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39화 (39/95)

39화

“네. 정말 죄송한데 감기 옮길 것 같아요.”

다율이가 갑자기 왜 이러지.

권지하로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안쪽에서 격렬한 기침이 뿜어져 나오자, 안쓰럽고 걱정되는 마음이 크기도 했다.

“난 괜찮은데. 같이 자요.”

“기침이 보통 기침이 아니에요. 백 퍼센트 감기 옮길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고.”

“물주머니 못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오늘은 나 혼자 따뜻하게 자 볼게요.”

“저는 그럼 작은방에서 잘게요.”

“네.”

권지하가 물러가자, 다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아무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놈의 귀. 귀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간절한 마음을 먹어도 인간화가 되지 않았다. 보통 다람쥐로 변했을 때는 잘 집중하면 펑! 하고 인간으로 쉽게 변하는데 오늘은 도저히 실행이 안 됐다.

뭔가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어.

나 이제 어떻게 해?

다율은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으로 귀를 덮어 보려 했다. 당연히 불가능했다. 잔망스럽게도 솟아오른 귀는 너무나도 눈에 잘 띄어, 다율의 속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망한 건가. 내일부터 매니저 자리 잘리고 배우님과도 바이바이…?”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분위기 좋았는데. 배우님이 내게 호감을 가진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사랑을 키워 가기는 개뿔 도망을 쳐야 할 상황이다.

당장 이 욕실 밖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막막한데….

“휴우.”

다율이 크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때 마침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세면대 옆 고리에 걸린 세면용 헤어밴드였다.

폭이 넓적하고 소재가 도톰해 이거라면 귀를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됐다…! 일단 얘를 뒤집어쓰고 나가 보자고.

다율은 찬물에 세수를 한 다음, 헤어밴드를 최대한 넓게 펼쳐 머리에 썼다. 귀가 좀 눌려 아팠지만 그래도 감쪽같이 가려져 다행이었다.

다율은 문을 빼꼼 열고 바깥을 살폈다. 권지하는 안방으로 들어갔는지 거실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다율은 발소리를 죽여 바로 옆에 있는 작은방으로 쏙 들어갔다. 평소답지 않게 문까지 잠근 다음,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일단 오늘은 이걸 쓰고 자야겠다. 그렇지만 내일이 되면… 아침이 밝고 또 배우님을 만나야 하는데 어떡하지.

설마 오늘밤이 이 집에서의 마지막 밤인가. 내일이 되면 수인인 사실을 들키고 소박을 맞는 걸까.

다율은 소리 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기도했다.

제발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귀가 사라져 있게 해 주세요. 앞으로 착한 수인이 되어서 선량하게 살게요. 천지신명님, 달님, 석가모니, 알라신, 예수님 등등 모두에게 빕니다.

귀 좀 없애 주세요…!

급격한 스트레스가 치솟았다. 거기에 취기와 졸음이 버무려져, 다율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발갛게 물든 눈가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려 베개를 살짝 적셨다.

***

짹짹. 째재잭.

오늘따라 박자감 있게 우는 참새 소리가 다율의 귀를 자극했다.

“으음… 시끄러워.”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린 다율은 몸을 돌려 누우며 귀를 막았다. 안방과 달리 작은방에는 암막 커튼이 없었기 때문에 햇빛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밝은 빛과 참새 소리의 합동 공격을 못 이긴 다율은 결국 이불을 젖히고 홱 몸을 일으켰다.

“잠 좀 자자! 나 졸려, 참새들아!”

다율은 혀가 다 풀린 발음으로 웅얼댔다. 하지만 참새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드높아질 뿐이라, 다율은 다시금 귀를 틀어막았다. 인간 귀 쪽이었다. 그러자 소리가 안 들렸다.

어라…? 나 여기만 막았는데 소리 안 들리네?

다율의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 어젯밤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별안간 귀가 솟아나와 크게 당황했고 그 모습을 들킬 수 없기에 권지하와 따로 잤다. 헤어밴드를 눌러쓰고 동물 귀를 감추며 내일은 귀가 사라지게 해 달라고 빌었다.

혹시 귀가 사라졌나?

다율은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안고 헤어밴드를 만지작댔다. 겉으로 볼록 솟아나온 부분이 없었다…!

“헉.”

그는 벌떡 일어나 작은방 화장대에 놓인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다음 헤어밴드를 벗었다.

귀… 없다!

평소의 다율처럼 다소 부스스한 머리카락만이 보일 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율은 감격에 눈물이 차올랐다.

누군진 몰라도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너무 기뻐, 어떡해.

매니저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율은 진심으로 감동받았다. 수인임을 들켜 집 밖으로 쫓겨날 일도 없었고, 권지하의 곁을 떠날 일도 없다.

