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촬영팀 총괄이 다가와 다율의 상태를 살폈다. 권지하는 그를 가볍게 물리고 자신이 다율을 돌볼 테니 촬영을 중단해 달라고 말했다.
“좀 가라앉은 것 같으니 집으로 들어가요. 오늘은 쉬도록 하죠.”
“일을 얼마 못 했는데….”
“일은 적당히 부풀려서 편집해 달라고 하지 뭐. 지금은 안 아픈 게 더 중요해요. 갑시다.”
“어, 저 걷기 힘든데….”
다율이 망설였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돌아앉아 등을 내밀었다.
“업혀요.”
“네?”
“빨리 가게 얼른 업혀요.”
“저 무거운데요…!”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자, 입씨름 그만하고 갑시다.”
다율은 그의 널찍한 등을 보자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또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의 부주의로 촬영에 지장을 줬을 뿐만 아니라 권지하에게 생고생을 시키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죄송하긴.”
다율이 조심스럽게 권지하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그의 등에 몸을 실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몸을 탄탄하게 받치며 일어났다.
“목에 팔 잘 감아요.”
“네에….”
다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매미처럼 찰싹 붙어 있으려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 목덜미의 감촉이 익숙하지?
다율은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권지하에게 업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의식돼 이내 그의 등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권지하는 다율을 업고도 가뿐하게 걸어 나무집으로 돌아왔다.
“다 왔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힘들게….”
“죄송하다는 말 금지.”
“헉, 죄송해요.”
“위반할 때마다 천만 원 벌금이에요.”
권지하가 진지하게 말했다.
“벌금 싫어요! 저 씻고 나올게요.”
다율은 식겁하며 절뚝절뚝 욕실로 들어갔다.
권지하는 다율이 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불과 요를 펼쳤다. 폭신하게 요를 깔고 빵빵한 베개를 준비하며 정성껏 자리를 매만지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내 건 아닌데 뭐지.
진동이 울리는 쪽을 보니 다율의 핸드폰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타고나길 뻔뻔하고 다율의 사생활을 침범하기 좋아하는 그였다.
대체 누가 이 대낮에 다율이한테 전화를 걸지? 맹 실장이나 장훈이 형이려나?
짚이는 구석이라고는 소속사 식구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권지하는 대수롭지 않게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와우 기획 변태식 이사님>
“이게 뭐야.”
왜 이런 사람한테 전화가 와?
권지하도 와우 기획을 잘 알았다. 주로 아이돌 그룹을 제작하는 회사이자 천재욱인지 바보욱인지 하는 서브남의 소속사이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 음주 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킨 아이돌 멤버가 있어 연예면을 화려하게 수놓기도 한 곳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왜 다율이한테 전화를 거는 건데? 그것도 대표가 직접.
권지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와 다율의 접점이라면 최근 ‘TOP매니저11’ 촬영 뒤풀이밖에 없었다. 그때 뜬금없이 와우 기획 대표가 왔길래 ‘저 인간은 뭐지.’ 하고 말았는데 설마 다율을 보러 온 거였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동안 핸드폰은 계속해서 울렸다. 권지하는 연결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상대방은 확인도 않고 바로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신난 목소리였다.
-어어. 다율 씨. 나 변태식이야. 오디션 합격 소식 알려 주려고 전화했어. 우리 슈퍼짱에 합류하게 됐으니 그 매니저 자리 빨리 관두고 슈퍼짱 숙소로 거처 옮겨.
이게 웬 개소리야?
권지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왜 대답이 없어? 자기 발로 와서 열심히 오디션 봐 놓고는. 기쁘지도 않아?
변태식이 하는 소리 하나하나가 권지하의 혈압을 높였다. 권지하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사님. 저 권지하입니다.”
-어… 어? 궈, 권 배우? 왜 자네가 받지?
“저랑 좀 뵙도록 하죠. 해명을 듣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초여름 날씨를 빙하기로 만들 듯한 그의 싸늘한 말투에 변태식은 당황했다.
-이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있잖아.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사무실에 계십시오.”
권지하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핸드폰을 만져 통화 기록을 없앴다.
그때 마침 다율이 욕실에서 나왔다. 권지하는 냉랭했던 표정을 거두고 상냥한 낯으로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러고는 한달음에 다율 쪽으로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움직여요.”
“감사해요.”
“나한테 기대서. 그렇지.”
권지하가 다율을 천천히 이부자리까지 데리고 왔다. 다율은 끙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 누웠다.
“조금 자요. 한숨 자면서 쉬면 좋아질 거예요.”
권지하는 얇은 이불을 다율의 턱 끝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그리고 가슴께를 살짝 토닥였다. 그 느낌이 너무 간지럽고 나른해 다율은 배시시 웃었다.
“저 졸려요.”
“피곤해서 그래. 얼른 자요.”
“저 자는 동안 배우님은 뭐 하실 거예요?”
