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다율의 동공이 정신 사납게 흔들렸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건 분명 권지하의 목소리요, 자신을 찾는 부름이었다. 다율은 패닉에 빠진 나머지 사고가 정지돼 인간으로 변해야겠다는 판단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뽀르르 침대 위를 가로질러 바닥으로 점프했다.
툑. 발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려온 다율은 헐레벌떡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괜찮아요? 잠깐 들어갈게요.”
권지하가 곧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율은 몸을 웅크려 말고 벌벌 떨면서 권지하의 움직임을 살폈다. 침대 밑이라 그의 발목밖에 안 보였지만 그래도 그가 걸어 다니는 동선은 파악이 됐다.
“어라. 어디 갔지? 분명히 소리가 났는데.”
의문 섞인 음성에 다율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권지하 입장에서는 간밤에 얌전히 방에 들어간 매니저가 사라진 셈이 된다.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별일이네. 옷은 왜 또 이렇게 곱게 벗어놨어?”
권지하가 널따란 방 안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다율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설마 우리 매니저님 어디 숨은 건 아니겠죠?”
농담조의 목소리였으나 간이 콩알만 해진 다율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예를 들어 옷장 안이나….”
권지하가 벌컥 옷장 문을 열었다.
“아니면 침대 밑이라든가.”
슬리퍼를 신은 발이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다율은 모든 게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저벅저벅. 권지하의 발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율은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던가. 다율의 눈에 침대 다리가 보였다.
그래. 바로 저거다. 핫챠!
다율은 펄쩍 뛰어 침대 다리 뒤쪽으로 매달렸다. 네 다리로 힘껏 침대 다리를 감싸자 마치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 같았다. 이렇게 하면 사각지대에 놓이는 셈이라 권지하가 일어서도 저를 못 보고 침대 밑을 들여다봐도 저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다율은 눈을 꼭 감고 제발 권지하가 다른 데로 이동하기를 빌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아, 거실 화장실에 있나?”
권지하가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다율은 침대 다리를 부여잡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헉헉. 다람쥐 살려.
하지만 긴장을 풀기에는 일렀다. 다율은 잽싸게 뛰어 안방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벽에 기댄 채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인간이 되고 싶다. 어서 인간이 되게 해 주세요. 제발요!
약 5초가 지나고 뭉게뭉게 연기와 함께 다람쥐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인간 다율이 펑! 소리를 내며 알몸으로 나타났다. 그는 비로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매니저. 욕실에 있어요?”
“헉.”
어느새 권지하가 다시 안방에 도착해 있었다. 미친다, 미쳐. 정신 하나도 없네! 다율은 눈앞이 핑핑 돌았다. 하지만 뭐라도 변명을 해야 했다. 그는 우선 권지하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 우엑!”
“설마 토해요?”
“읍… 네! 우욱.”
다율은 격렬하게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권지하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내가 등 두드려 줄게요. 문 열어 봐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토한다면서요. 어서요.”
“한번 토하고 나니까 완전 멀쩡해졌어요! 지금 씻고 나갈게요!”
다율은 최대한 발랄하게 대답했다. 필사의 연기력을 담아서였다.
“정말이죠? 다행이네요. 아침으로 북엇국 준비해 놨으니 같이 먹어요.”
“네, 네! 금방 가요.”
다율은 서둘러 문을 열려고 했다가 자신이 알몸임을 깨달았다.
아이고. 아무리 급해도 사람 꼴은 하고 나가야지.
다율은 대충 씻고 벽에 걸린 검은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권지하 전용이라 사이즈가 무척 크고 기장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으나 어쩔 수 없었다.
“엇.”
욕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권지하와 마주쳤다. 다율도 놀랐지만 권지하도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설마 수상함을 감지한 건 아니겠지. 다율은 긴장하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냈다.
“왜 그러세요?”
권지하의 시선이 다율의 턱 끝에서 시작해 목덜미와 쇄골을 훑었다. 그러다가 살짝 벌어진 옷자락에 멈추었다.
“아, 죄송해요. 배우님 가운인데 함부로 입어서.”
“….”
“당장 갈아입을게요.”
권지하는 대답 없이 다율의 허리 아래로 눈길을 옮겼다. 가운이 헐렁해 가운 자락 사이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며칠 전 움켜쥐었던 발목 위쪽으로 분홍색 무릎과 매끈한 허벅지가 쭉쭉 뻗어 있었다. 마냥 마른 줄로만 알았는데 허벅지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네. 지금 바로 갈아입어야겠네요.”
“서두를게요. 죄송합니다.”
다율이 주섬주섬 옷자락을 여미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권지하의 시선은 다율의 하얀 발목과 언뜻언뜻 드러나는 종아리를 향했다.
***
옷을 갈아입은 다율이 식탁으로 와 보니 북엇국을 곁들인 아침밥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양이 1인분뿐이었다. 다율은 식탁에 마주 앉은 권지하에게 물었다.
“배우님은 안 드세요?”
“난 먹었어요. 점심은 부산 가서 먹으려고요.”
“아, 그러면 제가 회사까지 모셔다드릴까요?”
“아니. 내가 부산 가 있는 동안 이 매니저 휴가 주라고 사무실에 말해 놨어요.”
