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매니쥐먼트-11화 (11/95)

11화

“월급 나오면 갚을게요.”

“하하. 갚을 수 있으면.”

“얼마길래….”

무심코 티셔츠 한 벌의 가격표를 확인한 다율은 핑 머리가 돌았다. 옷 한 벌이 제 월급보다 비쌌다.

“이, 이렇게 비싼 걸….”

“받아 주세요. 안 받으면 화낼 거예요.”

권지하가 쇼핑백을 내밀며 다율의 볼을 꼬집었다. 다율은 옷을 받아 들며 턱에 쪼글쪼글 호두를 만들었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배우님이 돈이 많으시다지만 일개 매니저인 나한테 이렇게까지 큰 돈을 쓰시다니. 정말 착한 분이셔.

“잘 입을게요.”

다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요. 입으라고 사 주는 건데. 특히 아까 그 셔츠만 입은 모습 꼭 보고 싶어요.”

“네!”

권지하는 흡족하게 웃었고 다율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환하게 웃었다.

쇼핑을 마친 둘은 카메라를 대동하고 건물 바깥 광장으로 나왔다. 입구부터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 중이라는 소문이 싹 퍼진 것이다.

“어떡해! 권지하다! 진짜 잘생겼어!”

“매니저도 같이 있어. 예능 촬영하나 봐. 대박이다.”

찰칵찰칵. 사방에서 핸드폰 카메라 찍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람들은 서로 밀고 다투며 두 사람을 더 잘 보겠다고 난리를 쳤다. 오늘을 위해 임시로 섭외한 경호 요원들이 다율과 권지하에게 길을 터 주었다.

“이러니까 꼭 스타가 된 것 같네요.”

“스타 맞지. 내 매니전데.”

권지하가 미소 지으며 다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평소처럼 서늘한 손이 자신을 감싸자 다율은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어? 아이스크림 판다.”

광장 한가운데로 나온 다율의 시야에 아이스크림 트럭이 들어왔다.

“우리 저거 먹어요.”

“그럴까?”

두 사람은 알록달록 꾸며진 아이스크림 트럭으로 걸어갔다.

“피칸 맛이랑 바닐라 맛 주세요.”

“피칸은 우리 매니저님 취향일 거고 내가 바닐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같이 지낸 지가 벌써 몇 달인데요. 저는 배우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어요.”

다율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권지하는 두 사람 몫의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며 피식거렸다.

“정말로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24시간 붙어 지내는 걸요.”

“음… 조만간 그게 아니게 될 텐데.”

“뭐라고요? 못 들었어요.”

“맛있게 먹으라고요.”

권지하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터라 다율은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다율의 입에는 늘 먹던 것보다 오늘 이 아이스크림이 유난히 달콤했다.

“고마워요. 옷도 사 주시고 아이스크림도 사 주시고… 비록 방송이지만 배우님하고 꼭….”

“꼭 뭐요?”

데이트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친구가 된 것 같다고요.”

“아, 정말?”

“하하. 네… 좋은 형 동생 말이에요.”

“흠… 우리 매니저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어… 제가 말실수한 건가요?”

다율의 물음에 권지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생각해 온 줄은 몰랐어서.”

그렇게 말하며 권지하가 손을 뻗어 다율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다율은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왜요.”

“입가에 다 묻히고 먹길래.”

“헉. 제가요?”

다율은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근에 있던 스태프 중 한 명이 휴지를 주섬주섬 꺼냈다. 하지만 권지하가 한발 빨랐다. 그가 자세를 낮춰 셔츠 소매로 다율의 입가를 닦기 시작한 것이다.

“배우님. 옷 더러워지잖아요.”

“세탁하면 되지. 참고로 세탁은 매니저님 시킬 거예요.”

“아….”

“가만히.”

다율은 우뚝 멈춰 선 채로 가만히 권지하의 손길을 받아내야만 했다. 이건 또 처음 겪는 일이라 지나치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서늘한 손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것도 너무 벅찼다.

“미쳤어. 지금 아이스크림 닦아 주는 거야?”

“이건 역사적인 장면이다. 권지하 너무 다정해!”

“눈에서 꿀 흐른다.”

거리를 두고 구경하던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가 다율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렸다.

“다 됐다. 이제 갑시다.”

“네, 네.”

다율은 뻘쭘하게 걷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팔다리가 같이 나갔다.

“하하. 우리 매니저님 왜 갑자기 긴장하고 그래요.”

“죄, 죄송해요.”

권지하가 웃으며 다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편하게 걸어요. 천천히 가죠.”

다율은 창피해 다람쥐 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도심의 쇼핑몰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

“이번 3회차는 이 쇼핑몰 장면들이 나갈 예정이에요. 이걸로 오늘 촬영 마무리입니다.”

PD가 해산을 알렸다. 다율과 권지하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회사 차량에 올랐다.

“오늘 재밌었어요?”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채우며 권지하가 물었다.

“네. 외출다운 외출을 한 느낌이에요.”

