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26화 (26/95)

26화

“2차 가시죠! 제가 삽니다.”

“권 배우님. 같이 가요.”

PD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2차를 요구했다. 몇몇 스태프들도 권지하의 소매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권지하는 정중하게 그들의 손짓을 사양하며 말했다.

“전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요. 그렇죠, 이 매니저?”

“아, 네? 아… 음. 있어요. 얼른 가야 돼요.”

스케줄 따위는 없었지만 눈치로 알아들은 다율이 적당히 권지하를 빼냈다. 아쉬워하는 제작진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나온 두 사람은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 곧이어 기사가 도착하자 둘은 뒷좌석에 나란히 올랐다.

“아, 좀 춥네.”

권지하가 뜬금없는 소리를 꺼내며 다율의 어깨에 기댔다. 날은 이제 6월이고 창문도 다 닫혀 있는데 춥다니. 다율은 권지하가 걱정됐다.

“괜찮으세요? 많이 추워요?”

“엄청… 나 오늘 컨디션 안 좋은가 봐요.”

“어떡하지. 기사님, 빨리 가 주세요.”

“위험하니까 운전은 천천히 하세요.”

권지하가 대리기사에게 가볍게 웃어 보인 후 다율을 품으로 끌어들였다.

“이러고 있음 되잖아요. 안 그래?”

“아… 그, 그렇긴 한데.”

대리기사님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다율은 걱정이 되고 눈치가 보였다. 권지하는 다율의 목덜미와 귓바퀴를 지분거리며 다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웃었다.

***

집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욕실에서 씻었다. 다율은 여름이었지만 따끈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더운물로 샤워를 마친 다음 머리를 보송하게 말렸다. 그러는 동안 권지하는 물을 최저 온도로 틀어 놓고 냉수마찰을 실시했다.

각자 극한의 온도를 체험한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다율은 엎드려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뭐 봐요?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

“아까 팬 카페에 배우님 셀카 올렸거든요. 제작 종료회에서 찍은 거요. 그거 반응 좀 살피고 있어요.”

“팬들이 뭐래요?”

“배우님이 너무너무 잘생겼대요!”

마치 자기가 칭찬받은 양 다율은 흐뭇하게 웃었다. 권지하 역시 그런 다율을 보며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드라마 촬영이 무사히 끝났네요. 이게 다 이 매니저 덕분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로 선물 하나 해 주고 싶은데요. 매니저님은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갑작스러운 권지하의 물음에 다율은 눈을 크게 떴다.

“네? 선물이라니요. 저는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이 매니저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촬영 일도 그렇고 내 체온 유지도 그렇고요.”

권지하가 자연스럽게 다율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대신 그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었다. 다율은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손이 안쓰럽고 또 애틋했다.

“배우님….”

“그러니까 말해 봐요. 갖고 싶은 것 없어요?”

“어… 어떤 걸 말씀드려야 할지.”

“집이랑 차 빼고 다 돼요.”

“하하. 그건 당연하죠.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나한테는 한두 푼이야. 하지만 집은 네가 따로 나가 사니까 안 되고 차는 네가 타고 도망갈까 봐 안 돼.

권지하는 멋쩍게 웃는 다율의 손을 꼭 쥐며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어서 말해요.”

“사실… 선물이라기보다는 아… 이게 먹히려나.”

다율에게는 오래전부터 꿈꿔 오던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다람쥐가 되어 권지하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권지하와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가는 것이었다. 물론 권지하는 도토리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언젠가 둘이서 손잡고 소풍을 간다면. 조용한 숲속에서 풀 내음을 맡으며 따사로운 햇살 아래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율은 때때로 그런 나날을 꿈꿨다. 인기 연예인과 매니저라기보다는 일상을 탈출해 자유로워진 두 사람을.

하지만 요새 너무도 바쁘고 잘나가는 권지하였다. 거절당한다 해도 너무 상처 입지는 말아야지. 다율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갖고 싶은 것보다는요… 사실 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음… 배우님이 안 내키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진짜로요.”

“내가 매니저님 소원 하나 못 들어줄까 봐? 뭐든 말만 해 봐요.”

“저 배우님이랑 같이… 소풍 가고 싶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다율은 자신의 소원이 너무나 하잘것없고 미천하다고 느껴 바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싫으시구나. 싫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저는 괜찮아요. 바쁘시잖아요.”

황급하게 변명하는 다율과 달리 권지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다율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아주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왜 거절할 거라 생각해요. 나는 한밤중만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같이 가고 싶은데.”

얼굴에도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진짜요?”

“그럼요.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요? 말 나온 김에 당장 내일은 어때요. 내일 스케줄 없잖아요.”

“헉! 너무 좋아요!”

이렇게 기쁜 일이. 다율은 신이 나서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굴러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황금다람쥐 가문 9대 독자의 체면을 지켜야 했기에 그냥 방실방실 웃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권지하의 품에 안겨 잠자리에 들어서도 소풍에 대해 뭉게뭉게 상상을 했다.