“흑… 흑.”

다율은 아예 울기 시작했다. 서러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울음소리가 제법 커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매니저. 안에 있어요?”

“배, 배우님…!”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맞나요?”

“아니에요. 아니, 그게… 기침이 너무 세가지고요. 서러워서 조금 울었어요.”

“그 정도라고? 얼굴 좀 봐요.”

다율은 잠시 망설여졌지만, 지금은 귀가 없는 당당한 상태. 문을 못 열 이유가 없었다.

흠흠. 다율은 목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기침 아직도 해요?”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요.”

“다행이다.”

권지하가 다율의 이마를 짚었다. 그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다율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편안함과 포근함도 느껴졌다.

너무 다행이야. 귀가 사라져서… 배우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평소에 몸이 뜨거워서 열이 나는지 안 나는지 잘 모르겠네요.”

“열 안 나요. 그나저나 배우님은 어제 안 춥게 잤어요?”

“아… 그게.”

권지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추웠어요.”

“이런! 정말 죄송해요.”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잤는데도 역시 우리 매니저님 체온만은 못하더라고.”

“진짜 죄송합니다. 어떡해… 손 차가운 것 좀 봐.”

다율이 권지하의 손을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권지하는 조금 전까지 차가운 커피잔을 쥐고 있다가 와서 손이 냉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다율의 손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나 너무 추운데, 우리 방에 가서 잠깐 껴안고 있을래요? 이제 기침 안 심하다며.”

“아… 그래요. 그래도 될 것 같아요.”

다율은 어서 권지하의 몸을 데워 주고 싶었다. 그는 순순히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권지하 역시 다율을 뒤따라 안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이질적인 물건이 하나 있었다.

“이게 왜 방에 있지?”

새하얀 헤어밴드가 화장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가끔가다 다율이 세면을 할 때 쓰는 물건으로, 다율의 성격상 방에 들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늘 욕실에 걸어두고 사용 후에는 철저하게 세탁을 하는 편이었는데, 이게 왜 여기 있는지 권지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간밤에 썼나.”

권지하가 헤어밴드를 집어 올렸다. 그런데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어…?”

밴드 안쪽에 털이 몇 가닥 붙어 있었다. 권지하가 손가락으로 털 한 가닥을 뽑았다.

가만 보니 털은 예사 색깔이 아니었다. 강아지로 따지면 골든 레트리버 색에 가까웠으나 개털치고는 길이가 짧았고, 치즈색 고양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색이 너무 밝았다.

노란색도 아니고 갈색도 아닌 황금빛. 이건 흔하게 볼 수 있는 색깔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알 수 없는 동물의 털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 집 안에는 인형이 없으니까.

“이게 무슨….”

권지하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집 안에 있을 수가 없는 존재가 어째서 이런 곳에, 그것도 다율의 헤어밴드에 붙어 있단 말인가.

누가 보면 꼭 동물 몸에 대고 쓱 비빈 것처럼.

“잠깐. 동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존재가 딱 하나 있었다. 이런 색깔을 지닌 동물을 한 번 본 적 있었다. 바로 피크닉을 갔을 때 목격한, 다율을 쏙 빼닮았던 밝은 색깔의 다람쥐.

하지만 그 다람쥐는 지나가는 다람쥐 아니었나?

“핸드폰에 사진이 있었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다율과 너무나 닮은 점이 신기해 사진을 찍었었다. 권지하는 핸드폰을 꺼내 그날의 사진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다소 놀란 표정의 다람쥐의 털색은 지금 권지하가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동일했다.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똑같다고 볼 수 있었다.

꼭 이 다람쥐가 이 헤어밴드에 몸을 비빈 것 같잖아. 이상해.

권지하는 아래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배우님, 안 오세요?”

방 바깥에서 다율이 권지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권지하는 헤어밴드를 움켜쥐며 자연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어. 가요.”

그러고는 평소 잘 쓰지 않는 서랍장에 헤어밴드를 살짝 넣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

이튿날 오전. 다율은 소속사 건물에 딸린 직원 전용 카페에 앉아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었다.

지식 사이트를 뒤져 보니 수인이 반인반수가 되는 조건은 의식이 급격하게 혼탁해졌을 때라고 한다. 그게 어떤 상황인지 몰랐는데 이제 깨달았다. 예전에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봐서, 급하게 취한 게 문제였다. 폭탄주나 술 섞어 마시기는 무조건 금지다. 내가 다시 술을 섞어 마시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짐승.

다율은 다소 모순되는 말을 되뇌며 자기 이마를 때렸다. 한숨이 나오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네 주제를 알아라… 누가 한 말인지는 까먹었지만 참 명언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