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30화 (30/95)

30화

갑자기 웬 신혼집 이야기지. 다율은 대화의 흐름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권지하의 아버지는 또 그 이야기를 잘 알아듣는 듯 추가 질문을 했다.

“시골이면 시골. 서울이면 서울. 정확하게 답을 해 봐요.”

“아… 꼭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건가요?”

“그렇지. 한 군데에서 정착을 한다면 어디가 좋냐 이 말입니다.”

“으음….”

당연히 체질적으로는 산속이 좋지만 그곳에는 수인 헌터들이 출몰하니까 안 돼. 역시 도시에서 인간인 척 위장하며 사는 게 안전하리라. 다율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대답했다.

“둘 중에 고르라면 저는 서울이요.”

“음. 좋아. 잘 알겠어요.”

권지하의 아버지는 그제야 흡족하다는 듯 멋지게 웃었다. 다율은 대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본론으로 넘어가고자 했다.

“일단 어머님, 아버님. 팬미팅 때 쓰일 영상을 사전 제작할 건데요. 이 카메라 보시면서 평소 배우님한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 주시면 돼요.”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낸 다율이 렌즈를 가리켰다. 그가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녹화 버튼을 누르자 아버지가 대뜸 삿대질을 했다.

“이눔 자식, 딴따라 짓이 다 뭐냐.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당장 때려치우고 애나 두엇 낳거라.”

풉. 다율은 토피넛 라테를 뿜을 뻔했다.

“여보. 이런 말 하라고 찍는 영상이 아니에요! 여기 매니저님도 계신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눈치 좀.”

권지하의 어머니가 따끔하게 말하며 남편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미안해요. 이이가 요새 좀 예민해서. 내가 대신 이야기할게요.”

그녀는 남편을 강렬하게 째려본 다음 상냥한 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했다.

“사랑하는 지하야. 네가 배우가 된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네. 기특하고 장하다. 네 꿈처럼 올 한 해는 흑룡영화제랑 흑상예술대상 다 석권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엄마, 아빠는 늘 널 응원하고 있으니 지하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파이팅!”

“아까 한 말은 취소한다. 일단 상 타고 이야기하자. 힘내라.”

권지하의 아버지가 화보에 나오는 미중년처럼 근사하게 웃으며 파이팅을 외쳤다. 다율은 그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좋으신 분들인 것 같아. 이런 분들에게 사랑받고 자라서 배우님이 그렇게 살갑고 애정이 넘치시나 봐. 나 같은 일개 매니저한테까지도 다정함을 나눠 주시는 걸 보면 더욱 그렇지.

“어머님, 아버님. 오늘 촬영 정말 감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 반가웠고요. 다시 뵐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다율이 촬영 장비를 정리하고 인사했다. 그러자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뵐 날이 어쩌고 저째…?”

“언젠가 뵐 때까지 건강…?”

무엇이 궁금한 점인지 다율로서는 알 수 없어 그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했다.

“네. 항상 건강하시고요. 오늘 찍어 주신 영상은 팬미팅 때 잘 편집해서 상영할게요. 협조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제가 바빠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다율은 해맑게 웃으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몹시도 당황한 부부를 뒤에 남겨두고서.

음료값을 치르고 카페에서 나온 다율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MC 연습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YU엔터 사옥으로 돌아가야 했다.

“배우님께 연락드려야지.”

차를 출발시키기 전 다율은 핸드폰을 열어 권지하의 프로필을 찾았다. 프로필은 언제나처럼 흑백의 프로필 사진으로 권지하 특유의 자기애적인 감성이 듬뿍 담겨 있었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권지하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 매니저?

“배우님. 저예요. 저 외근 나갔다가 사무실 돌아가는데 MC 합 맞춰 보실 수 있을까요.”

-그래야죠. 그럼 회사에서 봐요. 조심해서 오고요.

부릉. 차가 출발했다. 다율은 콧노래를 부르며 회사 방향으로 향했다.

***

“실장님.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부모님은 잘 뵙고 왔나?”

맹 실장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다율에게 알은체를 했다.

“네. 너무 협조 잘 해 주셔가지고 잘 촬영했습니다. 편집만 신경 써서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홍보팀에 캠코더 넘겨.”

“알겠습니다. 전 권 배우님하고 MC 합 좀 맞춰 보러 갈게요.”

“어, 그래. 수고해.”

다율은 2층으로 올라가 권지하 전용 연습실로 갔다. 문을 빼꼼 열어서 보니 셔츠에 슬랙스 차림의 권지하가 잘 세팅된 머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배우님. 스케줄 있으세요? 세팅돼 있으시네요.”

“아니요. 없는데.”

“그럼 왜 이렇게 준비된 사람 같으세요?”

“이 매니저 만나러 나왔으니까.”

