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얼마나 멋있는데?”
“…배우님만큼요.”
“나만큼?”
“네. 딱… 배우님만큼.”
“그렇군.”
권지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평소에는 차갑고 이지적인 이미지의 그였지만 웃음을 띤 지금의 권지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빛이 났다.
“좋아. 우리 매니저님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거지.”
“….”
“나만큼 멋진 사람. 좋아, 알았어.”
권지하가 중얼대더니 다율을 놓아주었다. 벽에서 몸을 뗀 다율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들키지 않았겠지?
다율은 자신이 요령 있게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다음 행각은 더욱 대담해졌다.
***
“촬영이 취소되었다고요?”
-네. 죄송하지만 최소 2, 3일 정도는 촬영을 중단해야 할 것 같아요. 하필이면 배관을 잘못 건드려서 세트장이 물바다가 되었거든요.
“아… 일단 알겠습니다. 촬영 재개하게 되면 연락 주세요.”
아침에 나가려는데 현장 스태프가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촬영을 할 수 없단다. 다행히 사전 제작 드라마고 촬영도 막바지라 방영 일정상으로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스케줄에 빈틈이 생겼다.
“어떡하죠. 세트장 보수공사 끝날 때까지는 꼼짝없이 손 놓고 있게 됐네요.”
“좋게 생각해야지. 휴가라고 생각합시다.”
“맹 실장님이 저희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대기하래요. 배우님은 오늘 뭐 하실 거예요?”
“본가에나 좀 다녀올까 해요.”
“아, 본가가 좀 멀다고 하셨죠…?”
“응. 좀 깊은 산속에 있어서 한번 가려면 시간을 내서 가야 되네요.”
“맞네요. 그럼 이번 기회에 다녀오시면 되겠어요.”
권지하는 집에 갈 짐을 싸겠다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다율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배우님의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는데… 어떤 분들이실까?
사생활과 일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권지하였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다율조차도 그의 가족관계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팬들 역시 권지하 하면 베일에 가려진 배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가끔씩 본가에 가는 걸 보면 부모님은 계신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 사는지도 알려진 바가 없고 가족 이야기도 잘 안 하셔. 뭔가 사정이 있나?
하긴. 나도 사정이 있어서 가족 이야기나 고향 이야기는 절대 안 꺼내니까. 배우님도 그럴 수 있겠지. 웬만하면 묻지 말아야겠다.
생각을 갈무리한 다율은 권지하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줬다.
곧이어 권지하는 차를 몰고 아파트를 떠났다. 그가 점이 되어 사라진 다음 다율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냈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으나 이렇게 시간이 빌 때에만 저지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와우 기획 변태식 이사>
다율은 ‘TOP매니저11’ 뒤풀이 날 받은 명함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핸드폰에 기획사 사장들의 전화번호도 잘 저장해 두었다.
나는 나대로 살길을 마련해야지. 배우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이상 매니저 일은 그만둬야 해. 자꾸 마음 약해지지 말고 새로운 직장과 집을 찾자고.
다율은 마음을 굳게 먹고 변태식 이사의 번호를 눌렀다. 그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와우 기획 변태식 이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이다율입니다. 권지하 배우님 매니저요.”
-어어, 그 친구구나! 웬일이야. 설마 오디션 볼 마음이 생겼나?
“네. 생각 있습니다.”
-잘됐네! 내가 지금 사무실에 있거든. 당장 이리로 와.
“알겠습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후우. 다율은 전화를 끊고 나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토닥였다. 마치 권지하를 배신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으나 그래도 오디션을 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전신거울 앞에서 나름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하늘색 니트에 크림색 면바지를 받쳐 입고 로퍼를 신자 평소 매니저 일을 할 때보다 훨씬 화사한 이미지가 연출됐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밋밋해 보여 그는 권지하의 드레스 룸으로 가 왁스 뚜껑을 열었다.
평소 스타일리스트들이 권지하의 머리를 만질 때 관찰했던 대로 손을 놀리자 그럴싸한 모양으로 머리가 부풀었다.
“내친 김에 향수도 한 방 뿌릴까?”
다율은 권지하가 광고 모델인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살짝 향을 맡아 보니 흔히 말하는 어른 남자 냄새가 강렬하게 풍겨 나왔다.
“으윽. 독하지만… 멋있어!”
오늘은 오디션 보러 가는 날이니까 이렇게 남자다운 향기가 나면 좋겠지. 다율은 숨을 참고 양 손목과 머리카락에 칙 향수를 뿌렸다. 이로써 외출 준비가 완료되었다.
***
와우 기획은 홍대입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20여 분을 걷자 YU엔터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한 건물이 하나 나왔다. 들어가는 입구에 거미가 집을 짓고 있어서 잠시 식겁했으나 다율은 의연하게 3층으로 올라갔다.
“오! 어서 와!”
변태식이 입구에 나와 있었다. 그는 다율의 온몸이 흔들리도록 힘차게 악수를 했다.
“안녕하세요.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 구경은 이따가 하고 일단 오디션을 보지. 우리 임원진들이 다 같이 기다리고 있어.”
