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무래도 그렇죠? 나중에 병원 한번 가 봐야겠어요.”
“네. 큰 병원으로 가세요.”
“하아… 그런데 특히나 안 좋은 곳이 있어서 참 힘드네요.”
“네? 어디가요?”
“그게… 아무리 매니저라지만 밝히기가 좀 그렇네요.”
“뭐길래 그래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다율은 어느새 자세를 고쳐 잡고 눈을 댕그랗게 뜬 상태였다. 권지하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요새 입술이 유난히 차가워요.”
“정말요?”
“네. 가만히 있으면 내 몸에서 입술이 가장 차갑다고 스스로 느낄 정도예요. 버틴다고 버텨 봤는데 점점 나빠지네요.”
“전혀 몰랐어요. 저는 항상 배우님 가슴이나 어깨를 껴안고 자니까… 아, 어떡하지.”
“그래서 난 우리 매니저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큼지막한 손이 다율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끌어다가 다율의 손끝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에 다율이 흠칫했다.
“아, 차가워.”
“그렇죠…? 차갑지, 나?”
말하는 족족 권지하의 숨결이 다율의 손끝에 바로 느껴졌다. 다율은 얼굴이 홧홧하게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입술이 조금 벌어지나 했더니 아랫입술이 다율의 손끝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아.”
“많이 차갑잖아요. 좀 도와줘요.”
“제,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
권지하가 다율을 가만히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수치심과 공포, 약간의 호기심과 들뜸이 묻어나고 있었다. 권지하는 어둠 속에서 피식 웃은 다음 다율의 목 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대로 감싸 안으며 소곤거렸다.
“매니저님 몸 중에 가장 따뜻한 곳으로 날 도와주세요.”
“가, 가장 따뜻한 곳…?”
“여기.”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다율의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다율은 퍼뜩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바로 권지하가 다가와 다율의 등을 받쳤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점 좁아졌다.
“매니저님, 부탁할게요.”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으며 애원해 온다. 다율은 이런 일에 면역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권지하의 얼굴로 다가갔다.
어떡해. 이제 닿는다.
다율은 부들부들 떨며 병아리 발톱만큼씩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 시간이 걸려 쪽. 입술이 닿았다. 다율은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흐읏.”
“…역시 따뜻하네요.”
이번에는 권지하가 다율에게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다율의 말랑하고 따끈한 입술을 덮고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다율의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짜릿한 감각이 파도쳤다. 겨우 몇 초인데 다율에게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기분 이상해…! 엄청나게. 으아아악!
다율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과열된 프라이팬만큼이나 뜨거워졌다.
“으, 으읍… 숨 막….”
“아. 미안해요.”
권지하가 입술을 거뒀다. 다율은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너… 너무 길게는 못 하겠어요. 제가 숨이 짧아서.”
다율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권지하가 그런 다율의 손목을 붙들었다.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저 땀 나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부끄럽고 제 자신이 한심해 다율은 견딜 수 없었다. 욕실로 뛰어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지만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오르기만 했다.
“그 상황에서 좋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배우님께 체온을 나눠드리는 행위일 뿐인데 여기가 막… 막!
“너무 두근거려…! 악!”
다율은 욕실 벽에 이마를 쿵 박으며 신음했다.
***
이튿날 다율은 다크서클을 달고 출근했다. 밤새 가슴이 떨려 잠을 못 잤지만 사랑은 사랑이고 일은 일. 오늘도 팬미팅 기획 때문에 오전부터 회의가 열렸다. 맹 실장을 중심으로 선임 백장훈 매니저와 다율, 홍보 파트의 서선미 대리가 원탁에 둘러앉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팬미팅 준비를 해야 돼. 티켓팅이랑 공연장 관련해서는 담당자들이 알아서 잘해 줄 거라고 믿고… 그래. 이다율 매니저.”
“예.”
“오늘 VCR 촬영을 한다고?”
“네.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습니다.”
“기획 잘했어.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권 배우의 부모님이라니. 화제성을 끌기도 좋고 배우도 영상편지에 깜짝 놀랄 거고 팬들 호응도 좋을 거야.”
다율은 팬미팅을 기획하면서 권지하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바로 부모님의 영상편지였다. 맹 실장에게 건의를 하니 그가 선뜻 권지하 부모님의 연락처를 알려 줬다. 평소 부모님이 권지하의 연예계 진출을 반대해 왔음을 아는 다율은 아주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상냥하고 밝았다.
-매니저님. 나 찍을래요. 지하 아빠도 데리고 나갈게.
“제가 찾아뵙지 않아도 될까요?”
-오지 마. 우리도 간만에 서울 구경하고 좋지 뭐. 우리가 서울로 올라갈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러면 서울역 근처 카페에서 봬요.”
그렇게 해서 성사된 만남이었다.
