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어라? 한 번도 안 부어 먹던데.
다율이 의아해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권지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부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최근에 바뀌었어요. 언제 한번 같이 먹는 사람이 찍어 먹기를 좋아하길래 소스를 붓지 않았더니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렸네요.”
배려로 시작해 습관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같이 먹는 사람이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날 위해 배우님이 변화했다는 이야긴 아닐 거야. 일반론적인 이야기겠지.
…아니다. 그거 나 맞아.
다율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다율은 권지하와 거의 모든 식사 자리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로 밥을 먹은 날에도 매니저로서 권지하가 들렀던 식당과 먹은 메뉴를 체크했다.
분명, 탕수육을 먹은 날은 항상 다율과 함께였다.
그렇다면 설마 배우님이 나를 배려해서 취향을 양보했다는 소리일까? 고집 세고 취향 확실한 저 남자가?
다율의 가슴에 자그마한 의심이 싹텄다. 가슴이 뛰고, 맥박이 빨라졌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는 무관하게 인이어와 프롬프터에서 서둘러 다음 질문을 진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율은 정신을 수습하고 진행을 계속했다.
“두 번째 포스트잇 읽어 주세요.”
“오, 이번에는 좀 진지하네요.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건 다율도 궁금한 질문이었다. 데뷔 이래 꽤 많은 작품에 출연한 권지하였고, 또 유수의 상을 휩쓸 만큼 작품성과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런 그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작품은 무엇일까.
관객들과 다율이 집중한 가운데, 권지하가 몸을 살짝 틀어 다율 쪽을 봤다.
“저는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시티 오브 나이트가 기억에 남습니다.”
“엇. 가장 최근에 찍었기 때문인가요?”
다율의 질문에 권지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추억이 많아서예요.”
“추억이요?”
“네. 촬영 내내 즐거웠습니다.”
으음. 무슨 추억을 말씀하시는 걸까. 이것도 설마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
방금 전 이야기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엮으려면 충분히 자신과 엮을 수 있는 이야기였기에 다율은 신경이 쓰였다.
어쨌거나 내가 매니저로 활동한 시기의 작품을 기억에 남는다고 해 주셔서 너무 기쁘네.
다율이 싱긋 웃었다. 권지하도 그와 눈을 마주치며 따라 웃었다.
“세 번째 질문 대답해 주세요. 포스트잇에 뭐라고 쓰여 있나요?”
“어….”
권지하가 조금 망설였다. 그답지 않은 모습에 다율이 다시 질문했다.
“배우님. 어떤 질문인가요?”
“음. 좋아하는 분이 있냐는 질문이네요.”
그의 말이 끝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팬들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소곤거리면서 서로 눈치를 봤다. 다율 역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숨이 막힐 만큼 긴장했다.
사실 지난번 스캔들 때, 권지하가 ‘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이후로 팬덤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대두되었다.
첫 번째는 권지하 말을 그대로 해석해서 스캔들 당사자인 윤혜미가 아니라 진짜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의견이었고 두 번째는 조금 달랐다.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없는데 사태를 얼버무리려고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팬들은 대부분 후자의 의견을 지지했다. 우리 배우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어, 하는 막무가내 의견이 아니었다.
권지하에게서 그 어떤 열애의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커플 액세서리로 추정되는 반지나 목걸이 따위는 전혀 없으며, 개인 SNS도 하지 않는다. 그 흔한 파파라치 샷이나 증권가 뜬소문도 돌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매니저랑 동거 중이라는 사실. 이것이 팬덤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여자친구가 있으면 남들 시선을 피해 집에 데려오기 마련인데, 남자 매니저가 떡하니 숙소에 버티고 있으니 데려올 수도 없다. 그리고 데려오는 장면을 본 팬도 행인도 기자도 없다. 이 정도면 완벽한 솔로가 아닌가.
팬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권지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편 다율은 아차 싶었다. 이런 유의 질문은 대답에 따라 오해를 빚거나 꼬투리를 잡힐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걸러냈어야 했다.
심지어 다율은 권지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초조했다. 권지하가 폭탄 발언이라도 한다면 오늘 저녁 연예계 뉴스난은 권지하로 도배가 될 것이다. 팬들은 큰 충격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게 설령 누구라 한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발언 자체로 큰 문제가 된다. 일단 부정하자. 배우님. 아니라고 해요…!
