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미쳤다. 너무 맛있어. 배우님도 얼른 드세요.”
“이 매니저가 먹여 줘요.”
“그,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 있어요. 나도 매니저님 먹여 줬는데. 자, 얼른 줘요.”
권지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생김이 너무 과하다니까, 다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김치전을 찢었다.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권지하의 입에 쏙 김치전을 넣어 주었다.
“맛있네.”
“그렇죠?”
“매니저님이 줘서 그래요. 아, 좋다.”
권지하는 활짝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는 서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골에 사는 것도 괜찮겠어요.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외출 안 하고 집 안에서 전이나 부쳐 먹고. 술도 마시고 자유롭게 사는 거지.”
그가 다율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데 전원주택 하나 짓고 애들 키우면 딱이겠죠? 애들은 뛰어놀아야 하니까요.”
“네?”
갑자기 나온 아이 이야기에 다율은 귀가 쫑긋 섰다.
“이 매니저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이 키우기에는 서울보다 이런 데가 낫지 않겠어요?”
“어… 그게….”
다율의 가슴이 찌릿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우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낳을 아이를 떠올리시는구나.
다율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니 절로 술이 당겼다.
“전 잘 모르겠어요.”
일부러 차갑게 말하며 다율은 막걸리를 한 잔 따라 쭉 들이켰다. 술기운이 살짝 퍼지면서 우울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시골은 별로야? 아까 보니까 이 매니저 농촌 체질 같던데. 밭일도 좋아하고요.”
“아니에요. 전 서울 체질입니다.”
다율은 딱딱하게 말했다. 더 마시려는 그를 권지하가 제지했다.
“너무 빨리 마신다. 나랑 같이 천천히 마셔요.”
“맛있어서 그래요. 저 알아서 마시게 놔두세요.”
다율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빠르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 병을 다 비운 그는 다음 병을 깠다. 한 잔, 두 잔. 다율이 잔을 비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아. 신겨엉 쓰지 마세요오.”
어느덧 다율의 혀는 엿가락처럼 늘어졌고 눈도 반짝임을 잃었다. 꾸벅꾸벅 졸며 상모를 돌리는 다율을 보며 권지하는 혀를 찼다.
“완전 취했네.”
“으음… 아니거든요. 저 멀쩡해요.”
“그럼 똑바로 대답해 봐요. 일 더하기 일이 얼마야?”
“삼!”
“…우리나라 수도는?”
“부산!”
다율의 상태를 점검한 권지하는 소반을 치웠다. 다율의 옆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도 깔끔하게 치우고 주방에서 물을 떠 와 먹였다. 축 늘어진 다율은 권지하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통통한 뺨을 꼬집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다율이 너무 귀엽네.”
“알아요.”
“가끔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귀여워.”
“응. 사람이 아니니까요.”
다율은 눈을 감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권지하가 흠칫했다.
“…사람이 아니야?”
“어어. 아니지이.”
다율은 그렇게 말하며 권지하의 목덜미에 제 뺨을 비볐다. 권지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인 후 다율을 잘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인데.”
“아니라니까아….”
“그렇구나. 우리 다율이는 사람이 아니었어.”
권지하가 다율의 가슴을 토닥이며 답했다. 눈빛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배우님도 빨리 비밀 말해 줘요. 나만 말하면 억울해.”
다율이 몽롱한 눈으로 권지하를 올려다봤다. 영락없이 만취한 사람 그 자체였다. 권지하는 다율이 이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 나도 말해 줄게. 귀 이리 줘 봐요.”
“여기요.”
다율이 동그란 귀를 권지하의 입술께에 가져다 댔다. 권지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실은 나도 사람 아니야.”
“헉. 역시.”
“이 매니저. 알고 있었어요?”
“응!”
“그럼 내 정체가 뭔지 알겠어요?”
“알죠. 그건 바로….”
콕. 동그란 손끝이 권지하의 뺨을 찔렀다.
“남신.”
“뭐라고요…?”
“맞잖아요. 인간 아니라 남신. 너무 잘생겼어….”
다율은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권지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권지하의 품에 안겨 서로가 인간이네 아니네 떠들어대는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술기운이 너무나 강해 이성이 마비된 것이다.
“햐… 보면 볼수록 잘생겼다.”
다율은 대놓고 권지하의 얼굴을 더듬었다. 적극적인 손짓에 권지하는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다율은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조각 같은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뽀뽀하고 싶어.”
조그맣게 읊조렸다. 권지하의 동작이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이 매니저?”
“뽀뽀.”
“갑자기 왜?”
“잘생겼으니까.”
“잘생기면 다 뽀뽀해?”
“아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럼?”
권지하가 자기의 얼굴을 감싼 다율과 손등을 겹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으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율의 눈꺼풀이 살포시 닫혔다. 파르르 긴 속눈썹이 떨리며 다율은 입술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연한 꽃잎처럼 색이 고운 입술이 권지하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쵹. 물기 젖은 소리가 나면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했다.”
