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앗. 이건 또 뭐지?
다율은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권지하의 손길은 느릿했지만 향하는 곳이 확실했다. 바로 다율의 입술이었다.
뭐, 뭐야. 내 입술 만지는 거야?
서늘한 손가락 끝이 말랑한 입술을 꾹 눌렀다. 다율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너무 당황해서 반항은커녕 꿈틀대기도 힘들었다.
“…입술이 예쁘네.”
“배, 배우님.”
“촉촉하고.”
“저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만지고 싶으니까.”
“예?!”
다율은 펄쩍 뛰며 기함했다. 내 입술을 만지고 싶다는 건 어떤 의미지?
짧은 시간 다율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호감의 표시였다.
다음 순간, 다율의 입술이 권지하의 손가락에 의해 짓눌렸다. 다율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눈앞에는 권지하의 아름다운 속눈썹이 펼쳐져 있었고, 그의 손가락에서는 단맛이 느껴졌다.
“아….”
다율이 넋을 놓자,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환상적인 얼굴에 다율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금 다가오는 권지하의 입술에 눈을 감을 뿐이었다.
키스다. 이건 키스 확률 백 퍼센트야.
다율은 권지하의 셔츠 자락을 꼭 쥐고 긴 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비로소 입술이 가까워지려 했을 때, 권지하가 손을 내밀어 다율의 뺨을 감싸 쥐었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가까이에서 본 권지하는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다율은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술은 다 깼지만, 발밑에 구름이 깔린 듯 몽환적이었다.
그때였다.
“권 배우님! 어디 계십니까.”
난데없이 큰 목소리가 났다. 다율은 몸을 움츠리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죄송합니다.”
낯선 사람이 수풀을 헤치고 등장했다. 다율은 퍼뜩 놀라며 권지하의 가슴을 팍 밀었다.
“누구시죠.”
권지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함께 냉기가 어려 있었다. 제 매니저와의 오붓한 분위기를 해친 자가 대체 어떤 인물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검은 티를 입은 남자는 덩치가 왜소하면서도 양아치 같은 인상을 지닌 자였는데, 귀와 코에 피어싱을 줄줄이 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 저는 오늘 스태프인데요, 실장님이 두 분 모셔 오라고 하셔가지고요.”
별로 주눅 드는 성격은 아닌지 스태프는 곧장 제 할 말을 했다. 권지하는 다율과 눈을 마주쳤다. 다율은 어서 가야지 않겠냐는 얼굴이었다.
쯧.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알겠습니다.”
권지하가 일어나며 다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죠. 이 매니저.”
“네.”
평소와 똑같이 손을 잡았는데, 다율은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까 자신을 바라보고 입술을 매만졌던 권지하 때문이었다.
이상해.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
한번 싹튼 의심은 옷감에 든 풀물처럼 지워지지 않고 여운을 남겼다. 다율은 술자리에 앉아 있는 내내 팬미팅에서 권지하가 한 발언, 그리고 정원에서 그가 내뱉은 말들을 곱씹었다.
설마 진짜로 나한테 호감이 있을까? 무려 천하의 권지하 배우님이 나한테?
아닐 거야. 나중에 실망하지 않도록 헛바람 들지 말자 하면서도 다율은 골똘하게 그 주제에 잠겨들었다.
2차 자리에서 권지하는 다율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다율에게 날아오는 술잔을 다 쳐내 주었다. 그럴 때마다 다율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남들은 그가 술에 취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들뜬 마음에 그랬다.
한참 동안 이어진 2차 자리에서 빠져나가자고 제안한 것은 권지하였다.
“벌써 가자고요? 많이 취하셨어요?”
“아니. 집에 가서 다율 씨랑 같이 있고 싶어서요.”
어떡해. 같이 있재!
다율은 ‘이 술자리 제가 쏩니다.’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신이 났다.
“죄송한데 저희 먼저 갈게요! 많이들 드시고 재미있게 노세요!”
다율이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는 다율에게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권지하의 손목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가요. 배우님.”
다율과 권지하는 술집을 빠져나와 대리 운전을 불렀다. 토요일 밤이라 차가 좀 막혔는데 다율은 상당히 애가 탔다. 얼른 집에 가서 아까 미처 못다 한 분위기를 잡고 싶었다.
“기사님. 빨리 가 주세요.”
다율은 유례없는 재촉까지 해 가며 집에 가고 싶은 티를 냈다. 몽롱한 정신에 들뜸까지 합쳐지자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집에 들어온 다율은 과감하게 3차를 제안했다.
“배우님. 이대로 자긴 아쉬운데 우리끼리 3차 해요.”
“뒤풀이요? 좋죠.”
권지하도 다율과 단둘이서 팬미팅의 회포를 풀고 싶었던 차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냉장고와 와인셀러를 뒤졌다. 다율이 좋아하는 제주산 땅콩막걸리와 권지하가 좋아하는 레드와인, 화이트와인이 나왔다.
