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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23화 (23/95)

23화

“배우님. 손 너무 차가워요.”

“응. 오늘 좀 그렇네요.”

“평소보다도 훨씬 얼음장 같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피곤한가 봐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병원에서 그랬거든요. 컨디션 따라서 체온이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정말요? 요새 너무 무리하셨나?”

다율이 눈을 글썽이며 염려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권지하는 말없이 다율을 쳐다보다가 다율의 얼굴을 감쌌다.

“어때요. 진짜 차갑죠?”

“네. 너무 차가워요. 어떡해….”

곤란해하는 다율에게 권지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이부자리 위였던 다율이 엉덩이걸음으로 물러났다.

“배우님?”

권지하가 다율의 양 어깨를 차례로 잡았다. 악력이 너무 강해 다율은 마치 온몸을 포박당한 기분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우리 매니저한테 체온 좀 나눠 받으려고요. 내가 지금 너무 춥거든.”

“아 그러시면… 누울까요?”

“오늘은 이렇게 눕자. 다리 아프잖아.”

권지하가 다율을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다율의 양 손목을 꽉 쥐어 이부자리 위로 고정했다. 커다란 그림자가 다율의 위에 드리워졌다. 다율은 권지하가 너무나 아름답게 웃고 있었기에 홀린 듯 그가 하는 대로 자신을 내맡겼다.

권지하의 몸이 서서히 다율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빈틈없이 다율을 껴안았다.

“아.”

서늘한 몸이 자신을 칭칭 동여맨 게 꼭 뱀이 제 몸을 조이며 똬리를 튼 기분이었다. 목덜미를 더듬는 손끝도 가슴을 쓸고 내려가 허리에 안착하는 손길도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나 묘하게 속박당하는 느낌이었다.

“배우님…?”

“나는 있죠. 이 매니저가 너무 절실하게 필요해.”

“배우님….”

“나 떠나지 않을 거죠?”

“…어… 그거야….”

“왜 이렇게 대답이 느릴까, 우리 매니저는.”

권지하가 다율을 꽉 끌어안았다. 숨 쉬기도 어려울 만큼 강하게 몸을 밀착하고서 권지하는 다율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읏!”

간지러움과 동시에 소름이 끼쳤다. 다율이 가볍게 버둥댔으나 권지하는 체중과 완력으로 다율을 제압했다. 그러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매니저 그만둘 생각 없죠?”

“가… 갑자기 그건 왜요.”

“앞으로도 내 매니저 해 줄 거라고 믿어요.”

다율은 속이 뜨끔했다. 마치 자신이 도망치려 했던 속셈이 꿰뚫린 것만 같아 겁도 났다.

배우님이 내 오디션 소식을 아실 리 없는데. 왜 이렇게 무섭지? 마치 다 알고 물어보시는 것만 같아.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그래.

“평생 내 매니저 해요. 알았지?”

“아… 알겠어요. 근데 배우님 너무 몸이 차가우세요. 우리 난방 틀까요?”

다율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물었다. 시골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이 되자 선선한 것도 사실이었고 권지하의 몸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은 가볍게 난방을 틀고 자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이 어색한 자세를 탈피하고 싶었다.

배우님이 위에서 껴안으니까 기분이 너무 이상해…!

“으음. 내가 지금 추운 건 사실인데… 난방은 별로야.”

“왜요? 많이 추우시니까 난방 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것보다는.”

얼음 같은 손길이 다율의 허리와 골반을 가볍게 쓸었다. 다율이 당황한 사이 손이 스윽 하고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다율은 놀라서 히익거렸다.

“배, 배우님! 왜 손을 넣으시는 거예요!”

“오늘은 그냥 껴안고 자는 걸로 부족할 거 같아요.”

“네?”

“옷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에는 한계가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 한번 탈의하고 잠들어 봐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다율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오, 옷을 어떻게 벗어요.”

“왜? 건전한 의미인데. 내가 이렇게까지 추워하는데 전담 매니저란 사람이 옷 하나 못 벗어 주나요?”

권지하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악의 없고 꾸밈없는 눈빛에 다율은 혼란을 느꼈다. 자신만 불온한 생각을 하는 건가 양심에 찔리기도 했다.

“난 그냥 우리 매니저 체온을 느끼고 싶은 것뿐인데….”

속삭이는 목소리는 동정심을 이끌어 내기 충분했다. 다율은 자신의 가슴에 기대 오는 권지하가 너무나 가여웠다.

그래. 이 사람은 환자야. 내 배우이고 내가 지켜 주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나 배우님의 핫팩으로 고용된 처지란 걸 잊지 마. 이건 불순한 목적이 아니라 체온 전달식에 불과하다!

“알겠어요, 배우님. 저 벗을게요.”

다율은 몸을 일으켜 셔츠 단추를 풀려 했다. 이까짓 체온, 자신에게는 남아도는 것이니 권지하에게 팍팍 나눠 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깐만.”

권지하가 불현듯 다율의 몸짓을 저지했다.

“왜요?”

“…내가 벗길래.”

“예?”

