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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15화 (15/95)

15화

“우와!”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집 가서 사왔어요. 우리 매니저님 생각이 나길래.”

다율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르는 호두파이가 들어 있었다.

“어떡해. 이런 거 받아도 되나?”

“되지 왜 안 돼요.”

다율은 선물의 존재가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스캔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로드 매니저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런 선물이라니…!

호두파이를 펼쳐 놓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다율과 달리 권지하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는 다율을 데리고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율을 식탁 의자에 앉힌 뒤 피자 모양처럼 커팅된 파이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 매니저, 내가 먹여 줄게요.”

“네?”

“아 해 봐요.”

권지하가 다율 앞으로 파이 조각을 슥 내밀었다.

헉. 나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아직 화나고 슬프고 분한 상태인데 먹어도 돼?

다율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으나 솔솔 풍기는 파이 향이 너무나 감미롭고 달콤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입을 살짝 벌렸다. 푸핫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무슨 파이 하나 먹는데 이렇게 집중을 해요.”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

“맛있는지 한번 먹고 알려 줘 봐요.”

앙. 다율이 파이 끄트머리를 한입 베어 먹었다. 고소하면서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확 퍼졌다. 적당한 시나몬의 향이 파이를 더욱 고급스럽고 맛있게 만들었다.

“세…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아요.”

수인일 때는 야생에 떨어져 있는 생도토리와 생밤을 주로 먹고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가공된 견과류를 접할 때면 그야말로 미친 맛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뭐가 됐든 간에 익히고 설탕을 더하면 맛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달콤한 디저트는 다율이 인간 세상에 머무르는 것을 더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진짜 너무 맛있어. 어떡해.”

“그렇게 좋아요?”

“네. 정말 너무 좋아요. 최고로 좋아요. 미치겠어요.”

다율의 솔직한 표현이 연달아 터졌다. 권지하는 감동에 젖은 다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질투 나니까 너무 좋아하지는 말아요.”

“네?”

“파이 사 준 사람을 좋아해야지. 파이를 더 좋아하면 안 되겠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파이 사 준 사람 실컷 좋아하고 있는데요. 티를 못 내서 그렇지.

다율이 눈만 끔뻑거리자 권지하는 됐다며 그의 볼을 꼬집었다.

“하여튼 이번 일 때문에 다들 고생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소속사 식구들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이 매니저도 곤란한 연락 많이 받았죠?”

“알고 지내는 기자분들한테 연락이 많이 오긴 했어요. 답은 하지 않았고요.”

“그랬구나. 앞으로도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이 이 매니저한테 내 정보를 캐내려고 할 수 있어요.”

“…배우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것들요?”

“뭐 그렇겠죠. 그럴 때마다 잘 모르겠다고 가만히 있어 줘요.”

“…네.”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밖에. 누군지 알아야 입을 털지. 다율은 입 안에 들어찬 호두파이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때가 되면 다 밝힐 거니까.”

“…언제요?”

“말 그대로 그 사람하고 내가 준비가 되면.”

그렇게 말하며 권지하가 싱긋 웃었다. 다율은 목이 퍽퍽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이 꽉 메어 답답했다.

“목 메이나 봐. 물 갖다줄게요.”

“괜찮….”

“여기 물 마셔요.”

권지하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다율은 찬물을 마시면서 억지로 막힌 속을 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들어 가는 속이 나아지는 건 전혀 아니었다.

***

최종 순위 발표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오늘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새벽부터 리허설이 있었다. 다율은 권지하와 함께 숍에 들러 헤어와 메이크업, 코디를 마쳤다. 일찌감치 녹화장에 도착하자 시간이 좀 떴다. 다율은 권지하가 개인 인터뷰를 하는 동안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집은 위치가 참 좋네. 서울 시내라 주변 상권도 좋고 지하철역도 가깝고… 학군은 나랑 상관없으니 패스. 아, 이 집도 괜찮다. 바로 뒤에 북한산이 있어. 가을에 밤 주우러 다니면 딱이네.”

다율은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 매물을 확인 중이었다. 전월세보다는 매매 중심으로 알아보며 구석구석 집들을 뒤지다가 집값에 경악하기도 했다.

아무리 비싸다 해도 어쩔 수 없어. 서둘러 내 집 마련을 하는 것만이 답이다. 독립해야 하니까.

그가 막연하게만 꿈꿔 왔던 내 집 마련을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권지하가 곧 애인을 만든다면 자신은 미련 없이 이 집을 떠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는 권지하의 수면 파트너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지만 그에게 애인이 생긴다면 다율은 찬밥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그뿐인가? 다율은 직장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권지하의 로드 매니저로 지내는 한 분명히 그 애인을 보게 될 것이다. 그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야. 오늘 밤 자고 가.’

‘정말? 내가 꼭 안아 줄까?’

‘이 매니저. 뭐 해요. 얼른 운전하지 않고.’

