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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37화 (37/95)

37화

어느덧 팬미팅이 막바지로 치달았다. 다율이 일어나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다율이 팬미팅 종료를 알리는 멘트를 하자 관객들은 아쉬움에 탄성을 내뱉었다.

“오늘 팬미팅에 찾아와 주신 관객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권지하는 무대 끝에서 끝까지 걸으며 손을 흔들었다. 팬들은 열광했고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팬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었다.

장내의 불이 꺼지고 권지하가 퇴장했다. 하지만 아직 팬미팅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팬들이 준비한 이벤트가 남아있었다.

팬들이 주섬주섬 종이 슬로건을 꺼내 들었다. ‘지: 지금 이 순간은 하: 하늘이 준 선물.’

이 슬로건 문구는 다율이 고안한 것이었다. 권지하와 차마 영원을 꿈꾸지는 못하지만, 다율은 그래도 한순간 한순간은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담아 문구를 작성했다.

언제까지 배우님 곁에 있을지. 언제 배우님 곁을 떠나 독립하게 될지. 그 전에 그가 먼저 가정을 꾸리진 않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다율은 권지하를 깊게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율이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선물 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권지하! 권지하!”

팬들이 열정적으로 이름을 외치자, 권지하가 다시 등장했다. 권지하는 팬들이 들고 있는 슬로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저도 지금 이 순간을 잘 간직할게요.”

팬들이 울먹이며 함성을 질렀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다율도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말했다.

저도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거예요.

***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매니저님, 고생하셨어요. 오늘 돌발 상황이 많았는데도 침착하게 대응하시더라고요.”

“등에는 땀이 흥건했는걸요.”

공연이 끝나고 돌아간 백스테이지에서 연출 스태프가 다율을 칭찬해 주었다.

다율은 서둘러 권지하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축하 인사와 격려를 받고 있었다.

“배우님, 오늘 최고였어요. 너무 멋있었습니다.”

“이게 다 이 매니저 덕분이죠. 매니저님도 잘했어요.”

드디어 끝났구나. 다율은 상쾌하면서도 동시에 약간 허탈했다. 아주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다정하게 눈을 바라봐 주는 권지하가 옆에 있는 한, 또다시 이런 좋은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 좋은 여운이 남았다.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다율은 끝없이 팬미팅 이야기를 했다. 배우님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아느냐, 포스트잇 사건은 아찔했다, 부모님 영상 편집이 잘못된 건 죄송하다. 십년감수했다.

쉴 새 없이 종알종알 떠드는 다율이 보기 좋아 권지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슬쩍 말을 꺼냈다.

“이 매니저 덕분에 무사히 끝났으니까 선물 하나 하고 싶은데, 어때요?”

“예? 선물이라니요. 저한테는….”

배우님 자체가 스페셜 기프트인데, 새삼 무슨 선물이에요.

다율은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고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배우님 매니저로서 당연히 해야 할 몫을 한 것뿐인데요.”

“그래도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권지하의 속내는 다율에게 반지라도 끼워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팔찌도 나쁘지 않다. 그저 다율을 구속해 놓고픈 기분이 들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꽁꽁 묶어 집에만 있게 하고 하루 종일 밖에 못 나가게 하고 싶지만, 수갑이나 족쇄를 채우면 다율이 무서워할 것이다.

그러니 자그마한 반지를 저 하얀 손에 끼워 주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권지하는 은근하게 숨겨 왔던 마음을 드러낼 계획이었다. 아까 무대에서 여러 번 돌려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눈빛을 보냈지만, 다율은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했다. 그 모습에 살짝 화가 난 것도 있었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새에 옭아매려 했는데 먹잇감이 너무 눈치가 없어. 자신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으니 이제는 경고를 할 때다. 내가 널 먹어 치울 거라고.

권지하는 시커먼 속내를 뱃속에 품고서 천사처럼 웃었다. 다율은 백미러로 힐끔힐끔 권지하를 살피면서 생각에 잠겼다.

혹시 오늘 뒤풀이에서 술이라도 한잔한다면 진솔한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대체 배우님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

자칫하다가 다율의 마음을 들킬 위험도 있었다.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은근하게 연애 이야기를 해 보자. 따로 좋아하는 분이 있는데 내가 고백하는 투로 이야기하면 곤란하니까, 절대 그러지는 말고 뱅뱅 돌려서.

시그널을 주려는 권지하는 기대감을 품었고, 그의 속내를 알아보려는 다율은 긴장했다. 각기 다른 생각을 품은 두 사람을 실은 차는 곧 강남의 한 식당 앞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연출 감독, 스태프들, 그리고 기획사 사람들이 권지하의 입장에 박수를 쳤다.

“수고 많으셨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코스로 된 한정식과 화로구이가 등장하며 회식이 시작되었다.

맹 실장은 허허 웃으며 권지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기획사의 보물이지. 권 배우, 최고야.”

