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차가 막히지 않아 차는 서울숲까지 금방 도착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인적도 드물고 아주 조용해서 다율은 이 공간이 벌써 마음에 들었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도 키 큰 나무들이 만들어 낸 울창한 그늘도 모두 아름다웠다.
“자, 선글라스 씁시다. 누가 알아보면 곤란하니까요.”
“네.”
권지하가 다율에게 선글라스를 씌워 주었다. 사실 동그란 귀와 갈색머리가 트레이드마크라 겨우 눈 좀 가린다고 다율인 게 티가 안 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귀찮은 일을 방지하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했다.
“와. 배우님 선글라스 쓴 모습이 꼭 선글라스 모델 같아요.”
“이거 내가 광고하는 브랜드 맞아요.”
“아, 그렇구나.”
권지하도 선글라스를 끼고서 픽 웃었다.
둘은 되도록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을 찾기 위해 조금 걸은 후, 그늘 아래 피크닉 매트를 펼쳤다. 다율이 매트 위로 도시락을 올려놓자 권지하가 핸드폰을 꺼냈다.
“이 매니저. 사진 찍어요.”
“네. 좋아요.”
당연히 도시락을 찍자는 말인 줄 알고 다율은 부지런히 도시락을 열었다. 그러나 권지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아니, 우리 사진 찍자고요.”
“저희 사진이요? 아… 배우님 찍어드릴까요?”
평소 공식 팬 카페와 SNS를 관리하면서 권지하 사진 찍기라면 도가 튼 다율이었다. 그가 자주 쓰는 필터를 찾아 세팅하려는데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독사진 말고 우리 둘이 같이 찍어요.”
“헉.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뭐 있어요. 얼른 찍어요.”
다율은 가깝게 다가와 볼을 맞댄 권지하가 조금 부담됐으나 그 말은 쏙 삼키고 심장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심장은 의리가 없는 법이라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왜 이렇게 굳었어요. 웃어요.”
“아 죄… 죄송.”
“얼굴이 잔뜩 굳었네.”
권지하가 다율의 입가를 쓸었다. 섬세한 손길에 다율은 짜릿함을 느꼈다. 아이고야, 나 죽네.
“찍을게요!”
차라리 빨리 찍고 말자 싶어 다율은 서둘러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박제되었다.
“둘 다 잘 나왔다.”
누가 봐도 권지하는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에 우아한 미소를 띠었고 다율은 얼굴이 빨개져 당황한 표정 그 자체였으나 권지하의 눈에는 그마저도 귀여웠다.
“이 매니저 엄청 귀여워. 확대해서 볼래요?”
“귀, 귀엽다니요.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여기 눈 밑에 애굣살 좀 봐. 뺨도 매끈매끈 통통하고.”
권지하가 굳이 사진을 확대하려 들었다. 다율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히 귀엽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더러 귀엽대. 이대로 죽어도 좋아.
다율이 날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권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를 깜빡했네. 쿨러를 차에 놔두고 왔어.”
“어, 그렇네요. 제가 가져올까요?”
“아냐. 오늘은 매니저님의 날이니까 내가 갔다 와야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얼른 다녀올게요.”
“네!”
권지하가 주차장 쪽으로 멀어져 갔다. 다율은 매트에 드러누워서 콧노래를 불렀다.
아. 평화롭고 행복하네. 바람도 햇살도 너무 따사롭다.
다율은 타고나길 동물이었으므로 이런 숲속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차오르고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자기만의 흥에 취했을 때였다. 눈을 감고 있느라 몰랐다. 아주 자그마한 꽃잎이 바람에 날려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짝사랑도~ 할 만하구나~”
멋대로 개사한 노래에 과몰입하고 있던 다율의 얼굴 위에 꽃잎 여러 개가 내려앉았다.
“엥?”
갑자기 얼굴이 간지러워진 다율은 손으로 후다닥 얼굴에 붙은 것들을 떼어내려 했다. 그런데 보통 꽃이 아니었는지 코가 간질간질해졌다.
“후에… 후에….”
아, 안 돼. 여기서 다람쥐로 변하면 곤란하다. 진짜 여기서는 아니잖아.
다율이 식겁하는 그 순간 커다란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후엥치!”
그와 동시에 선글라스와 티셔츠, 반바지, 양말이 폭삭 주저앉았다.
“끼잉….”
다람쥐가 되어 버린 다율은 패닉에 빠졌다. 이를 어쩜 좋아. 배우님이 오기 전에 빨리 인간으로 변해서 옷 입어야 하는데. 배우님이 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다율이 머리 빠개지게 고민을 하는데 이쪽으로 다가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쿵. 쿵. 사람의 발소리였다.
인간일 때보다 작은 다람쥐인 지금이 훨씬 지표면에 가깝기 때문에 다율은 진동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권지하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고 있었다.
으악. 배우님이 오고 계셔…! 나, 나 어떡하지. 지금 인간으로 변할 틈이 있을까? 만약 타이밍 조절에 실패하면? 아니면 성공했다 하더라도 알몸 상태에서 배우님과 맞닥뜨리면? 스트립쇼를 펼치고 있는 날 뭐라고 생각하실까? 잘 봐줘야 숲속의 변태 정도로 생각하겠지?
