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다율은 울적한 상태였다. 엊그제 귀 소동으로 다율은 깊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신은 수인이며, 어떻게 해도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우님은 나에게 평생 같이 있어 달라 하셨지만 그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봐. 난 엄연히 말하자면 신분을 속이고 불법 취업을 한 상태인 걸.
설령 배우님이 내게 호감을 갖고 있는 상태라고 해도 내가 수인인 걸 알면 그 마음이 식을 수도 있어. 언제 붙잡혀 건강원에 끌려갈지 모르는 신세인데, 그런 수인을 사랑해 줄 리 없지.
다율은 열심히 삽질을 했다. 자신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권지하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안 그래도 통통한 볼을 부풀리고 있던 중이었다.
“나 왔는데 알아채지도 못하네.”
권지하가 가까이 다가와 다율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흔들었다.
“아. 배우님. 미팅 끝나셨어요?”
“응.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에요. 얼른 쇼핑하러 갑시다.”
“알겠습니다. 차 준비할게요.”
다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길을 앞장섰다.
오늘은 권지하의 새로운 영화 <그 여름, 커피>의 로케이션 촬영을 준비하는 날이었다. 영화의 대부분을 동해에서 현지 촬영하기 때문에 권지하와 다율은 여름 내내 강원도에 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촬영 기간 동안 필요한 옷가지며 짐을 챙겨야 했고, 권지하는 이 김에 다율에게 여름옷과 캐리어를 새로 사 주겠다며 쇼핑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겨울에 민가로 내려온 탓에 다율은 여름옷이 거의 없었으므로 새로운 옷을 산다는 소식에 굉장히 들떴다. 원래 다람쥐는 저장 본능이 강하고 뭐든지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후드티를 몇 벌 더 살까. 아니면 무더운 여름을 맞이해서 얇고 가벼운 옷을 사 볼까?
다율은 차를 몰고 백화점으로 가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차는 곧 번화가에 위치한 백화점 앞에 멈추어 섰다.
“캐주얼 코너부터 둘러볼까요? 저기 세일 중인가 봐요.”
다율이 백화점 한구석의 매대를 가리켰다. 파격 세일, 완전 정리 등의 문구가 쇼핑객들의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그것도 좋지만 저런 브랜드는 어떨까요.”
“히익! 너무 비싸 보이는데요!”
“다율 씨한테 선물하려면 저 정도는 돼야죠.”
권지하가 가리킨 브랜드는 영국풍의 프레피룩 브랜드로, 사립학교 학생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 세련되고 고급스럽기로 유명했다.
“저 진짜 저기서 골라도 돼요?”
“당연하지.”
권지하가 다율을 매장으로 이끌었다. 그가 들어서자 권지하를 알아본 매장 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권지하 배우님 아니세요?”
“쇼핑 좀 하러 왔어요. 저희 매니저님 옷 좀 사드리려고요.”
“저희 매장을 찾아 주시다니 너무 영광입니다. 이리로 모실게요.”
숍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퍼스널 쇼핑 코너로 안내했다.
“매니저님, 항상 화면으로만 뵀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니까 신기하고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체형도 워낙 좋으시고 늘씬하셔서 저희 옷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어떤 종류로 보여드릴까요?”
“어… 저는 현장에 있다 보니 좀 편안하면서 가벼운 옷이 필요해요.”
다율의 말에 매니저는 티셔츠 종류와 면 반바지를 여러 벌 가지고 왔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의상에 다율의 눈이 커졌다.
“너무 예쁘고 멋있네요.”
“프리미엄 라인이에요. 이런 화이트 톤하고 파스텔 톤이 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어디, 어울리나 볼까요.”
권지하가 옷을 들어 다율의 얼굴 아래에 가져다 댔다. 매니저는 하나하나 다 잘 어울린다고 박수를 쳤다.
“비슷한 것까지 다 챙겨 주세요.”
“배우님, 이걸 다요? 열 벌도 넘는데….”
“그럼요. 다 가져요.”
“감사합니다.”
다율은 해맑게 웃으며 한 아름 쇼핑백을 안아 들었다. 매장을 나가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워 이러다가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다음은 캐리어 보러 갈까요?”
“아. 맞아요. 캐리어 사야 돼요.”
“이번에 큰 걸로 바꿔야 하죠.”
지금까지 쓰던 캐리어는 2박 3일용이라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장기간 로케이션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대형 캐리어가 필수였다.
캐리어를 전시해 놓은 층을 한 바퀴 둘러보던 두 사람의 눈에 한 브랜드가 낙점되었다.
“이 매니저, 저기 노란 캐리어 귀엽지 않아요?”
“어, 그러게요. 엄청 커요. 짐 많이 들어가겠어요.”
다율이 호기심을 보이며 매장으로 들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온갖 물건과 옷, 잡동사니를 다 집어넣어도 될 만큼 캐리어는 크고 튼튼해 보였다.