“음. 글쎄. 동네 한 바퀴?”
“재밌겠다.”
다율의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권지하는 다율의 숨소리가 완전히 고른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뒷마당으로 나가 차에 몸을 실었다.
***
권지하는 최고 속력으로 차를 몰아 서울에 도착했다. 와우 기획에 도착한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사장실 문을 열었다. 사장실 바깥에 있던 직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섰지만 때는 늦었다. 믹스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변태식은 깜짝 놀라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뭐, 뭐야. 진짜로 왔어?”
“변 이사님. 제 사람 건드리고 커피가 넘어가십니까?”
권지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성큼성큼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눈은 반쯤 맛이 가 있었다. 그가 내뿜는 냉기에 변태식은 바짝 쫄아붙어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건드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다율 씨가 직접 찾아온… 건데….”
“꼬셨을 거 아닙니까. 순진한 애 꼬드겨서 오디션 보라고 바람 넣었죠?”
권지하는 변태식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를 내려다봤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 차이 나는 권지하가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응시하자 변태식은 다 벗겨진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바, 바람…이라니.”
“넣었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번만 더 내 매니저한테 연락했다가는.”
꿀꺽. 변태식은 마른침을 삼켰다. 권지하는 벽에 붙은 와우 기획 소속 연예인들의 프로필 사진을 둘러봤다. 그리고 벽으로 다가가 개중에 가장 크게 나붙은 천재욱의 사진을 검지로 짚었다.
“무, 무슨 짓이야.”
“이사님. 자칫하면 이 친구가 드라마에서 통편집될지도 모르겠어요.”
“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
“이사님은 내 사람 건드려 놓고 저는 나쁜 짓 하면 안 됩니까?”
권지하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천재욱의 사진을 주먹으로 쳤다. 퍽 소리와 함께 종이 귀퉁이가 찢어졌다.
“이… 이 무슨.”
변태식은 더 이상 그와 말을 섞어 봤자 이득 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하네. 없었던 일로 하지.”
“당연한 소리를.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권지하는 그대로 뒤돌아 와우 기획을 빠져나왔다.
***
다율이 눈을 떴을 때는 어스름하게 저녁놀이 깔린 시간이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했는데 머리맡을 더듬어도 주전자나 물컵이 없었다.
“으음… 배우님, 안 계세요?”
어둑해진 방 안에는 권지하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동네 산책 가셔서 아직까지 안 돌아오신 걸까? 이렇게 오래 집을 비우시다니….
한번 연락이라도 해 볼까. 다율은 멀지 않은 곳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뜻밖의 문자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어? 변태식 이사님이시다.”
[이다율 씨. 우리 계약 건은 없었던 일로 합시다. 미안하지만 앞으로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나가다가 길에서 봐도 모르는 척하고요. 이유는 묻지 말아요.]
다율은 크게 당황했다. 오디션에 떨어졌구나. 태어나 처음 경험한 광탈에 속이 쓰렸다. 그것도 그냥 담백하게 탈락 소식만을 알려 주는 게 아니라 오가면서 봐도 아는 척도 말라니. 이보다 명백한 거절은 없었다.
“아… 와우 기획이랑은 끝이네. 내가 너무 실력이 부족했나 봐.”
잠시나마 들떴던 자신이 바보 같아 다율은 시무룩해졌다. 기분이 축 처져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마루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어? 배우님!”
권지하가 손에 접시를 들고서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불을 켜자 접시 안에 담긴 것이 보였다. 잘 썰린 수박이었다.
“깼어요? 스태프들이 수박을 좀 나눠 주길래 가져왔는데 먹을래요?”
“네. 마침 목이 말랐는데 잘됐네요.”
다율은 단것을 좋아했다. 특히 야생에서 단맛을 듬뿍 품고 자라난 수박을 좋아해서 여름이면 산속에 열리는 수박을 갉아 먹곤 했다.
그러고 보니 인간 세상 수박은 처음인걸? 맛있어 보인다.
“잘 먹겠습니다.”
다율은 세모난 수박 조각을 들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설탕보다도 더 달고 끈적한 과즙이 입 안에 고였다.
“너무 맛있어!”
“태어나서 수박 처음 먹는 사람처럼 좋아하네요.”
“네. 처음이니, 아니. 이렇게 맛있는 수박은 처음이니까요. 하하. 올여름 수박이 참 맛있다더니 사실이네.”
말을 흐지부지 마무리하면서 다율은 게 눈 감추듯 수박을 먹어 치웠다. 목마름이 해소될 정도로 수박을 깨끗이 해치운 다율은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오디션에 탈락한 상처가 크긴 했지만 그래도 당분을 섭취해서 그런지 아까처럼 속이 쓰리진 않았다.
“다 묻히고 먹네.”
권지하가 다율의 입가에 손을 뻗어 슥 과즙을 닦아 주었다. 다율은 서늘한 손의 감촉에 흠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