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28화 (28/95)

28화

“너 내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았거든. 그 사람한테 사진 보여 주고 싶어.”

허걱. 설마 그게 나는 아니겠지…?

“눈 동그란 것도 그렇고. 머리 색깔하고 네 털 색깔도 비슷해.”

권지하의 말에 다율은 이제 그만 퇴장할 순서가 됐음을 깨달았다.

하하. 그럴 리가요. 그럼 저는 이제 그만.

다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뒤돌았다. 풍성한 꼬리와 세로 줄무늬를 보이며 다율은 권지하에게 등을 돌리고 걸었다.

자연스럽게 걷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율은 속으로 새기며 신중하게 하지만 빠르게 걸었다.

일단 퇴각한 다음에 빈틈을 노리자.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은 자리를 뜨겠지.

다람쥐 다율이 그렇게 생각하며 걷던 중이었다.

“다율아.”

응?

제 이름을 부르자 다람쥐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돌아갔다. 아차차! 그는 지금 자신이 다람쥐임을 깨닫고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갈 길을 갔다. 뽀로록 달려가는 다람쥐는 이내 숲속으로 사라졌다.

“하….”

권지하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다람쥐를 지켜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잽싸게 나무 뒤로 달아난 다율은 고개만 슬쩍 내밀어 권지하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 매니저가 어딜 갔지? 어디 갔길래 이렇게 흔적도 안 보여?”

권지하가 혼잣말을 하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피크닉 매트를 벗어나 저 멀리 걸어갔다. 다율은 그가 자리를 뜬 것을 확인하고 바위 뒤로 뛰었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숲으로 옷가지를 옮겼다.

숲속에서 인간으로 변해 재빠르게 옷을 입은 뒤 그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몇 분 뒤 권지하가 돌아왔다.

“이 매니저. 어디 갔었어요?”

“아, 저, 화장실이요.”

“핸드폰 놓고 가서 무슨 일이 있나 했어요.”

“하하. 너무 급해서. 아이고.”

권지하가 다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더니 <드셔본> 캔을 집어 들었다.

“그랬구나. 아몬드 먹을래요?”

권지하가 <드셔본> 캔에서 아몬드를 꺼내 다율의 앞에 내밀었다.

뭐, 뭐야. 아까랑 상황이 똑같잖아…!

다율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설마 배우님이 내가 다람쥐인 걸 눈치챈 걸까? 그래서 날 떠보시는 걸까? 아몬드 테스트로구나…! 다율이 과민반응을 하며 온갖 생각에 잠긴 때 권지하가 다율의 입에 아몬드를 쏙 넣어 주었다.

“좋아하잖아요. 왜 안 먹어요.”

권지하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다율은 그제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눈치챌 리가 없지. 아까의 나는 숲속을 걷는 평범한 다람쥐 1이었고 지금은 멀쩡한 사람 꼴이지 않은가. 그리고 배우님 역시 눈치챈 기색이 없다. 나를 평소처럼 대하고 있으니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아.

“아… 마, 맞아요. 저 <드셔본> 엄청 좋아해요!”

다율은 캔을 가져가 우적우적 견과류를 꺼내 먹었다.

“천천히 먹어요. 체할라.”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보며 웃었다. 다율의 신발은 여전히 피크닉 매트 바깥에 놓여 있었다. 권지하의 시선이 그 신발로 가는 것을 다율은 눈치채지 못했다.

***

도시락을 깨끗이 비운 두 사람은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들었다. 플레이리스트는 권지하 취향의 노래였는데 우아한 피아노 소나타부터 리드미컬한 재즈까지 주로 가사가 없는 노래였다. 잔잔한 음악을 듣고 있자니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가사가 있는 발라드곡이 하나 나왔다.

“어? 이 노래는 좀 튀네요. 다른 노래들하고 분위기가 달라요.”

“응. 맞아요. 이번 팬미팅에서 부르려고 골라 봤는데 어때요?”

“아아, 배우님이 고르신 곡이 이거구나.”

어느덧 데뷔 6주년을 맞이한 권지하를 위해 소속사는 공식 팬미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율 역시 매니저로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실무를 맡아서 공연대행사와 차근차근 행사를 꾸려나가는 중이었다.

팬미팅을 준비하던 권지하는 꼭 자신의 솔로 무대 시간을 갖고 싶다고 강조했는데 다름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해서 주변인들을 놀라게 했다. 데뷔 이래로 단 한 번도 노래 무대를 가진 적 없고 많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OST에 참여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 노래를 고르셨어요? 평범한 사랑 노래 같은데.”

“들려주고 싶어서요.”

“팬들한테요?”

“아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네?”

듣던 중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오늘 나 놀라게 하려고 날 잡았어?

