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는 연기자인 동시에 이 회사 소속의 망한 아이돌 멤버이기도 했는데, 방금 변태식 이사의 호출을 받고 도착한 참이었다. 그가 쥐를 보며 인상을 쓰는 와중 핸드폰이 울렸다.
“예, 이사님. 저 다 왔다니까요. 아 진짜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속고만 살았나. 지금 가요. 예예.”
그가 전화를 끊으며 구시렁거렸다.
“내가 돈 벌어다 주면 뭐 해. 사옥이 아주 개판이구만. 거미줄에 쥐에…. 내가 재계약 해 주나 봐라.”
갑작스러운 천재욱의 등장에 다율은 혼비백산했다. 이를 어쩌면 좋나. 망설이던 차에 마침 그가 전화를 받길래 이때다 싶어 후다닥 바지를 옮겼다. 그리고 죽자 사자 입으로 로퍼 한 짝을 물고 자그마한 앞발로 나머지 한 짝을 껴안고 뛰었다.
개별 칸 안으로 들어간 다율은 풀쩍 뛰어올라 문을 잠갔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한시가 급했다. 빨리 인간으로 변해야 한다. 다율은 정신을 집중했다.
빨리, 빨리 인간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효과음은 최대한 작게 해 주세요!
다율의 바람이 통했는지 자그마한 펑 소리와 함께 다율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율은 정신없이 옷을 꿰어 입었다. 정신없이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데 좌우가 바뀌어 있었다. 어쩐지 안 들어가더라니. 다시 한쪽을 벗고 제대로 신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다율은 바깥의 기척에 귀를 곤두세웠다. 천재욱은 화장실을 스쳐 지나갔는지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금 얼른 나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다율이 문을 젖히고 나온 순간이었다.
세면대에 천재욱이 있었다. 다율은 화들짝 놀라 딸꾹질을 했다. 천재욱은 어디 간 게 아니라 여기서 거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딸꾹!”
“아…?”
천재욱이 고개를 돌렸다.
“어라. 그 매니저?”
다율은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다율의 머릿속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천재욱은 다람쥐였던 자신이 옷을 끌면서 끙끙대는 모습을 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다율이 그 옷을 입고 화장실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수상하게 보일까. 어쩌면 정체를 들킬지도 몰랐다. 다율은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네? 네. 맞… 맞아요.”
“왜 우리 회사에 있어?”
“그… 그게 볼일이 있어서….”
“흠. 요새 화제성 좋다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던데. 심지어 나 같은 명배우를 제치고 화제성 을 먹었단 말이지. 그런 이다율 씨가 우리 회사에 올 일이 뭐가 있을까?”
천재욱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마침 귀찮은 예능 스케줄을 마치고 온 참이었다. 패널로 가서 뻘쭘하게 앉아 있다 오는 자리였다. 이놈의 회사는 왜 이따위 스케줄을 시키냐며 속으로 씹기만 하다가 녹화가 끝났다.
그런데 눈앞의 이 매니저란 놈은 권지하 덕분에 화제성을 거저 얻어먹고 말이지. 나는 허섭스레기 같은 프로그램이나 불려 다녀도 별 재미를 못 보는데 이 녀석은 한 방에 화제성 순위권에나 들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율은 너무 쫄려 그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어딘가 수상쩍은 태도였다.
천재욱은 스스로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는 성격이었다. 이 시간에 우리 회사 사옥에 남의 매니저가 와 있다… ? 그러고 보니 지난주엔가, 신규 멤버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천재욱은 이거다 싶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알겠다. 슈퍼짱.”
“네?”
“내가 속한 아이돌 그룹 말야. 우리 슈퍼짱에 들어오려고 오디션 본 거 아니야?”
“…제가 오디션 본 걸 어떻게 아셨죠?”
“어떻게 알긴. 얼마 전에 한 명이 음주 운전 걸려서 탈퇴했거든. 근데 나같이 잘생기고 연기로 인지도 높인 멤버가 있으니 이대로 해체시키긴 아깝잖아. 새로 멤버 뽑아서 채워 넣고 컴백하자고 하더니만 그게 그쪽일 줄이야.”
천재욱은 비릿하게 웃으며 이다율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다율이 그룹에 합류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자 구미가 당겼다. 자신이 마음껏 연기자 활동을 하려면 동료들도 어느 정도 인기와 화제성이 있어야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반반한 놈이 들어오면 나야 좋지. 배알이야 꼴리지만 이 자식이 화제성이 있는 건 맞고.
천재욱은 어느새 슈퍼짱에 합류한 이다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인지도를 올리는 계략을 짜고 있었다. 적당히 잘해 주는 척해서 이미지 좀 챙긴 다음에, 나를 돋보이는 꽃받침으로 만드는 거지. 혼자만의 망상을 잘도 전개하는 천재욱이었다. 그런데 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음? 그런데 이 옷… 아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 아닌가? 쥐새끼가 물어뜯던 옷하고 똑같은데.
천재욱이 고개를 갸웃하던 때였다. 그때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는 틈을 노려 다율은 손을 흔들었다.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어. 그래.”
다율은 잽싸게 화장실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천재욱은 석연치 않은 뒷맛을 느끼며 다율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팀을 탈퇴한 멤버가 보내온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야! 천재욱.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답장이 늦냐!]
[나 지금 사무실에 와 있어. 넌 뭐 하냐? 집에서 폐인처럼 지내면서 게임 함?]
