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19화 (19/95)

19화

“어, 누구지?”

“자꾸 울리네. 얼른 받아 봐요.”

다율은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연결 버튼을 눌렀다. 맹 실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실까.

“네. 이다율입니다. 네네. 어… 네? 정말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후속 예능이 잡혔다고요?”

-그래. 이 매니저랑 우리 권 배우랑 동반 캐스팅됐어. 드라마 촬영도 거의 다 끝났는데 아주 잘됐어.

그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반응 좋았잖아. TVO에서 두 사람만 <농장을 지켜라> 특집편에 내보내 주겠다는 거야. 당연히 오케이 했지.

“세상에. <농장을 지켜라>요?”

<농장을 지켜라>는 최정상의 인기 가수나 배우들만이 패널로 참석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포맷은 단순했는데 시골 농장에 초대되어 생활하면서 밭일이나 수확을 돕고 그 품삯을 기부하는 식이었다.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도 재미가 있었지만 시골 마을에서 직접 채취하거나 얻은 식재료로 새참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나올 때면 순간 시청률이 치솟아 야식을 부르는 프로그램으로도 유명했다.

“우와. 농장…! 시골…!”

다율은 신이 나 어쩔 줄을 몰랐다. 속리산을 떠난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었다. 눈앞에 맨발로 흙을 밟고 지내던 그 시절이 펼쳐졌다. 말로만 들어도 설렜다. 다율은 어서 농촌으로 떠나 흙냄새를 맡고 싶었다.

촬영 장소는 충남 공주에 위치한 밤 농장이었다. 속리산과 가까운 곳에 심지어 밤 농장이라니. 다율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농장 일 진짜로 할 겁니다! 시늉 말고 진짜로 일하게 해 주세요.”

제작진과 사전 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다율은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다.

“다율 씨. 농사란 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 해낼 수 있겠어요?”

“네. 저는 평생을 산에서… 아니 어쨌든 그런 일 좋아해요. 잘할 수 있어요. 밤 농장 가꾸기, 어린 밤나무에 거름 주기. 이런 거 정말 잘합니다.”

적극적인 다율의 모습에 제작진들도 만족했다.

“그래요, 그럼. 사실 두 분이 일하면서 수다만 떨어도 시청률 잘 나올 거야.”

“네! 배우님도 좋으시죠?”

“난 이 매니저가 좋다면 다 좋지.”

권지하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다율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광경에 몇몇 작가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예의 바르기는 했지만 평소 타인에게 차가운 구석이 있는 권지하였다. 그런데 자기 매니저는 저렇게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니.

굳이 대본을 공들여 쓰지 않아도 내용이 알아서 굴러가겠구나. 작가들은 마음을 놓았다.

<농장을 지켜라> 촬영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이디어 회의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다율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많은 아이디어가 채택되었다. 다율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처음 예능에 출연했을 때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잔뜩 긴장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권지하가 옆에서 다율을 지원해 주는 것도 힘이 되었다. 몇 차례 미팅을 거친 후, 최종 일정이 잡혔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는 날, 촬영팀과 권지하 그리고 다율은 공주로 향했다. 촬영팀은 별도의 차량을 타고 이동하고, 두 사람은 권지하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운전은 권지하가 맡았다. 막힌 데 없이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이다율은 창밖을 보며 내내 웃음 지었다.

“산이다!”

우리나라는 천지에 산이 깔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이 하나 보일 때마다 일일이 가리키며 신나 하는 다율이었다.

다율은 푸르게 펼쳐진 들판과 산을 보며 옛 추억에 잠겨들었다. 살짝 열린 창문 밖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서울을 벗어나 촬영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더 깨끗하고 맑아지는 듯했다. 마치 고향 마을의 공기 같았다. 다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밤이면 쏟아지던 별빛, 야생에서만 맛볼 수 있는 쌉싸름한 도토리. 바닥에 밟히는 따뜻하고 촉촉한 흙. 혼자여서 외로웠지만 그래도 그리운 산속이 떠올랐다.

한참 달리던 차가 잠시 휴게소에 멈춰 섰다.

“배우님, 뭐 좀 사올까요?”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다율이 물었다.

“같이 가죠.”

권지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숙여 다율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다율은 훅 가까워진 권지하의 체향에 귀 끝을 발갛게 물들였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다율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무 냄새와 풀 냄새가 느껴지자 다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좋아요?”

“네. 너무 좋아요. 꿈만 같아요.”

다율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권지하는 “이거 출연 안 했으면 매니저님 큰일 날 뻔했네”라며 웃더니 다율을 휴게소 쪽으로 인도했다.

“뭐 먹을래요?”

음식 코너에는 호두과자, 핫바, 알감자며 구운 오징어 등 맛있는 음식이 즐비했다. 다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호두과자와 핫바를 골랐다. 권지하가 지갑을 꺼내 계산했다.

“앗, 배우님. 제가 사드리려고 했는데.”

“됐어요. 음료는 안 마셔도 돼요?”

“그러면 염치없지만 아이스 미숫가루 마셔도 될까요?”

권지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율은 권지하를 위한 아메리카노와 자신 몫의 아이스 미숫가루를 챙겼다.