“네?”

“잘 보여야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오늘은 나 알아듣지 못하는 말 하는 사람만 실컷 만나네.

다율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테이블에 놓인 MC 대본집을 펼쳐 들었다.

이번 팬미팅 사회를 맡게 된 다율은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크게 활약해서 권지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진행 따위 맡아 본 적이 없었기에 그의 발음과 제스처, 시선 처리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그러니 다율이 할 수 있는 일은 연습 또 연습뿐이었다.

“안.녕.하.세.요.천.상.천.하.권.지.하.여.러.분.”

다율이 경직된 발음으로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능청스러우면서도 물 흐르듯 무대의 막을 열어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뻣뻣해서는 안 됐다. 다율 스스로가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게 바로 발음의 부정확성이었다.

“아아… 나 발음 어떡해.”

“발음이 아쉽긴 하네요.”

“배우님이 듣기에도 그렇죠? 어떡하면 좋아질까요.”

어깨가 축 처진 다율을 보다가 권지하가 슬쩍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발음 교정법 좋은 거 아는데.”

“어, 진짜요. 어떤 건데요?”

“한번 배워 볼래요?”

“네. 저 지금 한시가 급해요. 얼른 도와주세요.”

언젠가 예능에서 봤던 볼펜 물고 발음하기나 간장공장공장장 같은 어려운 단어 외우기인가? 다율은 권지하가 알려 줄 비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권지하는 그런 가르침 대신 손가락을 내밀었다.

“입 벌려 봐요.”

“네? 입이요?”

“응. 입 벌려 봐요. 이상한 거 아니야.”

권지하가 다율을 내려다보며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어서 다율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권지하가 한발 빨랐다. 그가 다율의 아래턱을 부드럽게 문지른 다음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뭔데…요? 아픈 거는 아니죠?”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권지하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어딘지 오싹함을 풍겼다. 본능적으로 긴장한 다율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정은 권지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바로 다율의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를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배, 배으님.”

당황한 다율이 다급하게 권지하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 배우님, 배우님 부를 때마다 발음이 샜다. 차가운 손가락이 혀 위를 누르는 기분이 너무나 묘해 다율은 겁을 먹었다.

“쉿. 가만히 있어 봐요.”

“배…으님.”

“이러고 다시 멘트 해 봐요. 내 손가락 무시하고 말을 하려고 노력해 보라고.”

권지하가 낮게 읊조리며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다율은 원인 모를 수치심을 느꼈다. 그냥 손가락 하나가 입에 들어와 있을 뿐인데 얼굴이 달아오르며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아까 멘트 이대로 말해 보라니까요.”

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이 짓이 끝날 것 같아 다율은 숨을 들이쉰 다음 아까 했던 대사를 반복했다.

“안녕흐세요. 츤상츤하….”

입 안에 들어온 서늘한 권지하의 손가락이 다율이 대사를 읊는 대로 조금씩 움직였다. 뜨거운 혀와 차가운 손가락이 얽혔다.

“계속해요. 잘하네.”

“으음….”

계속해서 입을 벌리고 있자니 침이 고였다. 다율은 꼴깍 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빨았다.

아차. 방금 행동은 불쾌하셨을까. 다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쪽 빨아들이는 소리도 너무 컸던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어떡하지. 권지하의 눈치를 보려고 다율은 눈을 살짝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권지하는 평소처럼 다정하기만 한 눈빛이 아니었다. 서늘하면서 위압적이었다. 다율은 조금 당황했다.

내가 알던 배우님이 아니야. 무서워. 날 이렇게 쳐다보신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권지하는 다시 평소의 웃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율의 입에서 느릿하게 검지를 뺐다.

“손 씻고 올게요.”

“아, 네. 배우님.”

다율은 제 침으로 더럽혀진 권지하의 손을 보며 민망해 고개를 떨궜다. 권지하는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가며 중얼거렸다.

“아… 못 참겠네.”

“뭐라고요, 배우님?”

“아니야. 기다려요. 얼른 올게요.”

권지하는 친절한 웃음을 띠고 나갔다. 빨리 올 줄 알았던 그는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다율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다가 얼굴을 빨갛게 익혔다.

방금은 날 도와주시려고 한 일일 뿐인데 기분이 오싹오싹 묘했어. 이래도 되는 걸까? 왜 늘씬하고 우아한 손마디가, 서늘한 그 감촉이 난 야릇한 걸까.

“설마… 요새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어쩌면…?”

다율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을 삭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여름이고 자신은 인간화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자연 상태에서만 맞이할 수 있는 봄가을의 ‘발정기’가 올 리 없었다. 적어도 다율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그랬다.

발정기는 무슨. 그냥 배우님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봐.

다율은 손등으로 얼굴을 식히면서 후우,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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