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25화 (25/95)

25화

“아이쿠, 죄송합니다. 우산 더 높이 들게요.”

“아니에요. 내가 들게요.”

“우산은 매니저가 드는 거예요. 자, 이것 보세요. 괜찮죠?”

다율이 한껏 팔을 뻗어 우산을 높게 들었다. 권지하가 몸을 구부정하게 만들고 걸으면 그럭저럭 괜찮을 정도의 높이였다.

“끙, 끙.”

다율은 걷는 내내 팔이 아픈지 낑낑댔다. 권지하는 차마 웃음을 견디지 못했다.

“그만해요. 내가 들게.”

“어?!”

권지하는 다율에게 우산을 빼앗은 다음 다율의 손이 닿지 못할 정도로 높이 우산을 들어 올렸다. 다율이 점프하며 손잡이를 터치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만 포기하고 갑시다.”

다율은 하는 수 없이 권지하가 씌워 주는 우산 아래 몸까지 감싸인 채로 호텔 부지를 벗어났다.

“어머. 권지하다!”

“지하 오빠! 여기 좀 봐 주세요!”

호텔 정문에는 이미 대포 카메라 부대와 함께 일반인 구경꾼들이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포진해 있었다. 요새 제일 잘나가는 배우 권지하. 그리고 그의 키링 같은 매니저 이다율을 한꺼번에 보다니. 그것도 둘이 부둥켜안고 한 우산을 써?!

대포 카메라를 든 사람이나 폰카를 든 사람이나 이 찬스를 놓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대박. 진심 대박이다. 미치게 잘생겼어. 매니저는 너무 귀엽고.”

“와 미친. 당장 프리뷰 올려야겠네. 이거는 프리뷰계의 새 역사야. RT 터지겠다.”

홈마들이 유난을 떨었다. 여기저기서 ‘잘 어울린다’, ‘귀여운 한 쌍이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와 다율은 민망했다. 권지하의 품을 벗어나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율이 슬그머니 멀어질 때마다 권지하는 자꾸 이러면 길에서 확 끌어안아 버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했다.

“저기 배송 기사님 계시네요.”

인파를 뚫고 민망함을 버틴 끝에 겨우 케이크 배송 기사와 마주칠 수 있었다. 다율은 보통 생일 케이크의 대여섯 배 높이인 큰 상자를 안아 들고 배송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무겁지 않아요?”

“들 수 있어요. 근데 조심히 걸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내가 또 우산 씌워 줘야겠네.”

권지하가 씩 웃었다. 다율은 이번에야말로 손이 없었으므로 권지하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다시 호텔로 되돌아갔다.

연회장으로 들어가자마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의 주인공 권지하 씨 오셨네요!”

스태프들과 조연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요란스럽게 축하를 퍼부었다. 권지하는 열 개 가까이 꽃다발을 받아 들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촬영팀, 감독 가리지 않고 모두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언제 외웠는지 막내 제작진들의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어 감동을 크게 받은 사람들도 제법 됐다.

“오늘 윤혜미 씨는 몸이 안 좋아서 참석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저랑 권지하 씨랑 셋이 한번 식사나 하죠.”

“그렇게 하죠.”

감독의 말에 무대 위에 케이크를 세팅하던 다율의 귀가 쫑긋 섰다. 윤혜미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사실이거니와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한다는 말도 신경이 쓰였다.

주연끼리니까 만날 수 있는 거긴 한데. 너무 신경 쓰인다.

다율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때 권지하가 다율을 불렀다.

“이 매니저. 이리 와서 앉아요.”

“네?”

“내 옆에 앉아서 식사해요.”

“아… 저는.”

“얼른.”

원래 다율이 자리 배치를 짰을 때 저 자리는 윤혜미의 자리였다. 다율이 망설이는 걸 알았는지 권지하가 직접 일어나 다율에게 다가왔다.

“이 매니저가 옆에 있어야 밥이 잘 넘어갈 것 같아. 응?”