두 사람은 야외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기로 했다. 다율은 우선 호두과자부터 공략했다. 물론 권지하에게 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권지하는 매니저님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며 사양했다. 그 말에 다율은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호두과자나 먹었다. 역시나 파삭파삭, 갓 구운 호두과자는 따뜻하고 맛있었다.

드디어 촬영지인 밤 농장에 도착했을 때 다율은 말 그대로 환호했다. 농장이 위치한 산비탈은 다율이 살던 산속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농장 왼쪽으로는 밤나무밭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소박한 나무집이 있었다.

내가 살던 데랑 너무 비슷해! 좋다!

방방 뛰는 다율을 보며 권지하는 계속 피식거렸다.

“그렇게 좋아요?”

“저 너무 좋아요! 춤추고 싶어요!”

“춤은 이따 추고 마이크 달아요.”

첫날은 오프닝과 농장에서 할 일을 간단히 소개하는 장면을 찍기로 했다. 농장 주인은 60대의 노부부로 평생 이 작은 농장을 가꿔 온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가만 보자. 연속극 나오는 사람 아니여?”

“맞습니다.”

“아이고 신기해라. 티브이보다 실물이 천 배 낫다. 근데 이짝은 누구지…? 영 귀엽게 생겼네.”

권지하는 웃으며 다율을 소개했다.

“제 매니저예요. 같이 일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그래. 둘이 한번 잘 혀봐유.”

다율과 권지하는 핀 마이크를 달고 밤나무밭 앞에 나란히 섰다. 오프닝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노란 티셔츠에 청바지 밑단을 둘둘 말아 올리고 장화를 신은 다율은 얼굴이 뽀얀데도 불구하고 농활 패션이 잘 받았다. 워낙 무해하고 청량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권지하는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워낙에 옷발이 잘 받아서 검은 장화조차도 부츠처럼 보였다.

‘헉, 너무 멋있잖아.’

새삼스럽게 가슴을 움켜쥐는 다율이었다.

“얼굴 타니까 선크림 발라야죠.”

권지하는 다율의 자그마한 얼굴에 직접 선크림을 발라 주었다. 다율은 얌전히 눈을 감고 권지하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권지하는 다율의 눈 밑, 콧방울, 뽀얀 뺨에 골고루 선크림을 발라 주고 나서 밀짚모자를 씌워 줬다.

“끈 조여 줄게요. 가까이 와요.”

“감사합니다.”

모자가 벗겨지지 않게 잘 고정하고 나니 촬영 준비가 끝났다. 따로 MC가 없는 관찰 예능 컨셉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슬레이트 신호 이후 알아서 움직이기로 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대본이야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 예능이었다.

“할아버지. 아직 밤들이 익기 전이잖아요. 그럼 밤 줍는 건 안 할 것 같은데. 저희 오늘 무슨 일 해요?”

“밤나무 묘목들이 들어왔어.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고 번호표에 확인했다고 체크하면 돼. 둘이 직접 해 봐.”

농장 주인은 두 사람을 데리고 묘목밭으로 간 다음 시범을 보여 주었다. 다율은 쪼그리고 앉아 성실하게 설명을 들었고, 권지하는 그 옆에서 다율에게 왕부채를 부쳐 주었다.

“총각. 할 수 있겠수?”

“네! 자신 있어요!”

지금까지 물고 뜯고 맛본 밤나무가 몇 그루인데 이 정도는 껌이지.

다율은 밭에 쪼그려 앉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살폈다. 그리고 아주 자신만만하게 어린 나무들의 상태를 진단했다.

“이 녀석은 키는 작아도 수령이 좀 된 놈 같네요.”

“그걸 청년이 어떻게 알어?”

“느낌이 그래요. 아, 이건 맛있는 밤 열리겠다.”

“맞어. 이런 놈한테 알 굵은 밤이 열리지. 자네 농부인가?”

“아뇨. 서울 사람입니다. 농사는 안 지어 봤어요.”

다율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PD는 다율의 척척박사 같은 모습에 놀라 몇 번이고 다율에게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다율은 밤나무에 대한 지식을 줄줄 늘어놓았고 농장 주인은 박수를 쳤다.

“우리 매니저님 천재네요.”

“아, 아니에요.”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그냥… 어려서 산에 좀 다니다 보니까….”

권지하의 물음에 다율은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밤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탁 트인 들판에 펼쳐지는 저녁노을도, 산등성이에 걸린 주황색 해도 모두 고향을 연상케 했다.

다율은 문득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에서 그리운 흙냄새와 풀 냄새가 났다. 서울살이를 하면서 상처 입었던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뿐인가. 바로 옆에는 권지하가 자신과 나란히 저물어 가는 햇살을 맞고 있다. 햇빛은 마법을 부렸다. 권지하의 얼굴에 음영이 걸려 마치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다율이 너무나 사랑하는 얼굴이었다. 다율에게 있어 이보다 더 완벽한 천국은 없을 것이다.

“이다율 씨 표정 너무 좋다. 클로즈업해.”

촬영 감독이 인이어에 대고 소곤거렸다. 다율의 꿈꾸는 듯한 눈빛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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