다율은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필 잔디밭이라 근처에 있는 지형물이라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조경용으로 비치해 놓은 큰 바위 하나가 전부였다.
저거라도 이용해 보자. 다율은 펼쳐져 있는 옷가지를 작은 앞발 사이에 끼워 냅다 뛰었다. 옷가지를 바지런히 바위 뒤로 물어다 나르니 어느덧 권지하가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율은 냅다 나무가 울창한 숲속 방향으로 튀었다.
“어라? 어디 갔어.”
쿨러를 가지고 피크닉 매트로 돌아온 권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다율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리에 핸드폰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고 신발은 매트 바깥에 벗어둔 상태였다. 선글라스 역시 아무렇게나 매트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신발 없이… 사라졌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중에 권지하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네.”
그가 전화를 받기 위해 매트 위에 앉았다. 다람쥐 다율은 그의 뒷모습을 근처의 나무 사이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아, 망했다. 배우님하고 옷을 숨긴 바위가 너무 가까워. 지금 성급하게 바위에 접근했다가는 배우님한테 들킬 것 같네.
다율은 작은 발을 동동 굴렀다. 언제 권지하가 다시 자리를 뜨려나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다율의 둥근 귀에 권지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날짜만 잡으면 될 것 같아요.”
날짜? 무슨 날짜? 다율은 권지하 쪽으로 청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말소리가 더욱 뚜렷하게 들렸다.
“예식장 섭외는 아직이긴 해요. 그렇지만 그쪽도 저랑 생각이 통하니 걱정 없어요.”
뭐?! 예식… 예식장? 딴딴따따- 딴딴따다- 하면서 남녀가 결혼하는 바로 그 예식장을 말하는 거야?
다율은 순간 핑 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권지하는 가까운 사이인 누군가와 결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혈압이 치솟았다. 짝사랑하는 입장에서 비참하기도 했고 도대체 좋아하는 사람과 언제 저렇게 진도를 뺐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섭섭했다.
“네?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요? 음… 간단하게 말하려니 어렵네요.”
다율의 자그마한 앞발이 떨렸다. 이 뒤에 이어서 나올 말들이 너무나 겁나고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통화를 엿듣는다면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이 두려움을 앞섰다.
다율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권지하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신다면. 음, 일단 귀여워요.”
다율은 잔디를 조심스레 밟으며 천천히 권지하의 뒤로 다가섰다.
“제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귀여워요.”
뭐라고. 귀여운 사람? 세상에, 나랑 전혀 다르잖아.
다율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늠름하고 씩씩하다고 믿으며 스물두 해를 살아왔다. 사나이다운 면모를 보이라는 조부의 매서운 가르침 아래 성장한 탓이었다.
그런데 권지하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귀여운 사람이란다.
나는 처음부터 그의 이상형이 아니었구나. 다람쥐 다율의 커다란 눈망울에 습기가 어렸다. 이쯤 되니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기도 했다.
원래 짝사랑이란 이런 건가? 혼자 들떠서 구름까지 방방 날아갔다가 땅바닥으로 추락하기를 거듭-
“깩.”
우울한 생각에 젖어 있던 다율이 퍼뜩 깨어났다. 뒤를 돌아본 권지하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 것이다.
“어. 다람쥐다.”
다율은 그대로 돌이 되어 굳었다. 발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라고 뇌가 명령했으나 발 네 개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깨… 깩.”
“…숲이라서 다람쥐가 사나 보네.”
권지하는 다람쥐의 자그마한 머리와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풍성한 꼬리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다율은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망설였으나 몸이 굳어 쉽지 않았다.
권지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다람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아래턱을 문질렀다.
“흐음… 겁먹지 마.”
그가 다람쥐에게 손을 뻗었다. 다율이 움찔했지만 권지하는 그대로 다람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넌 색깔이 좀 특이하네. 금색이야.”
여느 다람쥐처럼 나무 색깔이 아닌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털을 보며 권지하가 피식 웃었다. 다율은 속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고민이 됐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권지하 입장에서 자신은 그저 지나가는 다람쥐 1일 뿐. 인간 이다율과는 무관해 보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너무 쫄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거 먹을래?”
권지하는 다율이 간식으로 싸 온 종합견과류 <드셔본> 뚜껑을 열어서 아몬드를 꺼내더니 다율에게 하나 건넸다.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아… 평범한 다람쥐인 척하려면 이걸 받아먹어야 자연스럽겠지?
다율은 숲에서 마주친 평범한 다람쥐 1을 연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날름 아몬드를 물었다. 두 앞발로 아몬드를 쥐고 사각사각 아몬드를 갉아 먹으니 권지하가 하나를 더 줬다.
뇸뇸. 역시 <드셔본>의 아몬드는 끝내줬다. 다율은 어느새 정신을 놓고 권지하가 주는 아몬드를 여러 개 해치웠다. 그러느라 권지하와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너 사진 하나만 찍자.”
권지하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율은 입가에 아몬드 부스러기를 묻힌 채 카메라 렌즈를 올려다봤다. 찰칵. 다람쥐 다율의 멍한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