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31화 (31/95)

31화

권지하는 한참 만에 돌아왔다. 다율이 보기에 그는 아까의 날선 느낌이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묘한 위압감과 강요하는 태도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럼 다시 연습해 볼까요?”

“네!”

다율은 야릇한 느낌을 떨쳐내며 다시 대본집을 폈다. 자꾸만 권지하의 손가락에 눈길이 갔지만 불굴의 의지로 참아냈다.

***

MC 연습을 마친 다율은 권지하와 함께 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팬미팅의 꽃 굿즈 제작을 위해서였다.

오늘은 각 제품의 시안을 보고 최종 확정을 지어 발주를 넣는 날이었다. 다율과 권지하 그리고 홍보팀 직원들이 회의실 탁자에 둘러앉았다.

“이번 팬미팅 굿즈입니다. 대형 포스터, 포토카드 세트, 키링, 파우치, 티셔츠인데 직접 보시고 평가해 주세요. 별다른 하자 없으면 이대로 발주 넣겠습니다.”

홍보팀 김 대리가 두 사람에게 물건을 보여 주었다. 권지하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포스터와 포토카드는 다율의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너무 멋있다. 전 괜찮은데 배우님은 어떠세요?”

“난 포스터가 마음에 드네요.”

자기애가 강한 권지하답게 그는 자신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포스터를 흡족하게 바라봤다. 다율 역시 포스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작가를 섭외해서 찍은 작품이니만큼 사진에는 권지하의 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가 잘 담겨 있었다.

“그럼 이대로 발주 넣을게요. 포스터 50장만 매니저님이 맡아서 작업해 주세요. 하단에 배우님 사인 넣어서 여기 놔 주시면 저희가 수거해 갈게요.”

추첨 이벤트로 사인본을 증정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홍보팀은 별도로 포스터를 인쇄해 두었다. 다율은 김 대리에게 포스터 위치를 인수인계 받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머지 직원들이 자리를 뜨자 다율과 권지하만 회의실에 남았다. 다율이 선반에서 주섬주섬 포스터 뭉치를 꺼내 왔다. 한눈에 봐도 묵직해 보이는 종이를 보고 권지하가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일할까요?”

“그래도 될까요?”

“오늘 우리 매니저님 여기저기 다니느라 힘들었잖아요. 집으로 가서 마무리하죠.”

“고맙습니다, 배우님.”

사무실을 나선 두 사람은 느지막한 오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율은 집 안으로 들어서며 감탄했다.

“아, 간만에 일찍 끝나니까 좋네요.”

“매니저님이 좋다니 다행이에요.”

“얼른 씻고 나올게요.”

다율은 편안한 반바지 차림으로 거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하체가 영 찌뿌둥했다. 다율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손을 가져다 댈 때마다 종아리와 허벅지 모두 찌릿하게 아팠다. 요즘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다리 아파요? 매니저님. 내가 좀 만져 줄까요?”

“아,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다율은 식겁하며 권지하의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말릴 새도 없이 권지하가 소파에 올라왔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만져 주는 게 훨씬 낫지. 자기가 주무르면 봐주게 돼 있거든요.”

소파에 앉은 다율의 등을 감싸며 권지하가 뒤에 자리를 잡았다. 다율은 일어나려 했지만 권지하의 한 팔이 무릎 아래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영락없이 그의 품에 갇혀 버렸다.

“엇.”

다율은 반쯤 누운 채로 권지하의 가슴에 기댄 꼴이 되었다. 그러면서 반바지 아래 종아리는 번쩍 들고 있어 부끄러웠다.

“제가 할게요. 괜찮아요!”

“시원하게 주물러 줄게요.”

“괘, 괜찮… 아야!”

차가운 손이 다율의 가느다란 발목을 쥐었다.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나 싶더니 종아리를 꽉 움켜쥐는 바람에 다율은 소리를 질렀다.

“아파요.”

“아파도 참아요. 뭉친 근육을 풀어야 하니까.”

강한 악력이 다율의 늘씬한 종아리를 꽉꽉 주물렀다. 엄지로 근육을 문지르고 꾹꾹 눌러대니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프기는 아팠다.

“아… 아파. 너무 아픈데요.”

“거의 다 풀렸어요. 조금만 더 참아 봐요.”

권지하는 한 손으로 다율의 발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다리를 쓰다듬었다. 서늘한 체온과 강한 압력이 맞물려 다리 통증은 가벼워졌다. 하지만 마사지가 진행될수록 다율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발목에서 시작해 종아리를 지나 점점 위로 올라오는 손이 어느새 허벅지 중간까지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도 아프기만 해요?”

“그… 그건 아닌데.”

“어쩔까요. 더 해 줄까요?”

