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34화 (34/95)

34화

“어떡하면 좋을까요, 배우님.”

“그럴 때는요. 저랑 딱 둘이만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권지하가 다율의 가슴에 붙어 있는 손을 떼 주며, 대신 자기 손을 갖다 댔다. 음험함 50%에 진지함 50%를 섞은 손길이었다. 권지하의 손끝으로 콩, 콩 뛰고 있는 다율의 심장 소리가 잘 느껴졌다. 늘 권지하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다율임을 알기에 고맙기도 했다.

“배우님이랑 둘만 있다고 생각하라고요?”

“응. 여기 수천 명이 들어와 우리를 지켜본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그냥 나랑 편하게 대화한다고 상상하면서 진행해 봐요.”

“후우… 알겠습니다.”

다율은 심기일전하며 리허설에 나섰다. 물론 중간중간 삑사리가 났고, 로봇에 가까운 고저 없는 말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연출 감독이 컷을 외치기도 했다. 그래도 권지하가 잘한다, 너무 멋지다, 전문 MC 같다는 소리를 계속 해 주었기에 다율은 힘이 났다.

선임 매니저 백장훈도 다율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처음에 비하면 진짜 좋아졌네. 이 매니저, 내가 본 팬미팅 진행자 중에 최고로 잘하는 것 같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물론 권지하가 뒤에서 백장훈을 압박해 억지 칭찬을 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배경을 꿈에도 모르는 다율은 정말로 자신이 잘하는 줄로 알고 의욕을 뽐냈다.

리허설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다율의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거실 한가운데 서서 그는 대본을 외우고, 멘트를 쳐 보고, 간단한 제스처까지 선보이기를 반복했다. 그야말로 열혈 MC였다.

한바탕 연습을 한 다음에는 팬 카페와 커뮤니티를 꼼꼼하게 살폈다. 다율은 아예 소파 앞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앉아 본격적으로 사이트들을 뒤지고 다녔다.

[잡담] 굿즈 사러 지금 출발한다 새벽부터 줄 서 보려고

ㄴ밤 꼴딱 새우겠네 ㅉㅉ 힘내라

ㄴ한정 수량 포카는 새벽에 안 가면 못 구할 거 같기는 해

“아니, 지금이 밤 12시인데 벌써 출발을 한다고…? 공연은 내일 오후 5시인데?”

업체와 소속사의 사인이 엇갈려 온라인 판매가 불발된 포토카드가 있었다. 지금 게시판 사람들은 그 한정판 포토카드를 오프라인에서 빠르게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겠다는 소리였다. 권지하 팬덤은 배우 팬덤 중에서도 유난히 화력이 좋고 열혈팬이 많기로 유명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다율은 다소 놀랐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와 태국어, 아랍어 등으로 쓰인 글들이 게시판을 뒤덮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가 번역기를 돌려 보니 죄다 [오빠, 우리나라에도 와서 팬미팅 해 줘라]였다. 언어는 달라도 뜻은 하나였던 것이다.

“이거 해외 팬미팅 안 하면 큰일 나겠는데….”

한국 팬들은 흥분과 기대에 가득 찬 문구로 게시판을 달구고 있었다. 내일 권지하가 얼마나 멋질까,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까, 노래도 한다는데 기대된다 등등 모두 권지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다율은 문득 뿌듯해졌다. 새삼스럽지만, 자신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의 매니저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배우님은 지금 기분이 어떠실까. 다율은 소파 옆자리에 앉아 있는 권지하를 살짝 쳐다보았다. 그는 턱을 괸 채로 한강이 내다보이는 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앗. 뭔지는 몰라도 진지한 생각 중이신가 봐.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진중해. 혹시 내일 팬미팅을 앞두고 지난날을 되돌아보시는 걸까? 아니면 팬들을 향한 뭉클한 감정을 곱씹고 계신 걸까.

다율은 권지하가 무슨 상념에 잠겨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다.

사실 권지하는 다율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다시 다가가 잡아먹을 것인가 하고 고찰 중이었다.

“으음….”

권지하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지난번은 너무 성급했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대로 일을 쳤다면 겁 많은 다율이 마음에 벽을 치거나 도망을 칠 수도 있었지 않을까. 권지하는 그렇게 생각 중이었다.

“언제 잡아먹어도 괜찮겠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권지하가 중얼거렸다.

“배우님, 뭐라고 하셨어요?”

다율이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권지하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가 지금 뭐라고 했어요?”

“뭘 잡아먹는다고 하셨어요.”

“아. 배가 고파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나 보다.”

권지하가 능수능란하게 둘러댔다. 다율은 깜짝 놀라며 헉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일했네요! 어떡해. 야식이라도 시킬까요? 아냐. 지금 뭐 먹으면 내일 얼굴 부으실 텐데…! 어떡하지?”

“아니요. 나 얼굴 잘 안 부어요. 이 매니저도 잘 안 붓지 않아요?”

“네. 정확히 말하자면 체질상 원래 얼굴에 살이 많아서 부어도 티가 안 나죠.”

“하하. 그럼 우리 뭐 먹고 자도 되겠다. 우리 이 매니저 열심히 일했는데 밥은 먹고 자야죠.”

권지하가 다율의 뺨을 손등으로 살짝 쓸었다. 다율은 오늘따라 다정한 권지하 때문에 쑥스러웠지만 티를 내기는 싫어서 소파에서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럼 배달이라도 시킬까요?”

