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집에 돌아오니 시간은 7시 30분. 다행히 8시 전에 도착했다.
“배우님. 얼른 TV 켤게요. 빨리 더운 물에 씻고 나오세요.”
“알았어요.”
다율은 빠르게 씻고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에브리데이 견과 세 봉지와 권지하를 위한 꿀물차 한 잔을 타서 TV 앞에 세팅했다.
오늘은 ‘TOP매니저11’의 다율과 권지하 관찰 예능 2화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원래 1주일에 1번, 토요일 편성이었지만 워낙에 반응이 뜨거워 특별히 평일 저녁에 이들의 특별편을 빨리 보여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작했어요?”
“아직이요.”
씻고 나온 권지하는 얇은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며 소파에 앉았다. 몸이 너무 가까워 보디샴푸 향과 체향이 훅 끼쳤다. 다율은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거리를 두기 위해 소파 끄트머리로 슬금슬금 이동해 앉았다. 하지만 곧 권지하가 쫓아와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몸이 가까워져 있었다.
뭐지. 난 분명히 거리를 뒀는데.
다율은 에브리데이 견과 봉지를 주섬주섬 쥐고서 조금 더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그러자 권지하가 노골적으로 자리를 다율 쪽으로 옮겼다. 다율은 소파 끝에 끼인 신세가 되었다.
“저기… 배우님. 저 좁은데요.”
“내가 이 자리가 좋아서.”
“그러면 저 바닥에 내려가서 볼게요.”
다율은 잽싸게 일어나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바닥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한 힘에 허리를 붙들리고 말았다.
“으앗!”
“가긴 어딜 가. 여기 앉아요.”
권지하가 자기 무릎 위에 강제로 다율을 앉혔다.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혀진 다율은 얼굴이 익을 듯 화끈거렸다.
“왜 이러고 봐야 해요…?”
“나 추워.”
권지하가 강력한 카드를 꺼냈다.
“이거 봐. 오늘 야외 촬영 길게 했더니 손이 차갑잖아.”
“어… 진짜요. 오늘따라 차갑네요.”
더듬더듬 손을 잡아 보니 과연 권지하의 손은 평소보다 찼다.
“배도 만져 봐요. 얼마나 차가운지.”
“배도 차세요? 큰일이다.”
다율은 뭣도 모르고 권지하의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잘 갈라지다 못해 예술가가 정성스럽게 조각한 듯한 복근이 드러났다. 보드라운 손바닥을 갖다 대자 서늘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정말요. 많이 차갑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 테라피가 필요할 것 같은데.”
“네? 특별 테라피라니요? 껴안고 자는 것 말고 다른 거요?”
“같이 욕조에서 목욕은 어떨까.”
“뭐라고요?! 어, 어떻게 그런 짓을!”
다율이 펄쩍 뛰었다. 에브리데이 견과 봉지에서 호두 몇 알이 후두둑 튀어나와 거실 바닥에 흩뿌려졌다.
“안 돼요. 안 돼!”
다율은 팔로 엑스 자를 만들어 몸을 가로막으며 바둥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를 보며 권지하가 쿡쿡댔다.
“농담이에요. 내가 설마 진담으로 그러겠어?”
“…네?”
“그냥 던진 말인데 이 매니저 순진하네.”
권지하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하하 웃었다. 다율은 너무 창피해 구석으로 숨고 싶었으나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그… 그런 거였나요. 농…담.”
그럼 그렇지. 다율은 숨 죽은 야채처럼 시무룩해졌다.
“내가 미쳤다고 남자 매니저랑 욕조에 들어가겠어요?”
“네… 그렇죠.”
“생각해 봐요. 그러려면 이것도 벗겨야 하고.”
슥. 권지하의 손길이 티셔츠를 입은 다율의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순간 그의 손끝에 자그마한 돌기가 스쳐 다율은 흠칫했다.
“이것도 벗겨야 하는데.”
손이 아래로 내려와 다율의 골반을 만지작거렸다.
“가, 간지러워요.”
“우리 이 매니저 간지러움 잘 타지. 맞다.”
“네. 엄청 간지럽, 으응!”
손이 쑥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 짓궂은 손동작에 다율은 식겁하며 권지하의 무릎 위를 벗어나려 했다.
“배, 배우님…!”
“어? 이제 시작한다.”
권지하는 다율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그의 허리를 다시금 꼭 껴안았다. 티브이 화면 속에서 ‘TOP매니저11’이라는 자막과 함께 오프닝 화면에 경쾌한 시그널 송이 흘러나왔다. 다율은 이 상황이 민망하고 또 아까의 설레발이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우리 나온다. 얼른 봐요.”
“어… 저 장면이 나오네.”
권지하의 재촉에 다율이 화면을 쳐다봤다. 현재 흘러나오고 있는 장면은 주방의 셀프카메라에 찍힌 것으로 두 사람이 같이 요리를 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거실도 드문드문 교차편집되었다.
배우님과 생활하는 공간이 고스란히 나온다니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다율은 권지하의 손이 다시금 허벅지 안쪽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화면에 집중했다.
