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집 안 청소라도 하면 기분이 좀 좋아질까.
한참 만에 일어난 다율은 주방으로 가 설거지를 했다.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하게 그릇을 닦고 행주로 인덕션을 훔쳤다.
그다음으로는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기로 거실을 밀었다. 먼지가 쏙쏙 빨려 들어가면서 집 안 곳곳이 상쾌해지는 듯했다. 먼지떨이로 창틀까지 꼼꼼하게 청소하고 마른걸레로 집 안 구석구석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 착실하게 일한 드럼세탁기가 종료음을 울렸다.
“빨래 다 됐네. 널어야겠다.”
다율은 세탁기 문을 열고 빨랫감을 꺼냈다. 제법 많은 양을 돌렸기에 옷감 무게가 상당했다. 나누어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세탁 바구니에 빨랫감을 차곡차곡 담던 중이었다. 다율의 핸드폰에서 띠링 새로운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누구지. 배우님인가? 벌써 도착하셨나 보네.
다율은 싱긋 웃으며 식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소식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다율이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배우님이… 윤혜미 배우와… 열애설이?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머릿속이 텅 비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다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다율은 우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연예면은 5분 전에 올라온 두 배우의 열애설 기사로 도배 중이었다. 너무 기사가 많아 정신이 없었다. 다율은 가장 조회수가 많은 기사를 두서없이 눌러 보았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몰래 연애 중인 A군 B양은 권지하와 윤혜미였다.]
-권지하와 윤혜미가 열애 중이다. 연예계 소식통에 의하면 두 사람은 최근 연인으로 발전, 드라마 촬영장에서 비밀 연애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권지하 측은 아직까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대다수 드라마 스태프들은 이들의 연애를 알고 있었다고.
다율의 손이 벌벌 떨렸다. 이 기사가 정말일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도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배우님이 연애를 했을 리 없어. 만약에 두 사람이 만났다면 내 눈에 띄었을 거야. 그러니까 이건 사실이 아니야.
다율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기사 내용을 부정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사가 업데이트되자 맥이 탁 풀렸다.
[윤혜미 소속사 입장 표명 ‘배우 사생활 존중한다. 좋은 만남 가지길.’]
-배우 윤혜미의 소속사 넘버원 액터스가 권지하와의 열애설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같은 드라마에서 만나 연인을 연기하며 자연스럽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윤혜미 측근의 설명이다.
“아….”
다율은 순간 휘청했다. 그 바람에 세탁 바구니가 엎어지며 빨랫감이 쏟아져 나왔다. 다율은 빨래를 다시 담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진짜야…? 진짜인 거야?”
배우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율은 즉시 권지하의 핸드폰 번호를 찾았다. 본인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두려움이 찾아왔다. 만약 그의 입에서 ‘맞다’는 소리가 나오면 그 절망감은 어떻게 버틸 것인가. 또한 ‘왜 그런 걸 묻느냐’고 언짢아한다면 그 핑계는 어떻게 댈 것인가.
“웃긴다. 로드 매니저 따위가… 뭘 참견하겠다고… 이러는 거야….”
권지하에게는 자유롭게 연애할 권리가 있었다. 또 그런 일에 관해 굳이 매니저에게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다율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가슴이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것같이 아파왔다.
“…흑.”
다율의 갈색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름다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줄도 모르고 짝사랑이나 하고 있었다니. 다율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지잉- 지잉.
알고 지내는 기자들과 지난번 회식 때 명함을 주고받았던 관계자들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다율은 받지 않았다. 그들이 문자를 남겼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수십 통의 문자가 쌓이는 동안 권지하에게는 단 한 번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게 더 다율을 비참하게 했다.
***
“백주 대낮에 이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권지하는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진작 두 동강 낸 상태였다. 데뷔 이래 6년간 이렇게 화가 난 권지하의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매니저 백장훈은 진땀이 났다.
“진정 좀 해. 우리도 사태 수습 중이야. 기다려라. 응?”
“어떤 새끼가 이따위 쓰레기 기사를 뿌렸습니까? 분명히 주범이 있을 거라고요.”
쾅. 권지하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대기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후우….”
권지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잠시 액션신 촬영을 하고 돌아왔더니 개 같은 기사가 온 인터넷 게시판을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 심지어 상대방 측은 열애 인정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내놨다.