“여기 제 살림 전체를 다 집어넣어도 되겠어요. 이걸로 할래요.”
다율이 선택을 마치자, 점원이 창고에서 새 것을 가져왔다. 캐리어를 받아 들고 심하게 기뻐하는 다율을 보며 권지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음… 자기 살림이 다 들어갈 것처럼 크다고? 그런 말을 하면서 캐리어를 얼싸안는 걸 보니 좀 불안하네. 저기 짐 싸서 도망갈까 봐 걱정이 돼. 차라리 작은 걸로 사 줄까.
권지하가 다율 앞에서 평생이란 단어를 꺼냈을 때,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와 한순간도 떨어지기 싫었으며 다율이 훌쩍 떠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 심리는 느긋함과 여유가 모토인 권지하의 인생에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다율에게는 좀처럼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지금껏 폭발해 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권지하 안에서는 독점욕과 소유욕, 그리고 속박하고 싶다는 감정이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또한 이 은근한 불안감은 다율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 기반한 것이기도 했다.
맹 실장 말로는 다율은 경력도 미상이고 학력도 딱히 기재한 바가 없다고 했다. 22년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자기 과거사를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권지하 입장에서는 다율을 볼 때마다 호기심이 샘솟고, 또 그를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알아가면서 눈치채지 못하게 칭칭 얽매고 싶은데. 조절하기가 쉽지 않네.
“인내심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네? 뭐라고요, 배우님?”
캐리어 포장을 만지작거리던 다율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 혼잣말이었어요. 우리 이제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좋아요!”
다율은 바리바리 짐을 챙겨 권지하의 뒤를 따랐다. 밝게 웃는 얼굴을 보니 권지하는 밥을 안 먹어도 벌써부터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
다율과 권지하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다율은 권지하가 새로 사 준 옷 중 물세탁이 가능한 것을 추려 세탁기에 돌리고 가볍게 건조했다.
건조가 다 된 다음에는 깨끗하게 다리고 잘 개어서 새 캐리어에 넣는 작업을 했다. 옷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깔끔해서 굉장히 즐거웠다.
다율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신나게 짐을 챙겼다. 오랫동안 머무를 예정이니 개인적인 잡동사니와 세면도구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율은 작은방과 욕실을 부지런히 오가며 짐을 꾸렸다.
구급상자, 선크림, 로션, 그리고 씻을 때 필요한 것들도 다 가져가면 좋겠지.
다율은 욕실에서 새 칫솔과 치약 그리고 미니어처 욕실용품들을 집어 들었다. 그는 혹시나 빠진 것은 없나 가볍게 욕실 안을 둘러보다가 아차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헤어밴드를 가져가야겠구나. 세수할 때도 편리하지만 만약에라도 다시 귀가 튀어나온다면 정말 유용할 거야.
“그런데 어디 갔지…?”
다율은 차근히 기억을 되짚어 봤다. 마지막으로 쓴 것이 지난번 만취 사태 때이니, 작은방에 벗어두었나 보다.
다율은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헤어밴드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있나 싶어 그 위를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로 헤어밴드는 실종이었다. 바닥에도, 침대 아래에도, 하물며 창가에도 헤어밴드는 없었다.
“어…?”
없어질 일이 없는데 왜 없지.
다율은 뺨을 긁적이며 방 안을 몇 바퀴 돌았다. 일단은 나머지 짐을 다 싸고 나중에 헤어밴드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베란다 문을 연 순간, 흡 하며 숨을 들이켰다.
빨래 건조대에 하얀 헤어밴드가 걸려 있었다.
내 거가 왜 여기 있지? 배우님이 여기 갖다 놓으셨나.
다율은 밴드를 집어 들었다. 앞뒤를 살펴보아도 확실히 자기 것이 맞았다.
“흠… 배우님 빨랫감이랑 섞였었나 보다. 잘됐네. 얼른 가방에 넣어놔야지.”
다율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헤어밴드가 세탁되어 있었고, 털 하나 남지 않았음을. 자신이 마지막으로 쓰고 잤다면 몇 가닥이라도 붙어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다율은 헤어밴드를 찾았다는 기쁨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똑똑.
다율은 안방 문을 두드렸다.
“배우님. 짐 다 싸셨어요?”
“아니. 들어와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다율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살짝 물었다. 권지하는 바닥에 캐리어를 펼쳐 놓고 옷장 앞에 서 있었다.
“전 짐이 많지 않아서 괜찮아요. 어차피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 줄 거니까.”
“하긴 그래요. 평상복만 몇 벌 챙기시면 되죠.”
“정 모자라면 본가 다녀와도 되고.”
“본가요?”
“아, 나 집이 동해 쪽이에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다율의 귀가 쫑긋 섰다.
“배우님 본가가 그쪽이었어요?”
“나 강원도 출신이에요. 그것도 완전 산골.”
“아… 전혀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