사실 다율은 늘 촬영장과 숙소만 오가는 생활을 했다 보니 이렇게 권지하와 바깥에서 단둘만의 시간을 가질 일이 없었다. 24시간을 붙어 지내기는 하지만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물주머니로 일을 했으니 늘 근로자와 고용주 관계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한가득 쳐다보는 데다가 예능용 촬영이었다고는 해도 마치 데이트 같았어. 왜냐면 배우님이 날 다정하게 바라봐 줬고 어깨도 감싸 줬고….

다율의 광대가 치솟았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꾸는 거야. 데이트는 무슨. 촬영이다, 촬영!

혼자 웃었다 정색했다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는 다율을 권지하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쳐다봤다. 언제 봐도 재미있는 매니저였다.

시간이 흘러 스튜디오 녹화 날이 다가왔다. 다율과 권지하는 맹 실장과 함께 TVO 사옥으로 향했다. 방송국 앞에는 두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넘쳐났고 환호성이 엄청났다. 다율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후다닥 안으로 들어오자 이미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어어, 이게 누구야. 화제성 투 톱 아니야?”

‘TOP매니저11’ PD가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다율과 권지하를 발견하고 손뼉을 쳤다.

“이게 다 PD님과 제작진 여러분 덕분이죠. 물론 저랑 매니저가 잘났긴 합니다만.”

권지하가 칭찬을 받아치며 PD와 악수했다. 다율이 꾸벅 인사를 하자 스튜디오 안에 삼삼오오 앉아 있던 타 기획사 매니저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실제로 보니까 진짜 귀엽네. 예능감도 있고 얼굴도 곱상해서 아이돌 시키기에 괜찮아 보이는데 왜 매니저를 하고 있지? 혹시 YU엔터에서 신인으로 키우고 있는 거 아닐까?

그들의 소곤거림을 듣지 못한 채 다율은 무대 위로 올랐다. 오늘의 촬영 분량은 바로 순위 결정식이었다. 지난 보름간은 ‘TOP매니저11’이 온 브라운관과 OTT, SNS, 동영상 사이트를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퀴즈를 컨셉으로 한 첫 방송을 시작으로 2화 때 관찰 예능으로 반응이 대폭발했고, 그 여파에 힘입어 평일에 그들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 순차적으로 공개되었다. 그러는 동안 팬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모든 화제의 중심에는 권지하와 이다율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그러면 TOP매니저11. 중간 순위 발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권지하와 이다율이 나란히 무대에 나타났다. 오늘따라 남성적이면서도 금욕적인 컨셉으로 올 블랙 패션을 한 권지하, 그리고 풋사과색 니트를 걸친 이다율이 등장하자 패널과 방청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11팀이 모두 단상에 올라 자기 파트너와 나란히 무대에 섰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찍는 것 같네요. 긴장돼요.”

“같이 찍는데 뭐가 긴장돼요. 떨지 말아요.”

조명이 꺼지자 이다율이 소곤거렸다. 권지하는 이다율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살짝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서늘한 체온이 전달되자 이다율은 긴장이 풀리기는커녕 더욱더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퀴즈 쇼에서 살아남은 6팀이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쟁쟁한 유명 연예인으로, 매니저들과의 케미스트리도 좋아 어느 정도 화제를 끌고 있었다. 권지하와 다율만큼은 아니더라도, 팬 투표에서 어느 정도는 표를 건졌을 것이라는 게 다율의 분석이었다.

이렇게 되면 예측이 어려워.

다율은 긴장으로 손이 차가워졌다.

“자! 그러면 대망의 TOP3를 공개하겠습니다!”

긴장감을 고조하는 배경음악이 깔렸다. 다율도 초조해졌다. 드럼 비트가 빨라지고 MC가 비장하게 마이크를 들었다.

“결과는… 30초 뒤에!”

“아아!”

관객들이 탄식했다. 다율 역시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아이고야.

광고가 나가는 동안 출연자들은 그대로 무대 위에서 대기해야 했다. 다율은 죽을 맛이었다.

“30초가 너무 길어요….”

“이 매니저.”

“네?”

“나랑 30초만 눈싸움해요.”

권지하가 고개를 기울여 다율과 눈높이를 맞췄다. 다율은 난데없는 눈싸움에 당황했으나 눈을 깜빡이면 진다는 생각에 눈꺼풀에 힘을 줬다.

“10, 9, 8, 7….”

MC가 남은 시간을 카운트하는 동안 두 사람은 하염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너무나 새까맣고 깊어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읽기 힘든 권지하의 눈빛. 다율은 늘 그 검은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니 더 그랬다. 겨우 몇십 초라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다율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때 권지하가 다율을 깨워냈다.

“다 됐다.”

“아, 벌써요?”

“3, 2, 1! 화면 보시죠!”

그들의 등 뒤에 있는 전광판이 바뀌었다. 카메라가 다율과 권지하를 클로즈업했다. <팬 투표 1위, 퀴즈 1위, 합산 1위>라는 자막과 함께였다.

“TOP3 중 1위는 바로 권지하 배우와 매니저 이다율 씨입니다.”

팡! 팡파르가 터지며 꽃가루가 휘날렸다. MC가 그들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다율은 얼떨떨해하며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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