다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권지하를 쳐다봤다.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다율을 쳐다보며 답했다.

“이 가사가 와닿더라고요. 너 하나만 눈에 들어온다. 자꾸만 네가 눈에 밟힌다. 이제는 너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시구나.”

“내 마음하고 너무 닮아서 이 노래가 딱이다 싶었죠.”

“….”

권지하가 노래 몇 소절을 따라 불렀다. 타고난 목소리가 낮고 그윽한 그였지만 노래로 들으니 상당히 감각적이었다. 가수 못지않은 노래 실력을 지닌 그를 보며 다율이 감탄했다.

“와. 노래 잘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권지하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주 뜨거운 애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부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배가 찢어진다는 관용구대로 배가 콕콕 아팠다.

…나도 한 번만 배우님의 연인이 되어 봤으면.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율은 노래하는 권지하의 옆모습을 보며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빌었다. 권지하가 자신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오늘 소풍 재밌었어요?”

“네. 엄청요.”

다람쥐로 변하질 않나 남의 사랑 타령을 노래로 듣고 배가 찢어지질 않나. 비록 고난이 많았으나 결론은 재밌었다. 권지하와 야외에서 햇살을 쬐고 바람을 맞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럼 집으로 갈까요?”

“네!”

두 사람은 자리를 정리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가던 도중 체증에 걸려 차가 느릿해졌다. 가다 서다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다율은 피곤해졌다. 오늘 난동을 부리며 숲속을 헤매느라 에너지 소모도 컸다.

“편하게 기대서 자요.”

권지하가 꾸벅꾸벅 조는 다율의 뺨을 쓸었다.

“음… 아몬드… 맛있….”

다율은 까무룩 의식의 끈을 놓았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 버린 것이다. 느지막이 동네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댈 때도, 권지하가 자신을 업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도 다율은 깨지 않았다. 그저 ‘아몬드’ ‘허걱’ ‘나는 지나가는 길이에요’ 같은 말을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권지하는 다율을 업은 채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안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다율의 몸을 침대에 눕혔다. 신발과 양말을 벗겨 주자 편안한지 다율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권지하는 큰대자로 뻗어 자는 다율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가볍게 씻은 다음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은은한 수면등만 켜고서 침대 옆 소파에 앉았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차기작으로 들어온 대본들이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지금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온 영화, 드라마 감독은 대강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일일이 그들에게 화답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회사 측은 미리 엄선한 대본만을 권지하에게 올려 보냈다.

그러면 권지하가 직접 작품을 골라 1년이고 2년이고 골몰하며 진득하게 작품을 만들어 냈다. 아무리 험한 곳이라 해도 로케 촬영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어려운 캐릭터도 공들여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게 권지하의 성공 비결이었다. 권지하는 절대 취미로 배우 일을 대하지 않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예계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자기애에 한참 취해 있었다. 거울만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3대 방송국 대상을 거머쥔 다음 흑상연예대상 및 흑룡영화제 대상을 모두 석권하기로.

내가 이렇게 잘났는데 국내 시장 정도는 평정해 줘야지. 그다음은 할리우드 정복이고. 칸 영화제는 거들 뿐. 실로 그의 야망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내 매니저는 나와 함께해야 해.

처음 마주친 순간 권지하는 알아봤다. 다율만이 자신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작고 귀여운, 그리고 가여운 다율은 자신의 속내를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권지하가 얼마나 시커멓게 썩은 속을 갖고 있는지 알면 후다닥 달아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러니 권지하는 인내해야 했다. 와우 기획의 변태식이 다율을 탐냈을 때도 다율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랑스럽고 작은 다율이 날아가 버릴까 겁이 나 화를 낼 수 없었다. 다율이 무서워하는 건 싫다. 다율에게 자신은 어디까지나 자상하고 다정해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

“으음… 배우님?”

“깼어요?”

“저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설마 배우님이 저 업고?”

“맞아요.”

“죄, 죄송해서 어떡해요. 정신도 못 차리고 잤네. 진짜 죄송해요.”

“아냐. 오늘은 매니저님 하자는 대로 다 하는 날이라니까.”

다율이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미안함 반, 피곤함 반이 묻은 얼굴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권지하는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의식하며 다율에게 다가갔다.

“잘 자길래 깨우기 뭐하더라고요.”

“너무 잘 놀았나 봐요.”

“소풍이 그렇게 재밌었어요?”

“네. 그럼요.”

권지하가 다율의 뺨에 손을 올렸다. 다율은 서늘한 체온에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손을 올려 권지하의 손을 감쌌다.

“배우님. 요즘 들어 체온이 더 낮아지신 거 같아요.”

“그런가요? 하긴 나도 그런 것 같았어요. 많이 차갑죠?”

“네. 저 좀 걱정되는데 병원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다율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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