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휘파람 소리가 섞인 시그널 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커다란 스크린에 VCR이 흘러나왔다. 각 조의 하이라이트를 편집한 영상이었다.
다율은 홀린 듯 화면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권지하와 자신이 같이 잠자리에 누웠고 밥을 지어 먹었으며 함께 쇼핑몰을 거닐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꿈같은 시간을 보냈구나. 새삼 지난 시간이 소중했고 방송국에 감사했다.
순식간에 하이라이트 영상이 지나가고 긴장감을 돋우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TOP매니저11. 과연 가장 자랑스러운 매니저는 누구일까요? 오늘 결과는 순수하게 팬 투표로 결정되는데요. 이제 문자 투표를 마감하겠습니다.”
객석의 관중들이 투표 마감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5, 4, 3, 2, 1. 투표 종료라는 자막이 큼지막하게 떴다.
“최종 3팀. 모두 쟁쟁한데요. 이 중에서도 특별히 한 팀의 소감을 들어 보겠습니다. 권지하 씨, 이다율 씨 지금 느낌이 어떠세요? 우승할 것 같으세요?”
MC가 다율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었다. 다율은 두 손으로 마이크를 쥐며 말을 더듬었다.
“어… 그게… 저희가 우승을 한다면… 음… 그, 그게….”
“괜찮아. 편하게 해요.”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를 토닥였다.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다율은 권지하와 눈을 한번 마주친 다음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승하고 싶습니다! 꼭 1등 하고 싶어요.”
“아주 당찬 소감인데요. 과연 결과는 어떨까요? 자, 팬 투표 결과. 지금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출연진과 관객 모두 MC가 들고 있는 카드에 시선을 쏟았다. MC는 카드의 내용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축하합니다. 배우 권지하 님, 매니저 이다율 님. 팬 투표 결과 무려 96% 득표로 우승입니다!”
요란한 축하 음악이 울려 퍼졌다. 다율은 입을 틀어막으며 얼떨떨해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그에게 꽃다발과 트로피, <상금 5천만 원>이라고 쓰인 대형 플라스틱판이 주어졌다.
“우승이신데 실감 나세요?”
“아, 아니요. 절대 실감 안 나요. 와….”
“부상이 상금 5천만 원이에요. 배우님과 몇 대 몇으로 나누실 건가요?”
MC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다율이 권지하에게 모두 주겠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권지하가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당연히 우리 매니저님 다 드려야죠. 축하합니다. 우리 매니저님.”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제가 다 가져요?”
“당연하죠.”
다율은 얼빠진 얼굴로 있다가 서서히 기쁨에 차올랐다. 이게 대체 몇 달 치 월급이냐…! 이 돈이면 내 집 마련하는 데 큰 보탬이 되겠어. 독립에 한 발짝 가까워진 느낌에 다율은 웃음이 났다.
저녁은 YU엔터 직원들과 방송국 스태프들, 프로그램 출연진들의 소속사 관계자들이 다 같이 모여 축하 파티를 열었다. 다율은 권지하와 함께 한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커다란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들었다. 기사 보도를 위한 사진도 여러 장 찍었고 주변이 시끌시끌해서 너무나 신이 났다.
너무 기분 좋다. 배우님과 추억을 만든 것 같아서 더 좋아.
다율은 금방 흥이 올랐다. 환하게 웃는 그의 주변에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저기 이다율 씨. 전 이런 사람인데 제 명함 좀 받아 주시죠.”
“어…? 와우 기획 이사님이세요?”
남자는 자신을 최근 떠오르고 있는 아이돌의 명가 와우 기획의 임원 변태식이라고 소개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명함을….”
“관심이 있어서요. 데뷔할 생각 있으면 저희 쪽으로 연락 주세요.”
“데뷔요?”
“YU랑 연습생 계약 관계 아니라면서요. 제가 다 알아봤어요.”
이게 뭔 소리야. 어리둥절한 다율의 앞으로 화려하게 꾸민 여자가 끼어들었다.
“제가 먼저 말 걸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네요. 전 J2플랜 대표예요. 다율 씨, 우리 회사에 오디션 보러 오세요.”
“저는 우리 배우님 매니저인데요?”
“알아요. 그러니까 보러 오라는 거죠. 얼굴이랑 스타성이 아까우니까.”
여자가 다율의 손바닥에 명함을 쥐여 줬다. 다율은 난생처음 듣는 소리가 어색했으나 명함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다율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나에게 다른 직업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배우님을 떠나서도 먹고살 수 있어.
다율은 바지 주머니에 그들의 명함을 잘 넣은 다음 잠깐 바람을 쐬겠다며 자리를 떴다. 호텔 라운지 바와 연결된 옥상정원은 탁 트인 구조라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어두운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도 뚜렷하게 보였다.