내일 뭐 싸 가지? 냉장고에 장 봐 놓은 게 뭐가 있더라. 그중에 도시락 할 만한 게 있던가? 내가 배우님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드리고 싶은데….

“안 자요, 이 매니저?”

꼬물거리는 기척에 깼는지 권지하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서 다율을 가까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앗 죄송해요. 얼른 잘게요.”

소풍 간다고 신나서 잠을 설치다니. 어른스럽지 못해.

다율은 급하게 반성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권지하의 품에서 피어오르는 머스크 향이 향기로웠다.

***

아침에 일어난 다율은 커튼을 열었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좋은 날씨는 처음인 것처럼 날이 맑았다. 새털구름이 몇 점 하늘에 둥둥 떠 있고 햇살은 밝게 반짝였다.

오늘은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아. 신이 난 다율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다. 급한 마음에 머리도 대충 말린 그는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다행히 얼마 전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이 장을 봐 주신 터라 먹을 것이 많았다. 이 정도면 도시락 싸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다율은 치즈, 청포도, 딸기, 식빵과 참치. 그리고 주먹밥 재료를 꺼냈다. 비록 요리 실력은 좋지 않았지만 권지하를 위해 샌드위치와 주먹밥을 빚어 주고 싶었다. 안에는 자신의 정성과 사랑을 듬뿍 넣어서 말이다.

“이렇게 재료를 챱챱 다지고… 음. 마요네즈는 이만큼 넣으면 되나?”

커다란 주걱을 든 다율은 참치에 마요네즈를 한 통 가까이 쏟아부었다. 그리고 야채와 참치, 마요네즈, 후추와 소금을 으깨듯 섞었다. 마요네즈가 너무 많아 재료가 질척였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본인이 만들면서도 의문이 들어 다율은 식빵에 참치 샐러드를 끼워 넣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매우 못생긴 데다가 느끼해 보이는 샌드위치가 여러 개 탄생했다. 다율은 그래도 먹으면 맛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 혼자 박수를 치고 다음 메뉴로 넘어갔다.

“주먹밥은 상대적으로 쉬울 거야.”

밥에 깨와 참기름을 미친 듯 많이 부은 다음 다율은 멸치볶음과 호두를 부수어 밥과 대강 뭉쳤다. 동그랗게 빚어지지는 않았으나 흐린 눈을 하고 김 가루를 0.01g만큼 부수어 굴렸다. 해조류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는 냄새만큼은 고소했기 때문에 맛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율이 의기양양하게 주먹밥을 빚고 있는 사이 권지하가 문을 열고 나와 다율의 뒤로 다가왔다.

“배우님. 일어나셨어요?”

“매니저님, 도시락 만드는 중이었구나.”

“네. 제가 직접 준비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어디 볼까요.”

권지하는 엉망이 된 조리대 위 처참한 몰골의 무엇인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한 다율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부드럽게 물었다.

“와. 맛있겠다.”

“그렇죠? 잘 만들었죠?”

“근데 이 밥뭉텅이는… 뭐예요?”

“주먹밥이요!”

“아… 그렇구나.”

저게 주먹밥이야? 동그랗지도 세모나지도 네모나지도 않은데…?

권지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다율이 만든 주먹밥을 하나 집어 먹었다. 과한 깨소금과 참기름, 호두의 향 때문에 쌀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 엄청 맛있어요.”

“정말요? 다행이다. 배우님이 좋아해 주셔서 기뻐요.”

다율은 해맑게 웃으며 못생긴 주먹밥을 도시락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권지하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다율을 도왔다. 역시 프로다운 연기였다.

알록달록 과일과 디저트, 치즈를 넣어 3단 도시락을 완성한 그들은 쿨러를 챙겼다. 무알콜 샴페인과 딸기주스, 사과주스, 탄산수, 그리고 다율을 위한 호두맛 두유를 챙기니 쿨러가 제법 묵직했다.

권지하는 오늘 하루는 다율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주겠다며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드라이브에 어울리는 음악까지 준비해 온 정성에 다율은 감동했다.

“노래 너무 좋아요.”

“좋아해 주니 고마워요.”

“바람도 너무 시원해요. 우리 문 열고 달려요.”

“어떤 문?”

“위 문이요!”

둘은 오픈카 뚜껑을 열고 질주했다. 다율은 평일의 뻥뻥 뚫린 도로를 달리며 해방감을 만끽했다. 매니저로서 일을 할 때는 마포대교를 건너 차 많은 상암동과 여의도만 다니며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놀러 가는 길. 오늘 하루만큼은 매니저 이다율이 아닌 휴식을 즐기는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와 바람이 다 저를 위한 선물 같았다. 권지하 역시 외로웠던 삶에 선물처럼 다가왔듯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좋은 생각이요.”

“나돈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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