권지하가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다율의 첫 번째 단추를 툭 풀었다. 다율의 얼굴이 화르륵 불탔다.

“배, 배우님!”

“가만히 있어요.”

권지하의 섬세한 손길은 섬찟한 느낌을 줬다. 마치 눈으로 빚고 얼음으로 마무리한 듯 권지하의 손은 차가웠다. 다율은 오들오들 떨며 그의 손길을 꾸역꾸역 받아냈다.

두 번째, 세 번째 단추가 차례로 열렸다. 그런 다음 권지하가 다율의 옷깃을 양옆으로 벌리자 가느다란 목덜미와 늘씬한 쇄골이 무방비하게 노출됐다.

다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권지하를 쳐다만 봤다. 마치 의지할 데라고는 권지하밖에 없다는 듯 그의 눈빛이 연약하게 떨렸다.

“…이, 이제 어떡해야 돼요?”

항상 기본적인 상하의는 걸치고 잤기에 권지하에게 맨몸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겨우 이만큼의 노출에도 다율은 면역이 없었다.

왜 내 목덜미에 이렇게까지 시선을 두시지…?!

다율은 손을 들어 목을 가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배우님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체온을 듬뿍 나눠 주기로 약속한 상황.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읏.”

차가운 손이 예고 없이 다율의 목을 어루만졌다.

“너무 차가워요.”

“미안. 오늘따라 내 손이 차지?”

“으응…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따뜻…하게, 히익.”

권지하를 품어 주려던 다율은 기겁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거칠 것 없이 다율의 쇄골 위를 유린했기 때문이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길게 뻗은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그 아래의 미묘한 부위를 손끝으로 쓸다가 손바닥으로 덮기를 반복했다.

“으…윽!”

“조금만 참아 줘요. 나 위해서 그럴 수 있지?”

권지하가 다율의 귓가에 찬 입술을 붙이며 소곤거렸다. 다율은 이 상황이 묘하게 무서웠다. 자신이 평소 알던 배우님의 몸과 얼굴이 맞고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나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체온을 나눠 주겠다고 나선 것은 저였으니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렵다. 그건 바로 지금까지 보지 못한 표정 때문이었다. 다율의 눈에 지금의 권지하는 마치 쥐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장난을 치는 고양이 같았다.

무서워.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 정말 우리 배우님 맞아?

“배, 배우님.”

“너무 추우니까 자제가 안 되네. 미안.”

“으… 으읏.”

손길이 한층 대담해졌다. 마침내 가슴께에 있는 단추에 마수가 뻗쳤다. 다율은 울먹였다.

“아… 배우님.”

문제는 이 차가운 손길이, 평소와 달리 거친 배우님이 싫지 않다는 데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좋았다. 배우님이 저를 더 대담하게 만져 주었으면 했다.

다율은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았다. 배운 것 하나 없고 여태 짝짓기 한번 없이 살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동물이었기 때문에 본능이 잘 발달한 상태였다.

사회적인 눈치는 좀 많이 모자랐지만 적어도 이런 쪽으로는 제 상태를 눈치채는 데 모자람이 없었단 뜻이다.

이대로는 안 돼. 여기서 한 치라도 더 내려오면 옷을 싸그리 벗게 돼! 그러면 내가 이상한 반응을 보여 버릴 거다. 큰 망신살이 뻗칠 거야!

“배배배배배배, 배우님.”

다율이 다급하게 권지하를 불렀다. 권지하가 숨을 몰아쉬며 다율의 머리 양옆으로 손을 짚었다.

“하아, 왜요.”

“정말 죄송한데요. 다는 못 벗을 것 같아요. 여기까지만 단추 풀면 안 될까요.”

다율이 권지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권지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갈색 눈망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권지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상하게 말했다.

“아, 내가 너무 거칠었네. 미안해요.”

“…죄송해요.”

“아냐. 우리 그냥 껴안고 자요.”

권지하가 다율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쳤다. 권지하의 무게감이 다율을 짓눌렀다. 다율은 권지하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큰일 날 뻔했는데 잘 막아낸 것 같아.

“우리 매니저님… 따뜻하다.”

다율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권지하가 중얼거렸다. 다율은 이불을 끌어다가 권지하의 등에 둘러 주며 얼굴을 붉혔다.

저도요. 싸늘한 당신의 몸이 저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해요.

***

이튿날 아침 다율이 일어났을 때 그는 혼자였고 단추가 목 끝까지 채워진 상태였다.

다율은 왠지 모를 쑥스러움을 느끼며 까치집 지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너무나 생생했으며 동시에 꿈만 같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옷차림에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싱숭생숭하다. 마치 인간 난로 그 이상이 된 듯한….

“아냐, 아냐. 체온 전달을 하기 위해서였어.”

날 벗기고 싶다고 하신 건 체온 때문이었어. 너무 어렵게 꼬아 보지 말자고.

다율은 쭉쭉 기지개를 켜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앉았다. 어제 삐끗한 발목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툇마루 쪽 문이 열렸다. 씻고 나왔는지 권지하가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고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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