권지하가 나른하게 물었다. 손길은 시원했으나 다율은 망설여졌다. 배우님이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조차 자신은 이상한 의미를 담아 해석하고 있었다. 이건 너무나 미안한 행위였다.

“더 안 해 주셔도, 읏!”

“이쪽도 해야지.”

이번에는 반대쪽 다리를 붙잡혔다. 활짝 벌어진 두 다리에 다율은 식겁하며 다리를 오므렸다. 하지만 권지하가 다율의 다리 사이에 팔뚝을 끼워 넣고 있어 불가능했다.

“배… 배우님. 자세가 좀.”

“자세가 뭐 어때서요.”

권지하가 다율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물었다. 한 손으로는 끝없이 종아리를 주무르고 발목을 만지작댔다. 다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매니저의 피로를 풀어 주려는 선량한 내 배우님…! 죄송해요. 저는 나쁜 매니저입니다. 자꾸만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고 있어요.

“으읏, 죄송…! 그만해 주세요…!”

“왜 그만하라는 거지? 이제 좀 풀릴까 말까 하는 참인데.”

“제발, 제발 놔주세요. 저 너무…!”

뚝. 권지하가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췄다. 다율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뭐?”

“가… 간지럽고.”

“간지럽고 또?”

“으… 그게.”

배 속 깊은 곳이 뜨거워진다는 말을 어떻게 해요. 아랫배가 자꾸 뭉친다고 어떻게 말하냐고…!

다율은 입을 앙다물었다. 이것만큼은 멍석말이를 당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매니저님.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아, 그… 그만요. 배우님, 제발.”

그렇게 말하며 권지하는 다율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다율의 등줄기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뭐가 뭔지 몰라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의 직감 같은 영역이었다. 하지만 발목이 잡혀 있고 허리 또한 강하게 붙들려 있었기에 다율의 움직임은 바둥거림에 불과했다.

“정말 그만해요?”

귓가에 닿은 권지하의 목소리가 습했다. 다율은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댔다. 온몸이 간지럽고 뜨거웠다. 서늘하고 시원한 손길을 원했다. 머리로 이건 이상한 짓이야, 이상한 짓이야. 거듭 되뇌었으나 다율은 끝내 권지하의 손길에 굴복하고 말았다.

배우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싶어!

“그…만하지 마세요.”

이 또한 동물의 본능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짜릿한 건 더 좋은 거다.

“계속해 주세요. 배우님.”

이성이라고는 한 자락도 남아 있지 않은 달뜬 목소리에 권지하의 인내도 무너져 내렸다.

“진심이지. 계속해 달라고.”

“네, 네… 계, 계속요.”

다율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대로 권지하에게 붙들려 침실로 향한다는 건 스물두 해간 고이 지켜온 정절을 잃는다는 의미였지만, 지금의 다율은 본능에 완벽하게 잠식된 상태였다.

“계속해… 주세요, 배우님.”

다율의 갈색 눈망울이 권지하를 올곧게 향했다. 순수하면서도 솔직한 얼굴이었다. 권지하는 일분일초라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다율의 팔목을 잡아챘다.

“헉.”

서늘하고 큼직한 손이 다율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양 뺨을 모두 권지하에게 내맡긴 다율은 온몸의 피부를 어루만짐 당하는 기분이었다. 심박수는 치솟고 가슴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배우님.”

마주 본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끈적하게 얽혔다. 권지하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다율은 본능적으로 눈을 내리깔려고 했다.

그때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삐리삐리. 띠요옹.]

놓치는 전화가 없게끔 다율은 평소 사이렌 소리 비슷한 계열로 벨소리를 설정해 놓는 편이었다. 달콤하고 밀도 높은 공기로 메워진 공간에 방정맞은 경보음이 울려 퍼지자 산통이 깨졌다.

와장창. 무너지는 무드와 함께 다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율은 자신이 권지하를 유혹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나 지금 배우님한테 나 좀 만져달라고 한 거야? 제정신인가…!

빠르게 이성이 돌아오며 피가 식었다. 다율은 허둥지둥거리며 권지하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권지하의 악력은 더욱 강하게 다율을 붙들었고, 두 사람의 몸은 마구잡이로 밀착되었다.

“받지 마.”

계속해서 요란스럽게 벨이 울려댔지만, 권지하는 그런 일 따위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낮고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감이 묻어났다. 다율은 지금 이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면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님, 놔주세요. 전화 왔어요.”

“전화가 그렇게 중요해?”

“놔, 놔주세요…!”

다율은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권지하를 피해 아래로 몸을 숙였다. 잽싸게 권지하의 품을 빠져나온 다율은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낚아채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이 매니저님! 평소답지 않게 늦게 받으시네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홍보팀 김 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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