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20화 (20/95)

20화

“오늘 촬영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다율 씨, 권지하 씨.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감사합니다.”

해가 완전히 지자 더 이상 촬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7시경 촬영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스태프들이 조명과 마이크 등 장비를 철수하는 동안 다율은 할머니를 따라가 주방에서 도토리묵 무침을 얻어먹었다.

“잘 먹네.”

“너무 맛있어요.”

“더 줄까?”

“네! 그리고 저기 저희 배우님도 갖다드릴래요.”

“어지간히 챙기네. 부부여?”

“컥.”

다율은 그만 도토리묵을 뿜고 말았다. 할머니는 다율에게 물을 건네며 혀를 찼다.

“농담인디 뭘 그렇게 놀라. 사내놈들끼리 무슨 놈의 부부겄어.”

“그, 그렇죠….”

“모름지기 사내면 이쁜 각시 끼고 올망졸망한 애기를 낳아야제. 장가는 아직이지?”

“…네. 저도 배우님도 아직이요.”

“잘생겼으니까 장가도 잘 갈 거여.”

“고맙습니다.”

다율은 시무룩해졌지만 도토리묵은 맛있었으므로 한 접시를 싹 비웠다. 스태프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했고 다율은 아까 먹은 도토리묵은 무효라는 듯 권지하 옆에 딱 달라붙어 밥을 먹었다.

“그럼 이제 집 안으로 들어가서 짤막하게 잠드는 신 촬영하실게요.”

“네.”

ENG카메라 기사와 다율, 권지하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골집답게 댓돌이 있었다.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 놓고 소박한 집 안으로 발을 디디자 향긋한 나무 향이 다율을 감쌌다.

마치 다람쥐 둥지에 들어와 있는 듯 편안하고 아늑했다. 벽에 매달린 감나무 가지도 정겨웠고 침대방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구들장도 마음에 들었다.

다율이 집 안 물건을 구경하는 것을 보고 권지하가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네! 엄청 좋아요.”

“그럼 우리 여기서 잘까?”

“어? 그래도 돼요?”

원래는 오늘 촬영이 끝나면 시내에 있는 관광호텔에서 잘 예정이었다. 이부자리를 깔고 잠든 척하는 신을 찍고 나면 숙소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많은 제작진과 특히 권지하같이 몸값 비싼 배우가 시골집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되죠. 우리가 여기서 자고 싶다면 자는 거지.”

“권 배우님.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오늘밤에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데요.”

현장 스태프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그녀가 일기예보까지 보여 주었지만 권지하는 고개를 저었다.

“제 매니저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주려고요. 촬영팀은 시내 가서 주무셔도 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배우님 의견 존중해야죠. 저희는 주무시는 신 찍고 철수할게요. 급한 일이나 필요한 물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빗물 안 들이치게 조심하시고요.”

촬영을 마친 스태프들이 짐을 챙겨 집에서 철수했다. 농장 주인 노부부까지 마을에 따로 있는 집으로 돌아가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가끔씩 풀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흔들 뿐이었다.

초여름의 호젓한 시골. 마을 사방은 어두웠고 불을 켠 집은 근방에 오직 여기 한 곳뿐이었다. 다율은 대청마루에 앉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미소 지었다.

밤하늘은 까마득하게 높았으며 이름 모를 별자리들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렇게 보니 속리산에서 보던 하늘과 닮았다. 당연했다. 여기는 속리산에서 그렇게 먼 곳이 아니니까.

…이런 데서 살면 좋겠다. 배우님이랑 나랑 둘이서 아무 생각도 걱정도 안 하고.

어쩌면 여기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보금자리가 아닐까. 사랑하는 권지하와 아기다람쥐를 낳고 살면 딱 좋을 것 같….

“뭐라는 거야.”

다율은 자기 뺨을 찰싹 때렸다. 자꾸만 생각의 가지가 이상한 쪽으로 뻗쳤다. 배우님하고 아기다람쥐를 낳고 산다니. 말도 안 돼. 배우님이 혹시라도 내 망상을 아시면 화를 내실 거야! 정신 차려.

다율이 스스로를 꾸짖고 있을 때였다. 권지하가 뒤를 돌아 다율을 바라봤다.

“왜 그래요? 왜 자기 뺨을 때려.”

“모, 모기가 있어서…!”

“정말? 얼굴 물렸어요?”

권지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디 좀 봐요.”

“괘, 괜찮은데….”

“얼굴 물렸으면 안 되지. 한번 봐요.”

권지하가 다율에게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감쌌다. 마루에 앉아 있던 다율은 마땅히 뒷걸음질 치기도 어려웠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엉덩이를 들썩이며 어떻게든 피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권지하는 다율이 움직이지 못하게끔 그의 어깨를 고정하며 점점 더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가만히 있어요.”

“배, 배우님.”

“어디 보자. 이마는 멀쩡한데….”

권지하가 다율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와 다율의 눈가와 뺨을 훑듯이 쳐다봤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

조명이라고는 대청마루에 걸린 옛날식 필라멘트 전구 하나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권지하가 가리고 있어서 그림자가 드리웠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얼굴을 들여다보나 마나일 것이었다. 심지어 있지도 않은 모기 자국이니 가깝든 멀든 그게 보일 리 없었다.

괜히 거짓말했나 봐. 배우님 얼굴이 지척에 있으니 숨이 멎을 것 같아…!