“정말요?”
“응. 우리 매니저님 딱 하루라도 푹 쉬었으면 해서요. 부산은 장훈이 형이랑 잘 다녀올게요.”
다율은 그의 배려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로드 매니저에게 휴가를 챙겨 주는 연예인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 바쁜 시즌에 손수 나서서.
“배우님…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받기만 하다니 무슨. 나도 내가 알아서 매니저님한테 받아낼 거예요.”
“뭘요?”
“그런 게 있어요.”
권지하는 다율의 덜 마른 머리를 가볍게 털어낸 다음 손에 직접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너무 맛있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히 먹어요.”
북엇국 국물이 칼칼하고 시원했다. 이게 바로 해장이라는 것인가. 다율은 수저를 바쁘게 놀리며 속을 개운하게 만들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다율은 권지하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왔다. 대본집과 옷, 시계, 늘 들고 다니는 취미용 카메라를 챙겨 캐리어를 꾸렸다. 겨우 1박 2일짜리 촬영인데도 생각보다 챙겨야 할 게 많아 금방 가방이 빵빵해졌다.
“이 매니저도 싸 가지고 가고 싶네요.”
“저를요? 제가 어떻게 이 작은 가방 안에 들어가요.”
“그러게. 손바닥만 한 동물이었으면 쏙 들어갈 텐데.”
권지하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율은 심장이 철렁했다. 손바닥만 한 동물이라니. 그거 완전 내 이야기 아니야?
“제, 제가 동물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런가? 흠….”
다율은 권지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설마 내가 다람쥐인 채로 욕실에들어가는 걸 본 건 아니겠지? 다율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하긴. 이 매니저는 사람이지 주먹만 한 동물이 아니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권지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율의 긴장의 끈도 탁 풀렸다.
역시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보고 있어. 괜한 걱정 하지 말자.
다율은 비로소 안심하고 식사를 마쳤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네. 이 매니저도 잘 쉬고 있어요.”
다율은 현관에서 권지하를 길게 배웅했다. 그가 나가자 넓은 집 안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항상 둘이 있다가 혼자 있으려니 적응이 안 되기도 했고.
뭐 하고 놀까. 배우님은 내일 부산 촬영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올 거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널널한데….
속이 안 좋으니 일단 드러누워서 쉬어 봐?
다율은 회식 다음 날의 K-직장인답게 배를 문지르며 침대에 편히 누웠다. 그리고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트위터에 접속해 봤다. 마침 실시간 검색어 트렌드가 ‘권지하X이다율_TOP3_진출’이었다.
검색어를 눌러 보니 수천 개에 이르는 트윗이 좌라락 펼쳐졌다. 권지하 팬들은 축제 분위기를 즐기며 방송 장면 한 컷 한 컷을 캡처해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런가 하면 다율과 그를 엮어 ‘달달 모멘트’로 편집해 놓은 계정도 있었다. 다율은 생긋 웃으며 권지하와 자신을 잘 어울린다고 말해 주는 트윗마다 좋아요를 눌렀다.
그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트윗은 바로 팬아트였다. 다율과 권지하가 포옹하는 장면을 SD캐릭터처럼 그리고 다율에게는 다람쥐 귀와 꼬리를 달아 놓은 그림이었다.
“우와 귀여워. 근데 좀 찔린다.”
다율은 헤실헤실 웃으며 그 밑에 달린 댓글을 살폈다. 그런데 저번에 봤던 [이다율조빱같은게나대서알계팜]이 또다시 분노의 댓을 남겨 놓은 것이 보였다.
ㄴ망상종자야 당장 팬아트 지워라. 배우가 이따위 하찮은 매니저랑 껴안은 것도 수치스러운데 이걸 좋다고 그렸냐?
이 사람 또 이러네. 다율은 울컥했다. 그런데 더 상처가 되는 것은 그 트윗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ㄴ나도 지우는 데 한 표. 요즘 망붕들 선 넘네요. 지금 한창 드라마 찍는데 차라리 윤혜미 배우랑 엮였으면 엮였지 남자 매니저는 좀 아닌 듯. 배우님도 생각이 짧았어.
ㄴ같은 생각입니다. 배우님이 매니저 좋아할 일도 없는데 이거 너무 과하네요. 소속사는 이 글 보면 의견 반영 좀 해 주세요.
일침을 놓는 댓글들에 다율은 입이 댓 발 나왔다.
왜 트위터에는 싫어요 버튼이 없는 걸까. 다율은 불만에 가득 찼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런 의견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울컥하는지도 몰랐다. 권지하가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는 건 다율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워낙에 차갑고 선을 잘 긋는 사람이다. 일은 일, 사생활은 사생활로 철저하게 나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게 다정하고 살갑다는 이유로 헛된 마음을 품었더랬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자신의 영역 안에 속해 있는 매니저이기 때문이다. 편안한 잠을 선사해 주는 핫팩이기 때문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코끝에 희미하게 권지하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러자 배는 더 우울했다.
착각은 짝사랑을 낳고 결국은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 사랑은 끝난다고들 하지.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처럼 말이야.
다율은 시답잖은 사랑 노래를 부르며 쓰린 속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