다율이 눈을 뜨며 웃었다. 부드럽게 휜 눈매와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두 뺨 그리고 방금 입맞춤한 것을 티 내듯 색이 진해진 입술. 권지하는 눈앞의 풍경이 기가 막혔다.
“이 매니저. 지금 나한테 뭐 한 줄 알아요?”
“알죠오. 뽀뽀했잖아.”
“하니까 어때요?”
“기분… 좋아요.”
“한 번 더 하고 싶을 만큼?”
“응.”
다율이 이번에는 권지하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권지하의 무릎 위로 앉았다. 입술이 겹쳐지는 순간 권지하로부터 뜨거운 숨결이 전달돼 왔다. 권지하의 굵직한 손마디가 다율의 마른 등을 감싸며 강하게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으음.”
다율은 태어나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남과 숨결을 나누는 것도 입술을 빨리는 것도 다.
“아… 읏.”
신기했다. 맞닿은 입술은 분명 서늘한데 몸속 깊은 곳부터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권지하의 손길은 늘 차갑게 식어 있는데 지금 자신의 등과 허리를 쓸어내리는 단단한 손바닥은 꼭 화상이라도 입힐 듯 뜨겁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야. 다율은 확신하며 권지하에게 더욱 꼭 매달렸다.
***
짹짹. 평소에는 듣기 어려운 새소리가 다율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평소에는 암막 커튼을 치고 자느라 도통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한 햇볕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으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다율은 눈을 비비며 정신을 깨우려 애썼다. 그는 평소와 너무나 다른 방 안 풍경에 잠시 물음표를 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맞다. 나 촬영 왔지. 밭일을 한 다음에 배우님하고 단둘이 막걸리를 마셨는데… 한참 마시다가 기억이 안 난다. 뭐 했더라? 왜 이렇게 머리가 갑갑하지? 뭔가 일이 있었던 것도 같고.
다율이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고 있는 중이었다.
“깼어요?”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권지하가 모로 누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배우님.”
“머리는 안 아파요?”
“듣고 보니 아파요.”
갑자기 강한 두통이 찾아와 다율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끈지끈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권지하가 찬물을 건넸다. 다율은 물잔을 받아 들며 물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봐요. 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혹시 제가 실수한 건 없었나요?”
다율이 묻자 권지하는 피식 웃었다.
“실수라뇨. 전혀 없었어요.”
역시 기억 못 하는군. 억지로 기억나게 해 봤자 역효과겠지.
권지하는 까치집을 지은 다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아꼈다. 세상사 굳이 몰아붙여서 좋을 일은 없는 법이다. 확인할 건 다 확인했으니 서서히 숨통을 조여가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미 상대는 내 사정 반경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다율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권지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마치 풀숲에 도사리고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맹수 같은 눈빛을 띠고서.
오전 9시가 되자 스태프들이 농장으로 복귀했다. 한쪽에 그늘막을 설치하고 찬물과 얼음을 준비한 다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나눠 먹었다. 아침인데도 더운 탓이었다.
“오늘은 더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 촬영할게요.”
“그러죠.”
“네! 알겠습니다.”
다율은 씩씩하게 대답했으나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뙤약볕 아래 있으려니 숙취가 더 심해지는 것도 같았다. 내가 어쩌자고 그렇게 술을 마셨단 말인가.
“끄응….”
어제와 확연히 다르게 다율의 움직임은 굼떴다. 비료 통을 옮길 때도 힘을 못 썼고 다 죽어가는 얼굴로 가지치기를 했다.
“이 매니저. 많이 힘들어요?”
“아뇨. 괜찮아요.”
“너무 힘들면 저기 정자 가서 좀 쉬어요.”
권지하가 농장 한쪽에 놓인 나무 정자를 가리켰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데다가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곳이라 쉬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아니에요. 저는 이 나뭇가지 날라야, 하.”
“조심해!”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나르려다가 다율이 넘어졌다.
“아야야….”
그가 발목을 감싸 쥐고 어쩔 줄 몰라 하자 권지하가 황급하게 다율의 다리를 살폈다.
“괜찮아? 발목 삐었어?”
“접질린 거 같아요.”
“이런. 좀 자세히 좀 봐.”
권지하가 다율의 신발을 벗기고 발목을 살살 움직여 보았다. 그럴 때마다 다율이 소리를 질렀다.
“아파요.”
“근육이 놀랐나 보다. 우선 찜질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권지하가 근처에 있는 스태프에게 얼음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랩으로 얼음을 싸 주머니를 만든 다음 퉁퉁 부은 발목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니 다율이 앓는 소리를 냈다.
“차갑게 하고 있으면 좋아질 거예요.”
“고마워요, 배우님.”
“고맙긴. 내 사람 내가 챙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