?”

다율이 화사하게 웃었다.

“응. 되게 좋게 보신 것 같더라고.”

권지하가 은근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두 사람은 아파트에서 나왔다.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 세트장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오전부터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평일의 고속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다율이 운전하는 SUV는 예정된 시간보다 빠르게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12시면 강원도 닿겠는데요. 미팅이 3시 넘어서니까 시간 많이 남아요.”

“그럼 중간에 밥 좀 먹고 갈까요.”

“좋아요.”

권지하가 맛집을 검색했다. 멀지 않은 곳에 도토리 요리 전문점이 하나 있었고 평도 좋았다. 다율은 입꼬리를 씰룩씰룩 올리며 빠르게 차를 몰았다.

도토리 효과인지 차는 12시보다도 더 빨리 휴게소 인근 식당에 도착했다. 주차를 마치고 식당에 들어간 두 사람은 한차례 사인 공세에 시달렸다. 권지하는 언제나 그랬듯이 여유롭게 사인을 해 주었고, 식당 주인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저희가 서비스 많이 드릴게요. 창가 자리로 앉으세요.”

“아닙니다. 서비스는 됐으니 코스 요리로 모든 메뉴 다 내와 주세요.”

“어머. 그래요? 그럼 빨리 준비해드릴게요.”

빈말이 아니었는지 빠르게 요리가 나왔다. 묵사발과 도토리 부침개, 도토리묵이 차례로 서빙되었다.

“먹어 봐요.”

권지하가 도토리묵을 숟가락에 받쳐 다율에게 먹여 주었다. 묵은 탱글탱글하고 양념은 짭조름해 기가 막혔다.

“맛있어요!”

다율은 눈을 빛내며 순식간에 도토리묵 한 접시를 비웠다. 권지하는 다율의 입가를 닦아 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물을 권했다.

“도토리묵 한 접시 더 주세요.”

“한 접시 더요? 배우님 최고. 진짜 감사합니다.”

다율은 오늘도 다정한 권지하 때문에 가슴이 두근댔다. 가슴속에 정해진 수위가 있다면 이제는 애정을 확인받고, 또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아직 다율의 마음속 의혹은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자상하다니, 역시 배우님이 날 좋아하는 건가…?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는 했지만 단순히 다율만의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권지하의 태도가 그 증거였다.

저것 좀 봐. 누가 매니저가 밥 먹는데 눈에서 꿀 떨어지게 쳐다봐? 저거는 백 퍼센트 호감이다. 날 좋아하는 것 같아.

하지만 곧 냉정하고 이성적인 다율이 등장해 단꿈을 꾸는 다율을 두들겨 팼다.

야! 정신 차려. 권지하는 원래 멜로 눈빛 장착으로 유명한 배우야. 오죽하면 지나가는 나무도 꿀 떨어지게 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겠냐?

두 마리의 다율이 내가 맞다 네가 틀리다며 각축전을 벌였다. 사랑에 눈이 먼 다율은 듣기 좋은 소리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냉정한 다율의 조언을 뻥 차 버렸다.

오늘은 오직 좋은 생각만 하고 싶었다. 이곳은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동해, 아름다운 수평선이 펼쳐져 있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낭만의 장소니까.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주로 영화 배역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지하가 <그 여름, 커피>에서 맡게 된 주인공 ‘유주한’ 역은 서울에 살다가 여주인공에게 반해 강원도로 이사 온 바리스타 역이었다.

커피 이야기와 삼각관계 로맨스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데다 유명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투입된 작품이라 충무로에서는 하반기 최대 히트작이 되지 않을까 점치는 영화이기도 했다. 다율은 권지하가 들려주는 주인공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따금 미소 지었다.

한번 배역을 맡으면 진심으로 몰입하시는구나. 너무 멋있어.

“왜 배우님이 인기 많은지 알 것 같아요.”

“잘생겨서?”

“그것도 있지만 역할 하나하나에 진심이시잖아요. 팬미팅 때도 팬들이 배역마다 변신하는 배우님 모습에 열광하시더라고요.”

“아… 다양한 배역마다 능수능란하게 변신하긴 하죠.”

권지하는 자신이 잘난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딱히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다율은 권지하의 그런 점마저 좋았다.

“그런데요 배우님, 팬미팅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때 노래 한 곡 부르셨잖아요.”

“네. 그랬죠.”

“그걸 음원으로 내달라는 요청이 있어요. 팬 카페 건의 게시판이랑 SNS에 자꾸만 글이 올라오네요.”

“아, 그래요?”

“네. 그래서 회사에서도 음원 작업 한번 해 보면 어떻겠냐고 얘기하시던데 배우님 생각은 어떠세요?”

다율의 질문에 권지하는 흠,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엇, 안 내키세요?”

“안 내킨다기보다는… 그 노래는 딱 한 사람만을 위해 부른 거라서요. 좀 망설여지네.”

다율의 심장이 덜컥했다.

설마 그 한 사람이 나는 아니겠지? 나일까? 어쩌면 나일지도?

다율은 마구 앞서 나갔다. 다율의 가슴이 요동치는 가운데, 권지하가 다율의 옆얼굴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팬들이 요청한다면… 좋아요. 한번 해 보죠.”

“정말요?”

“네.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음원 내야죠.”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다음에 서울 가실 때 녹음하는 걸로 스케줄 잡을게요.”

한참을 달려 동해안에 근접하자 휴게소가 나왔다. 두 사람은 차를 멈춰 세웠다.

“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휴게소가 있네요.”

동해의 명물, 바다 전망대 휴게소였다. 다율은 신이 나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우리 휴게소에서 뭣 좀 먹을까요?”

“아까 밥 먹어서 배는 부른데… 호두과자 먹고 싶어요.”

지난번 예능 프로그램을 찍을 때 휴게소에 들러서 호두과자를 먹었었다. 그때 느낀 점은 체인점에서 포장해서 파는 것도 맛있긴 하지만 역시 휴게소에서 바로 구워서 파는 것만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사 줘야겠다. 나 손만 씻고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네!”

권지하가 다율을 놔두고 저 멀리 떨어진 수돗가로 걸어갔다.

와. 이러고 서 있으니까 꼭 애인 기다리는 기분인데?

다율은 둘만의 여행을 온 기분에 점점 들뜨는 마음을 느꼈다. 너무 기쁨이 과한 탓이었을까, 다율은 흥이 나서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발걸음이 점차 경쾌해질 때쯤, 그는 바로 발치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했다.

“으아!”

발끝이 걸리면서 몸이 급하게 앞으로 넘어갔다. 이미 균형감각을 잃은 몸은 바닥으로 넘어질 위기였다.

다율이 거의 넘어지려는 순간, 뒤에서 억센 힘이 그의 허리를 감쌌다.

“어어.”

다율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 한 젊은 남자가 손을 뻗어, 다율이 넘어지지 않게끔 꽉 붙들어 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네. 덕분에 안 넘어졌어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남자가 다율을 똑바로 일으켜 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크고 선량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 닮은 것도 같고… 우리 배우님 백 분의 일만큼 잘생긴 저 얼굴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다율은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분명 낯이 익었다.

그때 남자가 대뜸 물었다.

“저… 혹시 학생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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