다율의 상상 속에서 자신은 눈물을 뿌리며 두 남녀를 집까지 태워다 준 다음 비참하게 퇴근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다른 여자와 부둥켜안고 잔 권지하를 태우러 출근하는 것이다. 이건 맹세컨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직업이었다.

“아. 열받는다.”

기초체온이 38도가 넘는 다율이 열이 오르자 몸뚱이가 뜨끈뜨끈해졌다.

노트북 모니터만 줄곧 들여다봤더니 머리도 좀 아픈 것 같았다. 다율이 어깨와 목을 스트레칭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사람이 다가왔다.

“으악!”

“왜 그렇게 놀라요. 뭐 보고 있었어?”

한 손에 커피를 든 권지하가 다율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다율은 퍼뜩 놀라 노트북을 덮었다.

“그, 그냥요.”

“부동산 사이트 같은데. 아니에요?”

“아아, 그게… 요새 학군이 좋아서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오른 곳이 있길래 구경하고 있었죠. 대체 얼마나 하나 싶어가지고.”

“학군…? 애들 학교 다니는 거?”

“네. 보니까 그런 지역은 집값이 장난 아니네요. 제 월급으로는 무리예요.”

그 말에 권지하가 다율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이 매니저. 자녀 계획 있어요?”

“네?”

“안 그러면 왜 벌써부터 학군 좋은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요. 애 낳을 생각 있는 거 아니야?”

“어… 아이라면… 음….”

막연하게라면 모를까, 구체적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수인들은 자기랑 같은 종을 만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나날이 멸종을 향해 달려갔다. 특히 황금다람쥐는 전국에 열 마리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다율은 가문의 9대 독자였기 때문에 대를 이으라는 말을 누누이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다람쥐 수인을 만나서는 안 된다고 세뇌당하며 자라왔다.

‘황금다람쥐 신부를 만나야지 그냥 다람쥐는 안 돼!’

‘꼭 황금다람쥐랑 짝짓기를 해야 한다고요? 제 또래의 황금다람쥐 암컷을 본 적도 없는데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어, 이눔아!’

그의 할아버지는 극강 보수파로서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니 다율에게 일찌감치 관심을 보였던 일반 다람쥐 누님들은 할아버지가 쫓아낸 지 오래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는 다율 혼자 생활하느라 모태솔로로 살아왔다.

그러니 자녀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그다지 없었다. 다만 이렇게 권지하가 물어보니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황금다람쥐들만의 ‘비밀’에 관한 것이었다.

‘음. 정 아이가 갖고 싶으면 황금다람쥐들의 비밀스러운 방법을 쓰면 되지만….’

에이, 아니다. 그런 상상은 하지 말자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무슨.

다율은 흠흠 헛기침을 하고 태평한 목소리를 냈다.

“자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 난 둘이 좋은데. 아들 하나 딸 하나.”

“배우님, 자녀 계획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있으세요?”

“아니 뭐…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어떤 조합이 좋을까 막연하게 생각해 봤지.”

다율이 눈을 부릅떴다. 좋아하는 사람과 잘 되어 가고 있는 게 틀림없구나. 벌써 결혼해서 아이 낳는 계획까지 세운 거야!

다율의 가슴속에 소나기가 쏴아- 내리는 동안 조연출이 그들을 데리러 왔다.

“스탠바이 하실게요!”

“출연진분들 어서 입장해 주세요. 곧 생방송 시작합니다.”

다율과 권지하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 무대에 올랐다. 벌써 여러 번 서 봐서 익숙해지긴 했지만 다율은 아직까지 강하게 내리쬐는 라이트에는 적응이 어려웠다. 반면에 권지하는 눈 부신 조명이 익숙하다는 듯 똑바로 서서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멋지시네. 나랑 비슷하게 입었는데도 옷태가 달라.

생방송을 맞이해 두 사람은 페어룩을 맞춰 입고 나왔다. 권지하는 우월한 피지컬을 돋보이게 해 주는 하얀 셔츠와 네이비색 슬랙스 차림, 다율은 그와 같은 색조를 썼지만 조금 더 캐주얼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나와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무대 중앙에 서자 방청객들이 술렁였다.

“헉, 권지하 미쳤다. 실물 루브르 조각상 그 자체. 다리가 2미터는 되는 것 같아.”

“이다율도 귀엽다. 저거 넥타이랍시고 맨 거야? 깜찍하네.”

다율은 자신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움찔거렸다. 그에 비해 권지하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객석에 있는 팬에게 가볍게 손 인사를 해 주기까지 했다.

“아악!”

계를 탄 팬은 <지하암반수> 슬로건을 움켜쥐고 뒤로 나자빠졌다. 이다율은 그만 웃고 말았다.

“이제 좀 덜 떨리죠?”

권지하가 소곤거렸다.

“네. 조금은요.”

이윽고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왔다. 최종 TOP3 팀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스튜디오는 곧 생방송 준비를 마쳤다.

“바로 가실게요. 셋, 둘, 하나!”

조연출이 슬레이트를 쳤다. 탁! 소리와 함께 메인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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