<잡곡밥 지을까요? 우리 매니저님은 그냥 쌀밥보다 고소한 밥을 좋아하니까.>
<정말요? 감사합니다.>
<물을 조금 더 부어야 하나? 한번 봐 줘요.>
화면 속 권지하는 다율을 자연스럽게 불러 바로 옆에 세워 놓고 얼굴을 바짝 붙였다. 둘은 밥솥에 물이 얼마나 들어가야 하는지를 논하며 네 손등이 높다 내 손등이 높다 나란히 손을 마주 대기도 했다. 남들 보기에는 유치한 수작질이 따로 없었으나 다율로서는 그냥 자기 혼자 설렜던 장면이 나오는 셈이라 괜히 쑥스러웠다.
<이건 저희 집 냉장고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되는 필수템. 도토리묵입니다. 우리 매니저 이거 없으면 밥 안 먹거든요.>
권지하가 냉장고를 열어 도토리묵을 여러 팩 꺼내며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다율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그들은 같이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장바구니에 도토리묵을 한가득 담곤 했다. 다율이 도토리묵 없이 밥을 먹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고.
<제가 그래서 양념장 연구까지 했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매니저님이 더 맛있게 드실까 싶어서요.>
뭐가 그리 좋은지 권지하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말은 농담조였지만 간장과 참기름, 깨소금을 계량하는 그의 손놀림은 아주 정확하고 깔끔했다.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요리에 열중하는 권지하를 구경했다가 식탁에 수저를 놓았다가 다시 또 권지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제 모습이 웃겼다.
<우리 매니저 진짜 귀엽다니까요. 저만 졸졸 쫓아다녀요.>
권지하가 카메라를 향해 속삭였다.
헉.
다율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 나더러 귀엽대. 미쳤다. 미쳤어.
소위 계를 탄 다율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몸이 휘청거리는 다율을 보며 권지하가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왜 그래요. 이 매니저? 어디 안 좋아요?”
“아, 아니에요.”
심장이 제멋대로 난리 부르스를 췄지만 권지하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다율은 은근슬쩍 그에게서 상체를 멀리 뗐다. 하지만 권지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율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힉. 다율은 속으로 경악했지만 권지하는 의사가 청진기를 가져다 대듯 손으로 다율의 왼쪽 가슴 여기저기를 만졌다.
“어, 갑자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어요? 어디 안 좋은가?”
“아… 아, 그게… 제가 가끔 이래요!”
“정말?”
“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몸,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있지도 않은 병을 지어내며 다율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이런. 안 되는데… 혹시 심부전? 안 돼. 우리 매니저 아프면 안 돼요.”
권지하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다율을 쳐다봤다. 다율은 애매하게 웃으며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드디어 중간 광고 타임이 찾아왔다. 다율은 인터넷 반응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권지하의 무릎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뉴스들을 살폈다. 이미 백여 개에 달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제목은 하나같이 자극적이었다. [권지하의 자상함 도둑맞아. 매니저가 다 훔쳐갔다.]
[권지하 알고 보니 품절남? 범인은 귀여운 매니저] [매니저와 열애설 나도 할 말이 없는 이번 회차]
아 역시 자상하다는 반응이네. 배우님이 내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셨으니 자상남 이미지에 도움이 될 거야.
다율은 오직 권지하의 이미지만을 생각하며 업무 수첩에 기사들의 성향 논조를 분석해 적었다.
그다음으로는 팬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접속자 수가 너무 폭발적이라 서버를 뚫고 진입하는 게 힘들 정도였다.
“와… 새 게시물 3900개?!”
아무리 수십만 명이 가입된 커뮤니티라 해도 이건 심상치 않은 숫자였다. 다율은 눈을 크게 뜨고 자유게시판을 살폈다.
[아악. 너무 좋아. 이 장면 좀 봐 주라!]
한 팬이 쓴 게시물을 클릭해 보자 몇 장면 캡처가 등장했다. 다율과 밥솥 물을 재면서 손을 마주 댄 장면과 “우리 매니저 귀엽다니까요”라고 카메라에 속삭이는 권지하의 클로즈업 샷이었다. 댓글은 100개가 넘게 달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끙끙 앓는 내용이었다.
ㄴ미쳤어. 내 배우 얼음 같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손수 도토리묵 무치는 스윗 가이였다.
ㄴ오늘 잠 다 잤네. 스밍 돌리듯 영상 812번 돌려 봐야지!
ㄴ근데… 혹시 권지하가 매니저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매니저는 권지하 좋아하는 것 같던데.
헉. 다율은 도둑질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철렁했다. 자신과 권지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다니. 감히 배우님과 나를 커플로 엮다니…!
소수의 의견일 것이라 생각하며 다율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계속해서 새로 올라오는 글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권지하가 이다율 쌈 싸 먹겠네 한입에 냠냠]
ㄴ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ㅇㅇ
ㄴ둘이 사귀어?
ㄴ안 사귀면 나올 수 없는 분위기인데? 한 침대에 눕고 권지하가 밥 지어 주고 그러다가 손잡고. 저거 완전 부부 아니냐?
ㄴ뭐야. 둘이 결혼했다고?
[지하다율 결혼했다고 함]
ㄴ알아 너만 몰랐음
ㄴ꼽주지 마
이, 이게 다 뭐야. 다율의 얼굴이 점점 더 달아올랐다. 그러는 와중 시간이 훌쩍 흘러 다시 방송 재개 시간이 다가왔다.
“아차. 트위터 올려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