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32화 (32/95)

32화

“어… 대리님? 무슨 일이신가요.”

-아, 다름이 아니라 아까 제가 드린 사인용 포스터 말인데요. 그거 다 챙겨 간 것 맞아요?

“챙겨 온 거… 맞아요.”

다율의 시선이 테이블 근처에 방치된 포스터 뭉치로 향했다. 방금 일촉즉발의 스킨십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다율은 권지하와 함께 사인 포스터를 만들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래요? 그럼 왜 이렇게 수량이 안 맞지.

“저는 50장 딱 맞게 가져왔어요.”

-그럼 다른 부서에서 가져갔나 보네요. 일단 알겠어요.

“네. 대리님. 들어가세요.”

통화가 끝났다. 다율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권지하를 바라봤다. 그는 싸늘하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율은 화가 난 듯 보이는 그를 보며 흠칫했다.

“배, 배우님… 화나셨어요?”

이번에는 권지하가 아차 했다. 다 잡은 사냥감을 목전에서 놓쳤다고 본능적으로 화가 났었다. 하지만 다율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건 원치 않았다. 권지하는 평소 연기할 때 쓰는 기술을 발휘해 능숙하게 온화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그러자 다율의 겁먹은 눈망울이 조금 누그러졌다.

“화난 거 아니에요.”

“아, 그… 그렇죠? 아니죠?”

다율은 크게 안심했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권지하는 더 부드럽게 웃었다. 표정을 좀 더 주의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너는 어디까지나 나를 전적으로 신뢰해야지. 그래야 몸과 마음을 다 내맡길 거 아니야. 무서워해선 안 돼.

“어… 그, 그러면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뜨거운 스킨십 직전에 맥이 탁 끊긴 상황. 다율은 적당한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지금이 부끄럽고 또 창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좋아하는 티를 내 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됐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이대로 권지하와 계속 마주 보고 있다가는 사고를 칠 것 같았다. 순혈주의자인 다율의 할아버지가 노발대발할 만한 그런 사고 말이다. 솔직한 말로 다율은 권지하보다 자신의 욕망과 발칙함이 천 배는 무서웠다.

하지만 권지하로서는 다율의 얼어붙은 표정과 글썽이는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오해가 싹텄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다율이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긴 어딜 가요.”

그래서 일단 붙잡았다. 다율은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쥐는 압박감과 차가운 피부에 또다시 소름이 끼쳤다.

너무 좋아! 으악!

차마 내가 당신을 덮칠 것 같으니 우리 배우님 도망가세요. 저는 엉큼한 다람쥐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율은 다시 몸을 뺐다.

“나, 나가야 돼요.”

“이 밤중에 어딜 간다고.”

“사… 사무실에 놔두고 온 게 있어서요.”

“물건은 내일 챙겨도 되잖아요.”

“김 대리님이 출근하시기 전에 제가 챙겨 놓아야 할 것 같아요.”

다율이 권지하의 손을 뿌리쳤다.

“잠시만!”

다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으로 달렸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나가며 외쳤다.

“죄송해요! 다녀올게요!”

“저기, 잠시….”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권지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강압적이었나. 거칠게 몰아붙여서 겁을 먹었나 보다.

권지하는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당분간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가야겠군. 놀라서 도망가면 안 되니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하지만 다음 판에서는 기습에 성공해야지.

그가 그렇게 다짐하는 동안, 도망친 다율은 지하주차장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미쳤어. 이다율! 너 짐승이지.”

빵! 다율이 클랙슨에 고개를 처박자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다율은 자책하듯이 핸들에 이마를 몇 차례 콩콩 박은 다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배우님을 덮치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정신 차리자. 배우님 지켜드려야지.”

다율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무척이나 못되고 음란한 다람쥐 같았다. 이렇게 배우님을 홀려서 사고를 치고 싶은 걸 보면 아주 지독하게도 못된 다람쥐임이 틀림없었다.

“참아… 참자.”

다율은 인터넷 요가 영상에서 본 호흡법을 따라 하며 숨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결심을 다지기 위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외쳤다. 난 이제 평범한 다람쥐가 아니다.

“난… 돌부처다!”

***

두 사람은 평화를 가장한 긴장 상태에 놓인 채로 이틀을 보냈다. 다율은 권지하가 스킨십을 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덕분에 제 욕망을 다스릴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매니저 노릇이나 하며 살자. 내 꿈은 어디까지나 청약 당첨이고, 서울에 보금자리 마련이야. 헛된 생각으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돼. 그리고 우리 배우님 지켜드려야지.

주먹을 꽉 쥔 다율은 직장인 마인드를 장착하고 저녁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은 사무실에 들러야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집에서 업무를 보기로 했다. 마침 권지하 팬미팅 티켓팅 날이기도 했다.

“오늘은 배우님 팬미팅 티켓팅이 있습니다.”

“아, 그게 오늘인가?”

“네. 지금 좌석배치도랑 티켓 예매정보를 자세하게 올렸는데요, 카페가 들썩들썩하네요.”

다율이 권지하 앞에서 노트북을 켜 실시간으로 글이 쏟아지고 있는 게시판을 보여 주었다. 대부분의 글은 티켓팅을 앞둔 팬들의 흥분과 떨림, 주책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자유] 티켓팅 십 분 전. 우황청심환 먹었습니다.