…달 보니까 옛날 생각이 떠오르네.
다율이 아직 아기다람쥐이던 시절 그의 어머니는 보름달이 뜰 때마다 황금다람쥐 수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율아. 우린 아주 특별한 존재야. 그 어떤 수인도 우리만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세상이 우릴 잠시 미워해서 이렇게 숨어 살지만 우리는 씩씩하고 위대한 황금다람쥐야. 그러니 힘들 때는 달님을 향해 기도하며 널 지켜달라고 해.’
다율은 오늘따라 커다랗게 부푼 달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달님, 달님.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청약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
다율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의 어깨에 서늘한 손이 내려앉았다. 퍼뜩 놀라 눈을 뜨고 보니 권지하가 옆에 와 있었다.
“왜 추운데 밖에 있어요?”
“아, 수… 술, 술 깨려고요.”
차마 배우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청약 당첨을 비는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다율은 샴페인 두어 잔을 마신 것이 전부였으나 거짓말을 했다.
“내가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난번에 그 고생을 해 놓고.”
“아 그랬죠… 죄송해요.”
“쫓아다니면서 챙겨 줘야겠네. 오늘은 더 이상 술 금지.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권지하가 다율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에게서 술 냄새를 감지하듯 냄새를 들이마셨다. 다율은 가까이 다가온 그가 부담돼 그를 밀어냈다.
“배우님, 이러지 마세요.”
“응? 뭐가.”
“조….”
“조?”
“좋아하는 분 계시다면서요.”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와요.”
권지하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율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다율은 설렜다, 실망했다 오락가락하는 짝사랑이 싫었기에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싶었다. 차라리 제대로 실망을 해서 제대로 기가 죽는 게 스스로를 위해 좋은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좀 여쭤보고 싶어서요. 그분하고… 잘 돼 가세요?”
다율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리깐 눈에는 짙고 빽빽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옅은 색깔의 입술은 우물쭈물 제대로 기를 못 폈다.
“어떨 것 같아요?”
“네? 그거야 뭐… 잘 되어 가고 있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이렇게나 잘나고 멋지고 나 따위에게도 잘해 주는 배우님이신데. 그 누가 배우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 또한 웃긴 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맞아요. 잘 되어 가고 있어요.”
권지하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자신감에 가득 차 있어 다율의 가슴은 쿵 내려앉고 말았다.
“난 그 사람 내 걸로 만들 자신이 있어요.”
“아….”
“거의 다 된 것 같아.”
“그, 그러시구나.”
다율은 권지하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절망스러운 이야기였다. 24시간 붙어 다녔는데 언제 그렇게 진도를 빼고 상대방의 마음까지 휘어잡았단 말인가. 나는 눈뜬장님이다.
시무룩한 다율의 어깨에 권지하가 다시 손을 올렸다.
“나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어떤 거요?”
“나만 질문받으면 불공평하잖아. 나도 질문 하나 하려고요.”
“네. 하세요.”
“이 매니저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혹시 마음에 둔 사람 있나 해서.”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다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처럼 다율은 운도 떼지 못했다.
“그… 그게 말이죠.”
“맞지? 좋아하는 사람 있지?”
“아… 으, 읎….”
“없다고? 그럼 부동산은 왜 들여다봐. 신혼집 알아보는 거 아니었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신혼집 아니에요.”
“아니긴. 학군까지 조사했으면서.”
어느새 권지하의 말투는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아름다운 미소가 걷히고 싸늘함만이 남았다. 다율은 그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변명을 쥐어짜 냈다.
“하, 학군은 그냥 알아본 거예요. 집값에 영향이 있으니까요.”
“그래?”
“네. 정말 그것뿐이에요.”
다율은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핑계가 통했나? 다율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려 할 때 권지하가 갑자기 벽으로 팔을 뻗었다.
“…!”
다율이 벽과 권지하 사이에 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권지하의 눈빛은 너무나 위압적이었다.
“다시 물을게.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없어?”
“그,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궁금하니까.”
권지하가 대답을 재촉하듯 다율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다율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속으로는 두 마리의 다율이 싸움을 벌였다. 언젠가 키스신 연습 상대가 되었을 때 나타났던 마음속 두 마리 다율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진실을 말하란 말야.’
‘아냐. 뭐 하러 그딴 소리를 해? 의심받을지도 몰라. 없다고 해!’
다율은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왜 대답이 없지?”
“그, 그게….”
“이다율, 대답.”
다율은 갈등 끝에 입술을 달싹였다.
“있… 있긴 한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소심하게 말을 꺼냈다. 권지하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건수 하나 잡았다는 뉘앙스였다.
“있다고?”
“네… 있어요.”
“어떤 사람인데? 말해 봐.”
다율은 뭐라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답을 내놓았다.
“아주… 멋진 사람이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권지하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