권지하가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을 담은 채 다율을 내려다보았다. 다율은 멍하니 그의 미모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다율은 권지하의 옆자리로 걸어갔다. 제작진들이 다율에게 알은체를 하며 예능을 잘 봤다, 이번 시골 예능도 기대 중이다, 그렇게 끼가 많은 줄 몰랐다며 칭찬을 퍼부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하는 거 없어요. 그냥 배우님만 따라다니는 거예요.”

“겸손하기까지. 근데 연예인 한다는 소문 있던데 사실이에요? 뭐… 오디션 보고 그랬다는 이야기까지 있던데.”

미술 감독의 말에 다율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누가 그래요? 그런 일 없습니다.”

“루머구나. 알겠어요. 너무 놀라니까 미안하네.”

미술 감독이 머쓱해하는 틈을 타 다율은 권지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혹시 배우님이 들으셨을까? 내가 오디션 보고 다녔다는 소문이 배우님 귀에도 들어갔으려나? 어쩌면 와우 기획 변태식 이사가 다른 관계자들한테 이야기를 뿌리고 다녔을지도 모르지.

내가 배우님을 떠나려고 한 줄 알면 많이 섭섭해하실 텐데. 며칠 전에도 나를 끌어안으면서 평생 자기 매니저를 해 달라,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셨잖아. 나를 전속 매니저로 쓰시려는 것 같은데… 내가 타 회사 오디션을 보러 다녔으니 자칫하면 배신감을 느끼실 거야.

갑자기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면서 다율은 초조함을 느꼈다. 그런데 테이블 밑으로 슥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권지하의 손이었다.

“…?”

눈을 돌려 권지하를 쳐다보자 권지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수한 얼굴로 다율을 응시했다.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남자가 맑은 눈을 하자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다율은 다시 한번 권지하에게 반하며 그가 자신의 손을 강하게 조여 오는 대로 손을 맡겼다.

서늘하고 단단한 손마디가 다율의 보드라운 손을 쓰다듬다가 꽉 쥐었다가를 반복했다. 다율은 그저 손만 잡혔을 뿐인데 전신을 권지하에게 사로잡힌 착각을 느꼈다. 권지하는 엄지로 다율의 손등을 문지르며 물었다.

“너무 차갑진 않아요?”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다율은 웃으며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런데 권지하가 더욱 강한 악력을 쏟으며 다율의 손을 옥죄었다.

“배우님.”

다율이 작게 소곤거리자 권지하 역시 작게 화답했다.

“다율 씨 왼손잡이잖아요.”

“그래서요?”

“이러고 먹자고.”

“네?”

다율은 황당함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잘 손질되어 있었고 스테이크마저도 한입 크기로 썰려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한 손으로만 식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 양손으로 먹을래요.”

쓱. 다율은 권지하의 손아귀에서 말랑한 손을 빼내며 해맑게 웃었다. 권지하도 피식 웃으며 다율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잘 정리해 주었다.

“와. 너무 맛있었다.”

후식으로 마련된 까눌레와 셔벗까지 해서 모든 요리 서빙이 끝났다. 이제는 감독의 일장 연설과 권지하의 소감을 들을 차례였다. 다율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케이크를 살피고 현수막의 상태도 살핀 뒤 먼지 묻은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한편 조연 배우 천재욱은 화장실 앞에서 시시껄렁한 문자를 주고받던 중이었다.

[내 말대로 주변 살펴봤어? 수인 같은 놈 안 보이냐고.]

탈퇴한 전 멤버이자 현재 수인 헌터로 일하는 친구의 메시지였다.

[야, 박중호. 세상일이 그렇게 뚝딱 하고 쉽게 해결되는 줄 아냐? 막말로 인간인지 짐승인지 몸속을 뒤져 볼 것도 아닌데 겉으로 어떻게 구분하냐고. 연예계에 있으면 뭐 해, 알아봐야 돈을 벌지.]