다율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나름대로 눈가를 씰룩거리며 권지하에게 눈치를 줘 봤지만, 권지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상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는 여러분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어머. 무슨 일이야.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야?
장내가 술렁거렸다. 다율도 헉 하며 숨을 멈췄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분은요.”
권지하의 시선이 다율의 얼굴을 향했다. 다율은 아주 조그마하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안 돼요.’
그러자 권지하가 피식 웃었다.
뭐지? 어떻게 대답하려고?!
다율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여기 있어요.”
관객석에서 의문을 담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 뭐냐, 누구냐. 오빠 장난이에요? 제대로 답해 주세요. 너무도 난리가 나서 경호팀이 출동해 흥분한 관객들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다율은 자신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권지하에게 다가갔다.
“하하. 제가 한번 해석해 볼게요. 좋아하는 사람이란 건 바로 천상천하 권지하 여러분을 뜻하는 거죠?”
다율이 권지하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요!
다율은 속마음으로 외치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권지하가 소리 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하하. 여러분, 잘 들으셨죠? 권지하 배우님의 애인은 바로 여러분!”
“꺄아아!”
지붕이 터져 나갈 듯 커다란 함성이 쏟아졌다.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구나. 다율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스스로를 기특해했다.
이후로는 모든 진행이 순조로웠다. 권지하가 감미로운 노래를 부를 때 팬들은 크게 기뻐했으며, 어떤 팬들은 감동을 받아 울었다.
다율은 권지하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준비했다는 것을 알기에 기분이 묘했다. 리허설 때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노래하던 권지하가 떠올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인이어로 지시가 내려왔다. 다음 코너를 진행할 차례였다.
“그럼 다음은 권지하 배우님의 어린 시절 사진 공개입니다.”
권지하는 베일에 싸인 배우라는 별명만큼 과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서울이 아닌 지방 출신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었으며, 딱히 동창이라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흔한 졸업앨범 인증도 없었는데 무려 어린 시절 사진 공개라니. 팬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스크린을 주목했다.
“최초 공개네요. 배우님 갓난아기 때라고 해요.”
화면에 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사진이 떴다. 신생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 역시 살아 있었다.
뭐 이렇게 잘생긴 아기가 다 있어? 관객들이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다율 역시 감탄하며 사진을 봤다.
너무 귀엽고 잘생겼다. 나도 저런 아기다람쥐 한 마리 낳고 싶다. 아니, 저렇게 똑 닮은 모습 말고 배우님과 나를 반반씩 섞으면 어떨까?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싸늘하고 뚜렷하게 잘생긴 이미지 절반에 순둥하고 똘망한 이미지 절반을 섞은 아기 수인이 그려졌다.
잠깐. 낳긴 뭘 낳아. 내 남자도 아니구만.
다율은 다시 정신 줄을 붙잡았다. 하지만 다섯 살, 일곱 살, 그리고 열 살. 미치도록 잘생기고 귀공자 같은 권지하의 모습이 스크린을 수놓을 때마다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MC님. 멍하니 있지 말고 다음 순서 넘어가 주셔야죠.
인이어에서 재촉이 들어왔다. 다율은 식겁하며 MC 카드를 넘겼다. 이번 또한 대망의 순서였다. 깜짝 VCR을 공개할 타이밍이었다.
-지하야. 엄마, 아빠야.
갑자기 스크린에 미중년 부부가 뜨자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관객들은 권지하의 부모님이 최초로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한 번, 권지하의 아버지가 아들과 너무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에 두 번 충격을 받았다.
“너무 똑같아.”
“배우님 미래의 모습이 보인다.”
“인생 스포일러 수준인데?”
관객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아버지의 잘생김을 감상하던 때였다.
-이눔 자식, 얼른 딴따라 때려치우고 대나 이어라. 애나 두엇 낳아!
버럭 화를 내는 음성에 삿대질까지. 권지하의 아버지가 카메라에 대고 소리를 지르자 관객들은 입을 쩍 벌렸다.
헉. 저거 편집 전 버전이잖아! 중간에 파일이 뒤바뀌어 상영되었구나. 어떡해.
다율은 눈앞이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휘청이는 다율을 권지하가 탄탄한 손길로 받쳐 주었다. 그리고 난리가 난 관객석에 아름다운 웃음을 보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아버지 의견일 뿐입니다. 하하.”
중요한 건 다율이 의견이지. 애를 몇 낳을지는 아직 안 정했다고.
권지하는 자기 딴에 솔직한 대답을 하며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