안주로는 땅콩오징어에 아몬드와 살구가 콕콕 박힌 치즈를 준비했다. 테이블에 음식과 술을 펼쳐 놓고 두 사람은 소파에 기대앉았다. 평소보다 몸이 더 바짝 붙은 것만 같아 다율은 조금 긴장이 됐다.
어떡하지. 대놓고 물어보긴 좀 그렇고, 살살 돌려서 나한테 호감이 있는지 알아볼까?
아냐. 아직은 시기상조다. 지금 나는 취해서 제대로 된 판단도 하기 힘들뿐더러 용기도 없어. 만약 배우님이 헛꿈 깨라고 일침이라도 놓으면 충격받아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다율은 권지하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다율 안에 존재하는 이성이 다율을 뜯어말렸다.
혼자서 오만 가지 갈등을 겪는 와중에 권지하가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다율은 와인도 마셔 보겠다며 와인잔을 내밀었다.
“술 섞어 마시면 머리 아플 텐데. 괜찮아요?”
“이미 맥주랑 소주 마셔서 각오하고 있어요. 그래도 배우님하고 꼭 단둘이 한잔하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럼 내가 숙취해소제도 챙겨 줄게요. 아침에 북엇국도 끓여 주고.”
“고맙습니다, 배우님.”
늘 다정한 권지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그윽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니 다율로서는 술이 술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다음 팬미팅 때도 사회 봐 줄 거죠?”
“제가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난 이제 우리 매니저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아.”
“와아…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율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물론 잘나고 능력 좋은 권지하니 자신 없이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말은 빈말임이 뻔했다. 그래도 매니저로서, 또 권지하를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듣기에는 참 달콤했다.
술이 아니라 배우님한테 취하는 기분이네. 아, 좋다. 알딸딸하고 시원하고… 점점 취한다.
“딸꾹.”
“이런. 딸꾹질을 하네. 물 가져다줄게요.”
“감사해요.”
권지하가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와중에 다율은 슬슬 눈이 감겨 왔다. 새벽부터 무리해서 움직인 데다가 긴장이 풀렸고, 또 저녁에 과음한 탓이었다.
“하암. 졸려.”
다율은 버릇처럼 머리통을 긁었다. 그런데 머리가 좀 간지러웠다.
“음… 간지럽네?”
다율은 손가락을 세워 다시 한번 머리를 긁었다. 그러다가 돌처럼 굳었다. 일반적인 머리통이어야 할 부분에 보드랍고 통통한 것이 만져졌다. 꼭 동물의 귀 같은 감촉이었다.
서… 설마, 안 돼.
다율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황금다람쥐 수인들은 제한된 상황에서는 반인반수, 즉 몸은 인간이되 귀와 꼬리만 툭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뿐더러 다율은 반인반수 상황을 겪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패닉에 빠져 허둥댔다.
“찬물에 얼음 띄워 줄까요?”
주방 쪽에서 권지하가 뒤돌아서며 물었다. 다율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어 귀 자리를 가리고 외쳤다.
“아, 아니요.”
“그럼 미지근한 물로 줄까요?”
“그것도 아, 아니요!”
“…그럼 어떻게 줘요? 적당히 차가운 물?”
“적당히 차가운 것도 싫어요!”
다율은 누가 봐도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발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나다가 자빠질 뻔했다. 우당탕.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접시가 흔들리고 하마터면 잔이 깨질 뻔했다.
“이 매니저, 무슨 일 있어요?”
권지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율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망가는 일뿐이었다.
“아, 아니에요! 저 화장실 좀요!”
대각선 방향에 복도 화장실이 있었다. 다율은 여전히 귀를 감싼 채 미친 듯이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그는 문을 쾅, 닫고 숨을 헐떡거리며 거울을 확인했다.
머리에 뿅, 솟아 있는 것은 분명한 다람쥐 귀였다.
“마… 말도 안 돼.”
다율은 어지럽고 아찔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벌어질 수가 있지? 나 오늘 재채기도 안 했고 방금 전까지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다율은 귀 근처의 머리를 잡아 뜯으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곧 똑똑, 화장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율은 퍼뜩 놀라 문을 쳐다봤다.
“이 매니저. 괜찮아요?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죠?”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다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찰나의 시간 동안 무수한 변명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당장의 살 길은 연기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쿠, 쿨럭…! 쿨럭! 껙!”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그래요.”
“저 기침이 너무 심해요! 감기 걸렸나 봐요.”
서당 개 3년이면 글월을 읽을 줄 안다고 했던가. 다율 역시 명배우를 따라다니며 촬영 현장을 누빈 지 6개월이 넘었다. 이 정도 감기 연기는 어설프게나마 흉내 낼 수 있었다. 물론 아주 매끄럽지는 않았으므로, 문 바깥에 있는 권지하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진짜 감기 걸린 거 맞아요? 기침 소리가 좀 어색한데.”
“저, 정말이에요. 쿨럭, 쿨럭! 아, 미치겠다! 쿨럭. 나 죽네!”
“어떡하죠. 문 좀 열어 봐요. 내가 약 줄게.”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찾아 먹을게요. 그리고 우리 오늘 따로 자요.”
“따로 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