회의를 마친 다율은 거울 앞에 서서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사옥을 나섰다. YU엔터에서 서울역까지는 차로 20여 분. 다율은 조금 일찍 가야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차를 몰았다. 그리고 부모님과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이르게 카페에 도착해 어른들이 오면 차를 내와 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분들이실까. 배우님더러 딴따라 그만하고 대나 이으라고 했다는데. 그러면 우리 집안만큼이나 보수적인 집안이 아닐까? 하지만 목소리로는 굉장히 친절하셨어. 궁금하다. 배우님만큼 미남, 미녀이시겠지?
다율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카페 문이 열렸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 한 쌍이 잠시 실내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율을 발견했다.
“어머. 매니저님 맞죠?”
“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 이다율 매니저입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권지하의 복사판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조각 같은 턱선. 잘생긴 윤곽에 냉한 느낌. 그는 흡사 <내가 권지하 아버지올시다.>라고 이마에 써 붙인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반면에 권지하의 어머니는 단발머리에 소녀 같은 이미지였다. 히피스러운 장신구를 걸치고 특이한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어 더욱 그래 보였다.
정장을 입은 아버지와 개성적인 패션의 어머니라니. 어색하면서도 그럴듯한 조합이다. 하지만 두 분 다 너무나 멋지고 예쁘셔. 다율은 권지하의 잘난 외모가 유전자에서 나왔음을 느끼며 그들과 악수했다.
“반갑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앉으세요.”
“나도 반가워요. 우리 매니저님은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인물이 좋으시네. 선하고 총명해 보이셔.”
“칭찬 감사합니다.”
다율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카페 직원이 음료수를 가져와 세팅하는 동안 권지하의 어머니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적였다.
“그런 의미로 이거 하나 받아요. 내 명함이에요.”
그녀가 크라프트지로 만든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 쓰인 직업과 약력을 확인한 다율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수… 수인권 운동가세요?”
명함에 쓰인 단체는 다율도 잘 아는 곳이었다. 매달 월급을 쪼개 후원금을 보내기도 하는 단체였다.
“응. 내가 여러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요즘은 수인권 보호 운동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국회 앞에서 단식투쟁을 한 달 했어. 덕분에 법안 몇 개 발의시켰지 뭐예요.”
“법안…이라면.”
“간단히 말해서 수인한테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자, 약재로 쓰는 행위를 처벌하자 그런 거죠.”
다율은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만 신기했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다율을 보며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내 이야기가 너무 놀라운가 봐.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던데 우리 매니저님은 그렇지 않아서 너무 좋다.”
“아니에요. 싫을 리가요. 그냥… 처음 봬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녹화하러 온 건데 쓸데없는 이야기 좀 그만해, 여보.”
권지하의 아버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이게 왜 쓸데없는 이야기예요? 당신도 참.”
“시원한 커피나 마셔야겠어. 여기 얼음 가득히 넣어서 한 잔 더 가져다주세요.”
“몸도 찬 사람이 찬 것 좀 그만 마셔요.”
“난 적당히 차가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는 얼음이 가득 든 커피를 받아 들어 원샷했다. 다율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배우님도 체온이 낮으시던데. 아버님 닮아서 그런 거예요?”
“그렇지. 저체온증은 우리 집안 유전이라서.”
“아… 그렇구나. 배우님이 항상 추위에 떨어서 너무 걱정이 커요.”
다율이 아이스 토피넛 라테를 빨대로 저으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부부가 즉각 반응했다.
“그놈이 떤다고?”
“응?”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뉘앙스를 담아서였다.
“맨날 춥다, 춥다. 밤에는 너무 몸이 차서 잠이 안 온다고 하시는데요…? 원래는 안 그러셨어요?”
“듣던 중 신기한 소리군. 우리 집안은 날 때부터 몸이 차게 태어나기 때문에 특별히 추위를 느끼진 않아요.”
“내가 직접 낳은 아들이지만 이날 이때껏 춥다 소리 한 번 안 들으면서 키웠어요.”
“네? 그…래요?”
다율은 부모님의 증언에 속으로 놀랐다. 자신만 보면 춥다고 염불을 외고 보온 물주머니가 필요하다고 밤새 놔주지 않는 권지하가 아니던가. 그런데 정작 부모님은 권지하가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니 이건 모순이었다.
자라면서 체질이 변하신 건가?
다율은 나중에 권지하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권지하의 어머니가 엉뚱한 소리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우리 매니저님은 시골 좋아해요?”
“시골이요?”
“응. 서울보다는 전원주택, 시골 이런 곳을 좋아하나 해서 묻는 거예요.”
“어… 기본적으로는 시골이 체질이긴 한데… 요새는 서울에 기반을 마련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신혼집을 마련해도 서울로 하고 싶어요?”
“신혼집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