다율은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긴장해 호흡이 흐트러졌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의 마음도 몰라주고 입술 근처와 코끝, 다율의 턱까지 골고루 쓸었다. 무언가를 찾듯이 그의 손은 끝도 없이 다율의 얼굴 위를 방황했다.

“모기 자국 없는데요? 안 물린 것 같아요.”

“차… 착각이었나 봐요. 괜찮아요.”

“그래도 혹시 나중에라도 간지러우면 말해요. 약은 없지만.”

“네? 약이 없으면 어차피 소용없는 거 아니에요?”

“더 잘 듣는 게 있거든.”

권지하는 그렇게 말하며 다율을 놓아주고 다시 뒤돌아 마당을 가로질렀다.

모기 물렸을 때 약보다 잘 듣는 거라… 그게 뭐지? 인간들만 아는 민간요법이 있나?

다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어, 비 와요. 배우님.”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저녁 아홉 시경의 일이었다. 일기예보대로였다. 다율은 방문을 열고 톡, 톡 땅을 가볍게 땅을 때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름밤의 비는 시원했고 낭만적이었다.

“분위기 좋다….”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좀처럼 느껴 볼 수 없는 정취였기에 다율은 자연의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무릎을 모으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다율에게 권지하가 문득 말을 꺼냈다.

“우리 비 오는데 막걸리 마실래요? 비 오는 날은 막걸리가 딱인데.”

“막걸리요?”

“아까 할머니가 몇 병 주고 가셨어요. 안주로 해 먹을 만한 것들도 남겨두고 가셨고요.”

“와! 너무 좋은데요. 우리 지금 바로 해 먹어요.”

다율은 신이 나서 방 뒤쪽으로 연결된 문으로 나갔다. 툇마루에는 지역 특산물인 밤 막걸리와 김치통, 부침가루, 식용유 따위가 놓여 있었다.

<냉장고에 도토리묵 있어요>

메모를 발견한 다율은 신이 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는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도토리묵 무침이 쌓여 있었다.

“요리는 내가 할게요.”

“아니에요. 배우님. 같이 해요.”

“기름 튀면 위험한데.”

“그럼 옆에서 보조할게요.”

권지하는 저를 돕겠다고 어설프게 부침가루를 체 치는 다율을 보며 씩 웃었다. 사방팔방에 가루를 다 흘리는 건 물론이요 코끝에도 눈이 내렸는데 무슨 요리를 하겠다고. 그래도 재미있어 하니까 같이 하게 해 줘야겠지. 김치전 반죽을 만드는 동안 권지하는 다율에게 몇 가지 미션을 줬다.

“가루 다 체 치면 프라이팬 찾아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이제 식용유를 꺼내 주세요.”

“여기요!”

“아주 잘하네요. 불은 내가 켤게요.”

식용유를 두른 팬에 걸쭉한 반죽을 올리자 치익 하고 맛있는 소리가 났다.

“소리 너무 듣기 좋아요.”

“맛있겠네요.”

“노릇하게 구워 주세요.”

“물론이죠.”

다율은 김치전이 노릇노릇 익어 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려 가스레인지에 한 발짝 다가갔다. 권지하의 시선 아래로 다율의 둥글둥글한 정수리가 들어왔다.

“정말 동그랗네요.”

“네. 전이 진짜 동그랗게 부쳐졌어요. 예술이다.”

다율은 제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프라이팬 안만 쳐다봤다. 권지하는 제 눈앞에 살랑이는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 됐어요.”

잘 익은 전이 널찍한 접시에 척척 포개어졌다. 두 사람은 앉은뱅이 소반에 도토리묵과 김치전을 올리고 막걸리를 네 병 집어 방 가운데 앉았다. 군침이 절로 흐르는 메뉴에 다율은 어서 음식을 먹고 싶었다.

또 막걸리도 마셔 보고 싶었다. 이제껏 인간 세상에 나와서 마신 술은 거의 회식 자리에서 마셨던 것으로 소주와 맥주 그리고 와인이 전부였다. 알밤 줍기 아르바이트는 해 봤어도 정작 마시진 못했던 막걸리의 맛이 궁금했다.

“배우님. 막걸리 맛있어요?”

“응. 안 먹어 봤어요?”

“먹어 본 적 없어요.”

“막걸리 따라 줄게요. 한번 마셔 봐요.”

“잘 먹겠습니다.”

권지하가 두 사람의 잔에 차례로 막걸리를 부어 주었다. 다율은 짠, 하고 건배를 한 다음 막걸리를 들이켰다. 짜릿하면서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와. 이런 맛은 또 처음이네.”

“괜찮아요?”

“네. 와인보다 훨씬 제 입맛에 맞는데요. 저 한 잔만 더 주세요.”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이게 술술 넘어가다 보니까 한순간에 훅 갈 수가 있거든.”

“괜찮아요. 제가 쓰러지면 배우님이 알아서 저 챙겨 주실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요?”

“네. 저는 배우님 믿어요.”

다율이 해맑게 웃으며 두 번째 잔을 비웠다. 권지하는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견디며 전을 한입 크기로 찢어 다율에게 건넸다.

“아 해요.”

다율은 순순히 입을 벌려 아기새처럼 전을 받아먹었다. 기름을 잔뜩 둘러 부친 부침개는 겉이 바삭하면서도 안이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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