오늘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을 뿐 아니라 팬미팅 굿즈도 기대 이상으로 팔렸기 때문에 그는 굉장히 기분 좋은 상태였다. 그는 권지하에게 여러 차례 술을 권했다.

다율 역시 국어책 읽기를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MC 데뷔를 했기에 소속사 사람들은 그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술잔이 날아왔고, 들뜬 다율은 술을 조금씩 받아먹었다.

술이 그렇게 세지는 않은 다율이었기 때문에 나름 자제하며 마셨지만, 피곤이 쌓인 몸에 알코올이 돌자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취기가 돌았다.

권지하는 맞은편에 앉은 다율의 상태를 살피다가 테이블 아래로 슬쩍 다율의 무릎을 만졌다.

“앗. 간지러워.”

다율은 눈을 찡그리며 졸음에서 깨어났다.

“일어났으면 바깥에 산책하러 가요.”

“아… 그럴까요?”

“이 매니저 술 깨려면 바깥바람 좀 쐬어야 할 것 같아서.”

다율은 비척비척 일어나 권지하의 부축을 받아 식당에 딸린 커다란 정원으로 나왔다. 밤이라 낮과 달리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들이 부대끼며 청량한 소리를 만들어 냈고 달은 밝았다.

“여름밤… 좋네요.”

“나도.”

정원이 상당히 넓고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서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다율은 비틀거리면서 권지하와 나란히 걸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두 사람의 손등이 아주 살짝씩 맞부딪쳤다.

자꾸 손이 닿네. 간질간질해.

다율은 권지하와 스치는 부위들이 신경 쓰였다. 또한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향수 냄새도, 큰 키 때문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도 다 의식됐다.

“흠흠.”

이렇게 어색할 수가.

다율은 취한 정신이라 더욱 몽롱했고, 권지하에게 가는 시선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런 다율의 시선을 감지한 권지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다리를 휘청였다.

“아, 나 취했나 봐요. 이 매니저. 우리 앉았다 가요.”

“배우님. 취하셨어요? 물 좀 가져다드릴까요?”

다율이 깜짝 놀라며 권지하의 팔꿈치를 붙잡고 그를 부축했다. 평소 술에 강한 권지하라는 것을 알기에 그가 취했다니 걱정이 됐다.

“아뇨. 이대로 좀 앉고 싶어요. 그러면 진정될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럼 저기 벤치에서 좀 쉬어요.”

마침 눈앞에 나무 벤치가 하나 보였다. 다율은 권지하의 팔을 잡고 그를 벤치로 이끌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어깨에 슬쩍 몸을 기댔다. 물론 키 차이가 나기 때문에 권지하가 몸을 숙여야 했다.

거의 껴안다시피 하는 자세가 되자 다율은 헉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 와중에도 권지하가 불편할까 봐 다율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권지하를 이끌었다.

“앉으세요.”

“고마워요.”

벤치에 나란히 앉은 다음, 다율은 권지하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았고 술 냄새도 안 났다. 전혀 취해 보이지 않는 모습에 다율은 고개를 갸웃했다.

“배우님, 정말로 취한 거 맞으세요?”

“음….”

“일단 벤치에 등 기대세요.”

다율은 권지하의 몸을 벤치에 기대게끔 만들었다. 그때, 권지하가 몸을 똑바로 세웠다.

“나 안 취했어요.”

“네? 방금은 취했다면서요.”

“거짓말이었어요.”

“아니… 왜 그런 거짓말을 하세요?”

“너랑 나란히 앉고 싶어서.”

“뭐라고요?”

다율은 황당함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권지하가 다율의 목 뒤를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다율은 권지하의 체취 하나하나를 깊이 들이마실 수 있었으며, 그의 품에 더욱 밀착할 수 있었다.

믿기지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다율은 심장마비 직전이었다. 자신이 권지하에게 안겨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니. 이게 꿈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꿈이란 말인가.

“다율아.”

“…배, 배우님.”

“다율이는 어디 안 갈 거지?”

권지하가 다율의 등을 쓸며 물었다. 정확히는 의문이나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다율 역시 그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의 압박을 느낀 다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권지하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다율은 이제 정신이 말짱해졌다. 다율의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엉뚱한 생각이어서 처음 떠올렸을 때는 자신도 믿기지 않았지만, 잠시 권지하의 품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자니 그 생각은 점점 뚜렷한 실체를 갖추었다.

…배우님이 좋아하는 사람, 설마 나일까?

팬미팅 리허설 때 자신을 보고 노래를 부르던 권지하, 팬미팅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자신을 빤히 보던 권지하, 지금 이 순간, 날 떠나지 않을 거냐고 묻는 다정한 권지하의 목소리와 손길.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지하와 몇 개월을 함께 보내는 동안 그 존재도 짐작하지 못했던 ‘좋아하는 사람’. 설마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걸까? 아냐, 말도 안 되는 망상이야. 괜히 헛다리 짚었다가 크게 상처받으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잠깐만,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 보자. 다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권지하의 손이 다율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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