“이거 설마 넘버원 액터스 소행입니까? 윤혜미 소속사요. 거기 요새 주가 땅굴 판다던데 저랑 엮어서 화제성 좀 끌어 보려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건 확실하진 않지.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잖아.”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해요.”
그가 싸늘하게 눈매를 굳히며 백장훈을 쳐다봤다.
“형, 핸드폰 좀 줘 봐요.”
“핸드폰은 왜.”
“제 거 박살 났으니까요.”
“어디 전화하려고 그래.”
“형 핸드폰에 저장된 기자들한테 싹이요.”
“뭐 하러?!”
“열애설 부정해 봤자 지금은 넘버원 액터스 언플 못 이겨요. 여자가 인정했는데 남자는 발뺌한다고 욕먹기 딱 좋지.”
“그럼 어떡하려고.”
권지하가 백장훈의 핸드폰을 받아 들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긴요.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30분 후 포털 사이트에는 특종 기사가 떴다.
[권지하 열애설에 심경 밝혀-“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권지하가 사랑에 빠졌다? 윤혜미 아닌 또 다른 열애 암시하다]
방구석에서 훌쩍이던 다율은 이 기사를 보고 추풍낙엽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아까 기사도 충격이었는데 이것도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대상만 바뀌었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마찬가지잖아…!
다율은 거실 바닥을 좌로 세 바퀴 우로 세 바퀴 구르며 오열했다. 머릿속에는 망상이 가득 찼다.
‘저는 옛 물주머니입니다. 앞으로 애인분이 하실 일을 인수인계해 드릴게요. 먼저 꼭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시고요… 누우실 때는 배우님 품에 쏙 들어가세요. 배우님은 새벽에 체온이 많이 떨어지시기 때문에 한 번쯤 중간에 일어나 꽉 껴안아 주는 것도 좋답니다.’
그러면 상상 속의 미녀가 아름답게 웃으며 다율과 악수를 했다.
‘알겠어요. 그간 수고 많으셨고 앞으로는 제가 그 역할 잘 해 볼게요.’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봐. 아흐흑!”
다율은 빨랫감 위를 구르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스캔들 소동이 한소끔 가라앉는 동안 더럽혀진 빨래를 다시 헹궈 널었다. 그리고 옷이 바싹 마를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오로지 권지하만을 생각했다.
그동안 권지하의 물주머니로 쓰이고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착각에 빠졌었구나. 비록 이번 건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동안 내가 쓸모없는 단꿈에 취해 있었다는 건 잘 알겠어. 내가 배우님께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는 것도.
비록 권지하가 좋아한다는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지만 다율은 이미 진 기분이었다. 애당초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고 심지어 인간도 아닌 자신이 우월한 권지하의 이상형에 부합할 리 없었다. 다만 속이 쓰리도록 부러웠다. 권지하의 마음을 녹인 그 사람이 못 견디도록 부러워 자꾸만 뜨거운 것이 울컥거렸다.
다음 날도 다율은 아침부터 청소를 했다. 바깥 날씨가 좋았지만 산책조차 하기 싫었다. 끼니를 챙겨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아 내리 굶으며 집안일을 했다. 일에 몰두하며 잡생각을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후 늦은 시간이 되고 유리창에 마른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집주인이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다율은 심장이 철렁했다.
배우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마주치면 어떤 표정으로 배우님을 봐야 하지?
하지만 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율은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권지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떠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옷차림, 늘 여유로워 보이는 웃음도 그대로였다.
“아… 네.”
“나 때문에 직원들이 곤란을 겪은 모양이던데 미안해서 어쩌나.”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가벼운 투로 말했다. 자연스럽게 스캔들 화제를 꺼내는 그의 태도에 다율은 가볍게 상처 입었다.
“미안해하실 일은… 전혀 아니에요.”
다율이 고개를 떨궜다. 권지하는 다율이 평소답지 않다고 느꼈다. 다른 때엔 자신을 맞이할 때 신이 나서 슬리퍼도 벗어 던지고 달려들더니만 오늘은 어떻게 된 게 기운이 하나도 없다. 권지하는 다율을 이리저리 살피고 나서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요?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아니에요. 짐 이리 주시면 제가 정리할게요.”
다율이 현관에 놓인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캐리어 옆에 커다란 봉투가 하나 같이 있었다.
“어?”
“이건 우리 매니저님 선물.”
권지하가 다율에게 봉투를 건넸다. 안을 들여다보니 납작한 종이상자가 여러 개 들어 있고 겉에는 <호두파이>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