ㄴ저도 먹을 걸 그랬어요 ㅠㅠ너무 떨리네요

ㄴ제발 내 자리 하나만!

ㄴ포도알 지하 그림 구합니다. 기운 필요해요.

[사진] 배우님이 포도밭에서 찍은 사진 공유합니다.

ㄴ감사합니다. 꼭 티켓팅 성공할게요.

“이거 뭐죠? 내가 포도밭에서 찍은 사진은 왜 공유하는 거야?”

권지하의 물음에 다율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전했다.

“아, 이게 뭐냐면요. 티켓팅할 때 사이트에 배치된 좌석이 포도처럼 보라색으로 표시되거든요. 그걸 빨리 클릭한 사람이 좌석 주인이 되는 속도전이고요. 그래서 보통은 좋아하는 연예인이 보라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사진이나 보라색 옷을 입은 사진 같은 걸 서로 공유해요.”

“그럼 포도의 기운이 온다. 이런 거네요?”

“네. 그런데 마침 배우님은 포도밭에서 화보 촬영을 하신 적이 있잖아요. 그때 사진을 보면서 힘을 내는 거예요.”

야무지고 똑 부러진 답변에 권지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매니저 일은 처음이라면서 팬 문화를 쫙 꿰고 있네요.”

“동영상이랑 커뮤니티 보면서 많이 공부했어요.”

다율이 쑥스럽다는 듯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유난히 잘 들어오는 제목의 글이 하나 있었다.

[제안] 오늘 배우님도 티켓팅 참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가는지 배우님도 직접 체험해 주세요!

ㄴ옳소. 배우님도 이 피 터지는 전쟁터에 참전해서 저희 마음을 느껴 보세요.

ㄴ글쎄요…? 오늘 예상 동시접속자가 90만 명이라던데. 오빠는 서버 진입하지도 못할 듯요.

ㄴ그건 그래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배우님 본인은 티켓팅에 실패할 것 같아요.

“뭐야. 이게 그렇게 어려워?”

권지하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선착순으로 클릭하면 그 자리가 내 자리 되는 개념 아니었어요?”

그의 속 편한 말에 다율이 다시 한번 나섰다.

“이게 왜 이렇게 말하는 거냐면요, 배우님은 생각보다 인기가 많으세요. 그래서 국내외 팬들이 동시 접속하면 서버가 마비될뿐더러 사이트에서 튕겨나가게 돼요. 화면이 하얗게 변해서 꼼짝도 안 하기도 하고요.”

“그럼 어떻게 티켓을 사죠?”

“그 힘든 경쟁을 뚫고 서버를 통과한 사람만 가능한 거죠.”

“오… 그럼 엄청나게 힘든 거구나.”

“네.”

“그럼 우리도 한번 티켓팅해 볼까요?”

의외의 말에 다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도 티켓팅에 참전하자고요?”

“어렵다며. 얼마나 힘든지 나도 한번 느껴 봐야 팬들 마음을 알죠.”

“어… 그렇긴 해요. 아, 예전에 보니까 아이돌 그룹은 멤버들을 피시방에 데려가서 티켓팅하는 모습 찍어서 자체 콘텐츠로 활용하더라고요. 저희도 그거 할까요?”

다율은 언젠가 홍보팀 신 대리와 회의할 때 봤던 자료를 떠올려 냈다. 연예인이 직접 티켓팅에 참가해 난리를 겪는 콘텐츠가 반응이 좋았다고 기억한다.

“괜찮은데? 해 보자고. 팬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아.”

“그렇죠? 다들 엄청 좋아할 거예요. 그럼 저 촬영 준비 좀 할게요!”

뜻밖의 기획에 다율은 신이 났다. 그는 부랴부랴 노트북 두 대를 책상에 올리고 마우스를 준비했다. 잽싸게 캠코더를 가져와 삼각대에 연결하고 구도도 잡았다.

“여덟 시 되면 시작하는 건가?”

“네. 그때부터 열린대요. 지금 들어가 있어야겠죠?”

두 사람은 나란히 노트북을 작동시켜 티켓팅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미 메인 배너에 <권지하 팬미팅> 이미지가 걸려 있었다. <오늘 권지하 팬미팅 예매로 인해 사이트 접속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라는 팝업창도 떴다.

“많이 힘들까?”

“어려울걸요.”

다율은 본인인증을 하고 상세 페이지로 들어갔다. 빨갛게 표시된 타이머가 1분 전을 가리켰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어깨에 힘 들어갔네.”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곧게 뻗은 어깨가 손에 착 감겼다.

“주물러 줄게요.”

“아, 괜찮은데.”

“아냐. 뻣뻣해.”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빳빳하게 경직된 근육에 시원한 손이 닿자 다율은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눈을 지그시 감고 주무름에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였다. 이대로 지난번처럼 배우님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하지만 다율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배우님이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마사지해 주시는데 못된 마음을 먹다니, 돌부처가 되기로 한 맹세를 잊었나? 하지만 너무 좋아. 손이 서늘하면서도 힘이 강해서 어깨가 살살 녹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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