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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쥐먼트-10화 (10/95)

10화

지금까지 화보에 관여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다율은 권지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사진작가가 다가왔다.

“촬영 컨셉이 갈망이거든요. 그런데 권지하 씨 혼자 컨셉을 표현하려니 어려움이 있는 것 같네요. 그래서 두 사람이 나오는 컨셉으로 바꾸려고 해요. 매니저님이 같이 포즈 좀 취해 주세요.”

“제, 제가 포즈를요?”

“아. 프레임에 얼굴이 같이 담기는 건 아니고요. 종아리랑 발목, 발 정도만 나올 것 같아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제 다리가 나온다고요?”

“이런 구도를 생각 중이에요. 한번 봐 보세요.”

사진작가가 컨셉 스케치를 보여 주었다. 메인 모델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다. 또한 그의 손이 앉은 이의 발목을 움켜쥐고 있어 상당히 관능적인 컨셉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까 갈망이라는 컨셉이 좀 와닿죠?”

“아… 그렇구나. 이해했어요.”

“다율 씨는 가만히 앉아서 한쪽 다리를 내놓고 있기만 하면 돼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객관적으로 어려운 포즈는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해도 상관없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반바지로 갈아입고 조명 앞에 서자 다율은 긴장이 됐다. 그렇지만 스태프들은 셔츠에 반바지만 입었는데도 모델 느낌이 난다는 둥, 어쩌면 이렇게 다리가 곧게 뻗고 매끈하냐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다율로서는 적응이 안 되는 반응이었다.

“그냥 이러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하얀 의자에 앉은 다율이 목 뒤를 긁적였다. 그 바로 옆 바닥에 앉은 권지하가 소리 내 웃었다.

“맞아요. 그냥 있으면 내가 손 뻗어서 잡을 거예요.”

“손을 뻗어서… 그렇구나.”

권지하는 다율이 준비하는 사이 머리에 물을 적시고 신발을 벗어 흐트러진 이미지를 연출한 상태였다. 아까처럼 단추를 끝까지 잠가 완벽하고 금욕적인 남자를 연출했을 때도 멋있었지만 지금처럼 셔츠를 풀어헤치고 머리가 흐트러진 모습도 예술이었다.

차마 두근거린다는 말은 못 하고 다율은 멀뚱히 의자에 앉아 사진작가의 사인만을 기다렸다.

“자, 스탠바이 하실게요. 슛 들어갑니다. 권지하 씨 포즈 취해 주세요!”

사진작가가 신호를 주기 무섭게 권지하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걷히면서 강렬한 눈빛이 드러난 것이다.

권지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서서히 다율 쪽으로 긴 팔을 뻗었다.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치 숲속에 살 때가 연상되어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어린 시절 다율은 깊은 골짜기에서 뱀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뱀이 순식간에 다가와 다율의 발목을 잡아채 벗어나느라 용을 썼었는데 그때와 느낌이 너무나 비슷했다.

왜 이렇게 배우님이 무섭지.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발목을 뒤로 뺐다. 그러자 권지하가 확 손을 뻗어 다율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읏.”

힘이 너무 세. 못 벗어나겠어…!

손이 워낙 커 한 손에 다율의 발목이 거의 다 잡혔다. 권지하가 힘을 꽉 주자 다율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에서 무서운 천적을 만나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 같았다.

“배, 배우님.”

다율이 발목을 빼려는 순간. 권지하는 오히려 다율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의 발목에 제 입술을 묻었다. 다율은 경악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조금만 이러고 있어요.”

“배우님…”

“잠깐만, 응?”

권지하가 다율을 올려다봤다. 다율이 도망가지 않기를 원한다는 눈빛이었다. 다율의 가슴이 미친 듯 뛰었다. 꼭 자신에게 집착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사진작가가 컷을 외쳤다.

“오케이. 방금 너무 좋았어. 두 분 합이 정말 잘 맞네요.”

사진작가는 박수까지 치며 두 사람을 칭찬했다. 다율은 그 틈을 타 권지하의 손아귀에서 발목을 빼냈다.

“저, 저… 잠시 물 좀 마시고 올게요.”

다율은 맨발 그대로 스튜디오를 가로질렀다. 정수기가 어디 있는지 사실 알지도 못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가슴이 너무 벅차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소용돌이가 이는 것 같기도 했고 천둥 번개가 치는 것 같기도 했다.

“후우… 제 명에 못 살겠네.”

다율은 아무도 없는 소품실에 들어가 숨을 몰아쉬었다. 거울을 보니 자신의 낯빛은 가관이었다.

“얼굴이 너무 빨갛잖아!”

창피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배우님한테 들키면 어떡하지…? 다율은 발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다율의 괴로움과 무관하게 인터넷으로 선공개된 화보는 큰 화제를 끌었다. 폭발적인 조회수와 리트윗수를 기록한 것은 물론 팬들의 극찬은 유난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그가 사진 속에서 보여 준 뜨거운 눈빛이었다. 대체 누굴 저렇게 갈망하는 것이냐, 집착의 끝판왕이다, 내가 발목 주인이면 눈빛에 녹아서 이미 죽고 없다 등등 팬들의 주접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다율은 팬들의 댓글을 모니터링하며 자주 얼굴을 붉혔다. 촬영 날 자신을 올려다보며 갈망의 눈빛을 보내던 순간 자신의 가슴은 얼마나 떨렸던가. 누가 심장을 손으로 쥐어짜는 듯 아파오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그때 생각만 하면….”