천재욱은 벽에 기대며 다리를 불량하게 떨었다. 드라마 내내 권지하와 외모 비교만 당하다가 분량도 개미 눈곱만큼 줄어들며 하차했다. 나름 외모와 스타성에 자신감이 있는 그로서는 자존심에 크게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에라이. 이래 가지고는 새로운 스폰도 물 건너가겠어. 차라리 수인이나 잡으러 다니는 게 낫겠는걸. 차 바꾸고 싶은데… 아 빚 독촉도 자꾸 들어오고.

천재욱이 구시렁거리는 와중 다시 친구의 답장이 도착했다.

[방송국이나 소속사 건물에 갑자기 못 보던 동물이 나오면 십중팔구 누군가의 수인 본체라고 봐야 돼. 보통 그걸로 역추적해서 많이 잡아.]

엇. 그러면 혹시 내가 저번에 기획사에서 봤던 그 쥐새끼도?

천재욱의 머리에 사람 옷을 질질 끌고 가던 쥐 같은 동물이 떠올랐다. 그는 쓰읍- 입맛을 다시며 친구에게 답장했다.

[야. 나 얼마 전에 기획사 건물에서 쥐 봤어, 쥐. 우리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건물에서 쥐가 나온 적은 없지 않냐? 심지어 사람 옷가지를 물고 가고 있었는데 이거 확률 있어?]

[바로 그거야. 완전 수상한데? 좀 알아봐야겠다. 혹시 그 쥐랑 관련 있어 보이는 사람 없어?]

관련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

천재욱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찰나였다. 화장실에서 다율이 나왔다.

어라?

마치 와우 기획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의 데자뷔 같은 느낌에 천재욱은 손가락을 튕겼다.

이다율이 그 쥐새끼랑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어쩌면 이놈이? 일단 한번 찔러나 보자. 아니면 말지 뭐.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건들건들 다율에게 걸어갔다.

“야, 너. 슈퍼짱 합류하기로 한 거 취소됐다며?”

그의 말에는 비꼬는 투가 가득했다. 불쾌한 도발에 다율이 인상을 썼다.

“왜 반말하세요? 그리고 저 슈퍼짱 합류하기로 한 적 없어요.”

변태식 이사에게 오디션을 보고 탈락 문자를 받은 것은 맞으나 특정 그룹에 합류하기로 이야기된 적은 없었다. 다율은 난데없이 물꼬를 튼 이 대화가 껄끄러웠다.

“내가 다 아는데 무슨 거짓말이야. 너 우리 회사 와서 슈퍼짱 되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갔다던데. 소문 쫙 깔렸어.”

“무슨 소리세요. 그런 일 없었다니까요.”

그런 황당한 루머가 퍼지다니. 다율은 불쾌했다. 스태프들 사이에 오디션 썰을 퍼트린 자가 바로 이 천재욱일 것이라는 직감도 들었다.

“뭐 어찌 됐든 슈퍼짱 못 들어온다니까 아쉽네. 내가 거기 리더인 건 알지?”

“몰라요.”

“어떻게 그걸 몰라? 나처럼 핫한 배우 겸 가수를… 허, 너도 참 별나다.”

천재욱이 다율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얼굴을 슥 들이밀었다.

“그나저나 나중에 시간 좀 내주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권지하 뒤만 쫓아다니지 말고 나랑도 놀아줘.”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다율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또 우리 배우님한테 권지하라고 함부로 부르시네요? 그리고 저 천재욱 씨랑 밥 먹을 시간 같은 거 없어요.”

다율은 또박또박 말한 다음 쌩하니 천재욱을 지나쳐 갔다. 혼자 남은 천재욱은 허허 웃더니만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의심 가는 놈 하나 있어. 일단 찔러 봄.]

그는 문자를 보낸 다음 비열하게 웃었다. 잘하면 돈 좀 만지겠는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