“아니. 내가 차려 줄게요.”

“배우님이 직접요?”

“응. 생각해 보니까 직접 차려 먹은 지도 오래된 것 같아서요.”

배우님이 나를 위해 식사를 차려 주신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다율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지 못했다.

권지하가 다율을 데리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그가 양문형 냉장고를 열자 싱싱한 채소와 먹음직스러운 고기, 온갖 소스류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에 집안일 봐주시는 분이 장 봐 놔서 재료는 많이 있을 거예요. 뭐 먹고 싶은지 말해 봐요.”

“어… 사실 전 아무거나 잘 먹는데.”

야생의 다람쥐는 도토리나 밤만 먹고 살지 않는다. 원래 잡식성이라서 고기도 먹을 줄 안다. 다율 역시 다람쥐의 본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소고기를 좋아했다.

“스테이크 먹고 싶어요.”

“그럼 호두 샐러드랑 스테이크 해 줄게요.”

“와! 너무 좋아요.”

“내가 만들 테니까 이 매니저는 테이블에 얌전히 앉아 있어요. 다 해서 가져다줄게요.”

권지하가 식탁 의자를 빼 주며 다율을 앉혔다. 기다리는 동안 마시고 있으라며 음료수를 따라주고 조리대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율은 새삼 가슴이 뛰었다.

참 다정다감하다.

다율은 식탁에 턱을 괴고 하염없이 권지하를 바라보았다. 고기의 핏물을 빼고 마리네이드를 하고, 살짝 와인을 뿌리며 그는 섬세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고기에 양념이 배어드는 동안 막간을 이용해 호두를 모양 좋게 으깨어 오븐에 구웠다.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식사를 기다린 지 15분째, 샐러드와 스테이크 2인분이 나왔다.

“와! 너무 맛있겠다.”

“맛있게 먹어요.”

“우리 배우님 최고네요!”

초록빛이 싱그러운 채소에 호두를 얹고 참깨 드레싱을 끼얹은 비주얼이 다율의 입맛을 돋웠다. 다율은 게 눈 감추듯 샐러드를 해치웠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에게 물을 챙겨 주고, 주스를 중간중간 먹이고 입가를 닦아 주었다.

“스테이크도 먹어 봐요. 내가 잘라 줄게.”

스테이크는 적당히 잘 익은 상태라 스테이크용 칼이 닿기만 해도 보들보들하게 썰렸다. 권지하는 다율의 작은 입 크기에 맞춰서 스테이크를 자른 다음 포크에 찍어 내밀었다. 다율은 앙, 하고 따뜻한 고기를 받아먹었다.

“우와. 진짜로 맛있어요. 배우님, 혹시 요리사였어요?”

“지지난 작품에서 셰프 역을 한번 맡았었잖아요. 그때 실제 요리사분을 모셔 놓고 요리 교습을 받았죠.”

“오, 그래서 이렇게 맛있는 거구나.”

“나도 한 입 줘 봐요.”

권지하가 다율의 포크 쥔 손목을 슬쩍 쥐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다율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되찾고 스테이크를 콕 찍어 올렸다.

“자, 드릴게요. 배우님.”

다율이 육즙이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를 권지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엇.”

조심한다고 했는데 손이 떨려 그랬는지 권지하의 입가에 스테이크 소스가 묻고 말았다. 다율은 식탁 위를 둘러보며 휴지를 찾으려 했다.

“잠시만요. 얼른 휴지 찾아서 닦아드릴게요.”

“손으로 해 줘요.”

“네?”

“이렇게.”

권지하가 다율의 손목을 꽉 쥐었다. 손가락이 길고 손이 커 다율의 손목이 한 손에 잡힐 지경이었다. 다율이 어버버 하는 동안 손이 착실히 끌려갔다.

하얗고 끝이 말랑한 손이 권지하의 입가를 쓸었다. 다율의 깨끗했던 손끝이 소스로 물들었다.

“이런. 우리 매니저님 손이 지저분해졌네.”

당연한 소릴 하시네. 다율은 남의 손을 휴지 대용으로 사용하고서 뻔한 소리를 내뱉는 권지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 일어났다.

쪽.

권지하가 다율의 손가락 끝을 입 안에 넣고 빨았다.

“배, 배우님…!”

“휴지가 어디 있는지 못 찾겠어서.”

권지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다율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권지하의 서늘한 입 안 감촉이, 혀끝이 못 견디게 자극적이었던 탓이다.

미친 다람쥐. 이제는 손가락만으로도 뿅 가는구나!

다율은 스스로를 몹시 치고 싶었다. 이렇게 스킨십을 하다 보면 또 음흉한 마음이 들 것만 같았다.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만이 상책이다 싶었다.

“저, 저… 손 좀 씻고 올게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 다율은 복도에 딸린 욕실로 뛰듯이 걸어갔다. 권지하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살짝만 맛봤는데도 꿀맛이네. 아, 좀 변태적인가?

두 사람이 속으로 하는 생각은 비슷했지만, 이렇게 오해는 깊어만 갔다. 이런 와중에 착실하게 날은 밝아 드디어 대망의 팬미팅 당일이 되었다.

<권지하 데뷔 6주년 팬미팅 WITH. 천상천하 권지하>

평화대학교 희망의 전당 건물 외벽에 초대형 현수막이 나붙고, 수많은 관객들이 줄을 지어 입장을 시작했다. 들뜨고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관객들은 굿즈를 한 아름 안아 들고 속속 제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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