“네.”
다율은 변태식과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소 협소한 사무 공간을 지나 빈방에 들어가자 총 세 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었다. 다율은 그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다음 종이를 한 장 건네받았다.
“일단 기본적인 자질을 보자고. 거기 써진 대사를 한번 읽어 봐.”
“어… 네. 알겠습니다.”
종이에는 드라마 대본의 일부가 발췌되어 있었다. 다율은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이.제.너.를.사.랑.하.지.않.아.”
높낮이도 장단도 없는 AI식 목소리였다. 국어책 딕션에 한 임원은 의자를 고쳐 앉다가 어이쿠 하며 중심을 잃었다.
“괜찮으세요?”
“충격이 너무 크군. 자네 혹시 감정이 없나?”
“아뇨? 저 감수성 풍부한데요. 잘 울고 잘 웃어요.”
“믿을 수가 없는데… 음. 그러면 노래를 한번 보지. 평소에 좋아하는 노래 있어?”
“네. 애창곡이 있습니다.”
“불러 봐.”
다율은 며칠 전 자신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킨 발라드를 떠올렸다.
“착각은 짝사랑을 만들어 내고~”
“여기까지! 컷!”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 임원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춤은 자신 있어?”
“춤…이라면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몸놀림이 날렵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속리산은 산세가 거칠어 아기다람쥐들도 바위 틈새를 날듯이 뛰어다니곤 했다. 그때 길러진 하체 민첩성과 근력이 상당해 다율은 아직도 허벅지라면 자신이 있었다.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율은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나름 느낌에 몸을 맡긴 채 웨이브를 타는 춤이었으나 심사위원들의 눈에는 고장 난 로봇이 삐걱이는 몸짓으로만 보였다.
“그만. 제발 그만!”
“별로인가요?”
“어. 별로야.”
“이런… 어떡하죠.”
다율은 울적해졌다. 오디션에 낙방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다율을 내보내지 않고 직원더러 방송용 카메라를 갖고 들어오게 했다.
“카메라 테스트 한번 해 볼게.”
그리고 이 각도 저 각도 좌우 앞뒤를 골고루 찍어 보더니 “호오” 감탄을 했다.
“수고했어. 결과는 따로 연락 주지.”
“감사합니다.”
다율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오디션장을 빠져나왔다. 심사위원들은 쓰읍- 하아- 으음. 다양한 소리를 내며 다율의 카메라 테스트 영상을 다시 봤다.
“실력이 심각한데.”
“그렇지만 마스크가 너무 괜찮아. 저 정도 얼굴이면 무대 위에 가만히 서 있다가 내레이션 한마디만 해도 인기를 끌 거라고.”
“무엇보다도 화제성이 끝내주잖아. 저 친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재야.”
복도를 걷는 다율은 속이 쓰렸다. 좋은 기회가 왔는데 자신이 다 망친 것만 같았다. 권지하의 곁에 머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저지른 일이었으니 기왕이면 잘했어야 하는데. 연기도 춤도 노래도 엉망이었나 보다.
“향수까지 뿌렸는데….”
다율은 지나치게 꾸민 자신이 부끄러웠다. 향수를 과용했는지 코를 찌르는 머스크향도 너무 지독했다. 이제는 지끈지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너무 많이 뿌렸나 봐. 손 씻고 가야겠다.”
다율은 복도 끝에 위치한 화장실을 발견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향수의 독한 향을 의식해서일까, 갑자기 코가 간질간질했다. 자극을 받은 콧방울이 꿈틀거렸다.
맙소사. 안 돼. 여기서 변신하면 안 된다고!
다율의 온몸에 식은땀이 쫙 끼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재채기가 터져 버렸다.
“푸엥취!”
그는 그대로 복도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다람쥐로 변해 버렸다. 그로 인해 입고 있던 니트와 바지, 로퍼가 폭삭 주저앉았다. 다율은 옷더미에 깔리며 꽥 소리를 냈다.
아이고야. 누가 보기라도 하면 완전 큰일이다. 일단 서둘러서 옷부터 숨기자!
다람쥐 다율은 잽싸게 일어나 뽈뽈 기어서 옷더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 위기를 모면하려면 옷을 끌고 가서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안에서 인간으로 변해 다시 옷을 입고 나오면 될 것 같았다.
먼저 하늘색 니트를 덥석 물고 후다닥 뛰었다. 비록 옷감이 바닥에 질질 끌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 사람이 없어서 안심하고 옷을 옮길 수 있었다. 니트를 물어 나르는 데 성공한 다율은 이번에는 면바지를 입에 물었다. 바지는 상대적으로 무거웠기 때문에 힘에 부쳤으나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영차영차 바지를 끌었다.
으으…! 조금만 더…!
다율이 용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뭐야. 이 망할 회사. 이제는 화장실에서 쥐까지 나오나?”
복도 저 끝에서 걸어오던 남자의 눈에 다율이 들어왔다.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건들건들 걷고 있는 그 남자는 <시티 오브 나이트>의 조연인 천재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