[무슨. 아니거든? 나 수인 헌터 알바로 떼돈 벌고 다녀.]
수인 헌터라는 말에 천재욱이 “오” 하며 감탄했다. 들어는 봤지만 실제 헌터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수인 자체가 워낙에 희귀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물보다도 더 드물었으니 말이다.
또한 수인 밀거래는 엄연한 불법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경우도 잘 없었다. 하지만 입이 싼 탈퇴 멤버 박중호는 신이 나서 입금 내역을 자랑했다.
[이것 봐. 재욱이 네가 엉뚱한 데 투자해서 날린 돈보다 열 배는 되게 벌었어. 수인 한 마리에 이만큼이라니까?]
[새끼. 부럽네. 야, 근데 수인은 어디 가서 잡냐?]
천재욱은 최근 불법 도박 사이트로 인해 출연료를 싸그리 날려 빈털터리였다. 그 와중에 사치와 허영도 심해서 돈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산속, 숲속 뒤지던 시대는 갔다. 인간인 척하면서 살아가는 놈들 중에 찾아야 돼.]
[인간인 척하는 놈들…?]
[연예계에도 있다더라. 수상한 놈 보이면 나한테 말해. 잡아다 팔고 돈은 반반으로 나누자.]
“수인이 그렇게 흔한가.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봤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천재욱이 멈칫했다.
내가 방금 본 쥐새끼. 그놈이 물고 뜯던 옷을 이다율이 입고 등장했지. 나쁜 짓 하다가 들킨 놈처럼 얼굴은 시뻘게져가지고 말이야.
“으음….”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며 생각을 접었다. 에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리가 없지. 말도 안 되는 상상 하지 말고 어디서 돈 땡길 궁리나 해 보자.
천재욱은 핸드폰 액정을 끄며 혀를 찼다.
***
“하…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다율은 힘이 쪽 빠진 손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자 권지하가 현관에 우뚝 서 있었다.
“어, 빨리 오셨네요?”
분명히 늦게 온다고 했는데 지금은 겨우 저녁 8시였다.
“응. 별다른 이야기 안 하고 바로 왔거든.”
“아, 그러시구나….”
권지하의 시선이 다율의 머리로 향했다.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스타일이 아니라 상당히 멋을 내서 복슬복슬하게 연출한 머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일절 뿌리지 않던 독한 향수 냄새까지 폴폴 났다. 옷차림도 평소 입고 다니던 후드티가 아니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에요? 설마 데이트…?”
권지하가 대뜸 물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율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나갔다 온 거예요.”
“흠, 그래요…? 그런데 왜 향수까지 뿌렸을까.”
“그, 그냥 기분 전환 삼아서요! 저 좀 씻고 올게요.”
미심쩍은 시선을 뒤로하고 다율은 욕실로 향했다.
잠시 뒤 보송하게 씻고 향수 냄새와 왁스 흔적을 지운 다율이 거실로 나왔다. 그가 소파에 앉자 권지하는 자연스럽게 헤어드라이어를 꺼내 왔다. 바람을 틀어 뜨겁지 않은지 자기 손바닥에 대어 본 다음 다율의 머리에 부드럽게 쬐어 주었다.
“배우님.”
“네.”
“배우님은 오늘 본가 가서 뭐 하셨어요?”
“나야 뭐 듣기 싫은 설교나 실컷 듣고 왔지. 그래서 빨리 올라온 거예요.”
“설교요?”
“응. 잔소리.”
어른스러운 배우님에게 누가 잔소리를 한단 말이지. 다율은 의아해 눈을 깜빡였다.
“누가 무슨 잔소리를 해요?”
“딴따라 그만하고 빨리 대나 이으라고요.”
권지하가 무심하게 말했다. 순간 다율의 얼굴이 경직됐다. 대를 이으라니 그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란 소리잖아. 여자… 사람이랑.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노력하겠다고 했죠.”
“네?”
“잔소리 듣기 싫기도 하고 또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권지하가 다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다율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맞아. 배우님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셨지. 그 여자 사람이랑 아이를 낳고 싶으신 거야.
“….”
다율은 말없이 입술만 불룩 내밀었다. 권지하는 다율의 볼을 콕 찌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뚱한 표정을 지을까. 우리 매니저님은?”
“아니에요.”
“불만 있어 보이는데?”
“그럴 리가요.”
다율은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인간 여자와 부둥켜안고 밤을 새울 권지하. 그 여자와 귀여운 아기를 낳을 권지하를 생각하니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그때 이 매니저가 말한 학군 좋은 부동산.”
“네?”
“거기 공유 좀 해 줘요. 내 메신저로 보내 줘.”
“…그건 왜요?”
“왜긴. 필요하니까 부탁하는 거죠.”
권지하가 다율의 볼을 가볍게 톡톡 쳤다. 말랑하고 따끈한 볼이 찰졌다. 겨울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호빵을 찌르는 것 같아 느낌도 좋았다.
“…알겠어요.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메신저에 접속해 그간 모아놨던 부동산 정보를 권지하에게 보냈다. 자신은 돈이 없어서 꿈도 꾸지 못할 부동산을 권지하는 아주 쉽게 손에 넣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 사람과 귀여운 아이들을 위해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자 다율은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졌다. 권지하가 뺨을 쓸어 주고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하며 머리를 마저 말려 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매니저님, 잠깐만. 전화 왔어요.”
그런 그를 울적함에서 깨워 낸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