열이 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고 있는데 사무실 문 바깥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맹 실장이 다율에게 손짓을 하는 중이었다.

“이 매니저. 얼른 출발해야지. 시간 다 됐어.”

“네! 실장님.”

다율은 노트북을 끄고 짐을 챙겨 일어났다. ‘TOP매니저11’ 야외 촬영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촬영 장소는 대형 복합쇼핑몰로, 미리 섭외해 놓은 쇼핑몰에서 쇼핑도 하고 광장에서 간식을 먹으며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컨셉이었다

다율과 권지하가 현장에 도착한 이후 간단한 세팅이 있었다. 핀 마이크를 착용한 다율이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스태프들은 조명과 붐마이크를 준비했다.

“두 분 이제부터 자유롭게 돌아다니시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가 컨셉이기 때문에 너무 카메라 의식 마시고요. 쇼핑하고 싶은 것 하시고 드시고 싶은 것 드세요. 저희 ENG 카메라가 알아서 따라붙을 거니까요.”

“네!”

다율은 의욕에 가득 차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권지하는 그런 그의 머리를 슥 쓰다듬으며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매니저, 이제 가 볼까요?”

“좋아요.”

다율이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 새삼스럽게 가슴이 떨렸다. 지난번 화보 촬영이 떠오른 탓이었다. 비록 그날처럼 강렬한 눈빛으로 상대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짓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들여다보니 부담스러웠다.

“오늘 이 매니저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내가 다 해 줄게.”

“고, 고맙습니다….”

말끝을 흐리면서 다율은 권지하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권지하는 고개까지 숙여 다율과 눈을 맞췄다.

“그럼 뭐부터 할까. 우리 매니저님, 옷 사러 갈래요?”

옷? 마침 필요했는데 잘됐다. 지난번 예능 미팅 때도 느꼈지만 다율은 옷이 정말 없고, 안 그래도 옷을 몇 벌 사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배우를 빛내 주는 것도 정도껏이었지, 막상 예능에 후드티 한 장 입고 나왔더니 생각보다 초라해 보였던 것이었다.

또 그러면 배우님한테 폐가 되니까 나도 옷 한 벌 장만해야겠다.

다율은 다시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요!”

***

“우와… 여기 비싼 데 아니에요?”

권지하가 다율을 데려간 곳은 명품관이었다. 매장의 인테리어부터 으리으리했고 직원들은 각 잡힌 태도로 그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또한 진열된 옷들도 엄청나게 고급스러워 보여 다율은 기가 죽었다.

이건 너무 부담되는데. 쇼핑은 방송국 예산으로 구입하는 거겠지? 너무 비싼 아이템 사면 민폐일 거야.

다율은 벽면 가득 걸린 옷들을 지나쳐 자그마한 소품들이 전시된 코너로 갔다.

“왜 옷은 안 보고 거기로 가요.”

권지하가 그를 따라붙었다.

“어…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전 그냥 작은 물건들 구경만 할래요.”

“내가 다 사 줄 건데?”

“네?”

“맘에 드는 거 다 사요. 여기 이분한테 어울리는 것 추천 좀 해 주세요.”

다율이 말릴 새도 없이 권지하가 직원을 호출했다. 정중한 몸가짐의 직원이 다가와 다율을 데리고 화사한 컬러의 옷들이 진열된 곳으로 향했다.

“어. 이거 너무 비싸 보이는데….”

“얼굴색이 밝으시니까 이런 파스텔 톤이 잘 어울리실 것 같네요. 신상 니트인데 입어 보시겠어요?”

여자 직원이 다율에게 풋사과색 니트 한 벌을 건넸다. 다율은 직원의 정성과 권지하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예쁘네요.”

“얼굴이 확 살죠. 이것뿐만 아니라 노란색 계열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와서 보여드릴게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다율에게 다른 옷을 여러 벌 건넸다. 가볍게 입을 수 있는 티셔츠는 물론이고 얇은 니트 면바지, 하다못해 색이 어울리는 로퍼와 스니커즈까지 없는 게 없었다.

“배우님, 이건 너무 많아요.”

“잘 어울리는 옷은 다다익선이죠.”

권지하가 그의 뒤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율을 감싸 안듯이 등 뒤에 바짝 몸을 붙이고 크림색의 긴 셔츠를 다율의 턱 아래에 가져다 댔다. 몸이 가까워지면서 권지하 특유의 체향이 다율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두근두근 다율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거 잘 어울린다.”

“정말요?”

“이것 하나만 입고 있으면 아주 보기 좋겠는데….”

“응?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만큼 어울린다는 말이죠.”

“아, 그러시구나.”

다율이 활짝 웃었다. 권지하는 그런 다율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다가 직원을 불렀다.

“이 옷 포함해서 이분이 걸쳐 봤던 것 모조리 다 주세요.”

“배우님. 너무 많다니까요.”

“여기 카드 있습니다.”

진짜로 이걸 다 사 준다고? 다율은 비싸 보이는 옷들을 보며 진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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