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다음으로는 평소처럼 각자 욕실로 들어갔다. 다율은 씻는 내내 권지하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속이 답답했다. 생각이 많아지자 씻는 속도가 느려졌다.
거의 30분을 샤워부스에서 보낸 다음 다율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이동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침실에는 어둑하게 수면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좀 오래 씻었어요. 죄송해요.”
“얼른 누워요.”
“…저 누워요?”
“우리 평소에 같이 자잖아요. 방송 카메라에 보여 주기 쑥스러운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실인데 어쩔 거예요.”
아니 진짜로 이걸 방송에 노출하겠다고? 다율은 어이가 없었으나 권지하가 자신을 덥석 안아 눕히는 바람에 제대로 말을 못 했다.
“오늘 수고 많이 했잖아요. 제가 매니저님 재워 줄게요.”
“…그렇게 쳐다보면서 말 거시면 되게 부담돼요.”
“하하. 칭찬으로 알아들을게요. 이 매니저님 편하게 자요.”
권지하가 다율의 베개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율은 카메라가 끝도 없이 의식돼 눈치가 보였다.
“부끄러워요?”
“…네. 많이.”
“그럼 이불 속으로 들어가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권지하가 팔을 들어 다율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 이제 좀 덜 창피하네. 다율은 한시름 놓으며 몸에 긴장을 풀었다.
“굿나잇.”
1주일 뒤, 이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각종 연예 관련 커뮤니티와 게시판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단군 이래 최대 핫한 반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의 HOT 게시물: 자기 매니저랑 한 침대 쓰는 배우]
ㄴ권지하 매니저 보쌈하고 싶다. 미친! 너무 귀여워!
ㄴ얼굴 빨개져서 자기 배우 필모 찬양하는 것 좀 봐ㅜㅜ
ㄴ지금 그게 문제야? 이불 밑에 숨는 짤이 레전드지
ㄴ너희는 지금 본질을 놓치고 있어. 둘이 같이 눕는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긴급 속보: 배우 권지하 매니저와 같이 자는 것으로 밝혀져 충격]
ㄴ그 침대 같이 쓰는 사람 어쩜 이렇게 귀엽게 생겼냐
ㄴ매니저 아이돌이야? 피부 왜 이렇게 좋아?
ㄴ나도 처음에는 같은 기획사 아이돌 나온 줄 ㅜㅜ 이렇게 깜찍한 매니저가 자기 배우 덕질하는 모습 보여 주다니 TVO 사옥까지 삼보일배하고 싶다
ㄴ삼보일배 같이 할 파티원 구함
이 반응을 접한 다율은 굉장히 곤란해졌다.
이거 스케일이 너무 큰 것 아니야? 어느 정도 화제를 끌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청률 화제 지표 집계 나왔다. 비드라마 부문 출연자 화제성 1위 권지하. 2위 이다율. 둘이서 다 해먹었어.”
박 대표는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껄껄 웃으며 프린트된 종이를 펄럭였다. 거의 춤을 추는 그와 덩달아 맹 실장도 호들갑을 떨었다.
“대세는 권지하! 이다율! 둘 다 수고 많았어. 허허!”
다율은 눈으로 보고도 결과를 믿을 수 없어 수차례 눈을 깜빡였다.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진짜로… 제가 2등 한 거예요?”
“당연하지. 이 매니저 연관 검색어도 생겼어. 심장어택 매니저, 이불 속 위험한 매니저. 그뿐이 아니야. 유행어도 생겼더라고. ‘하루만 권지하 방의 침대가 되고 싶어’. 관련 트윗은 2만 5천 번 리트윗됐고 말이야.”
“와… 말도 안 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지켜봤다고? 다율은 놀라움과 동시에 창피함과 쑥스러움을 느꼈다.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링을 하는 내내 그 생각은 심화되었다.
‘배, 배우님. 이불 속에 들어갈래요.’
누가 봐도 얼굴을 붉히면서 이불 속에 쏙 숨는 장면이라든가.
‘시청자 여러분들. 아직 배우님 주무시니까 저도 조용히 있을게요.’
아침에 일어나 아직 잠들어 있는 권지하를 바라보는 모습 역시 신경 쓰였다.
이거 내가 배우님 좋아하는 티 나지 않나?! 나 얼굴 빨개진 것처럼 보이지 않아? 부끄러워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영상이 끝을 향해 갈수록 다율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갔다. 속으로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누가 ‘야, 너 권지하 좋아하지? 다 티 나거든.’이라고 물어 올까 봐 걱정이 밀려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권지하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진 않을까 겁이 났다.
하지만 저 품은 정말로 포근하고 너무나 아늑한걸. 같이 누워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고.
“…해서 이번 주는 드라마 홍보 예능을 두 개 돌고 잡지 화보는 하나 찍으면 될 것 같다.”
“…어떡하지.”
“이 매니저. 듣고 있어?”
“네?”
맹 실장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다율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맹 실장이 태블릿 피시를 건넸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멍 때려. 자, 어서 스케줄 시작하자고! 바쁘다!!”
“네. 알겠습니다.”
다율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온갖 망상과 걱정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오전부터 드라마 촬영이 있기 때문에 일산으로 향해야 했다. 할 일은 해야 프로지!
“배우님. 가요.”
다율은 로비로 나가서 소속사 직원 전용 카페에 앉아 있던 권지하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뭐예요?”
“우리 매니저 아침잠 깨라고 주는 선물.”
“네?”
“따뜻한 율무차예요.”
“정말요?”
다율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 너무나 이른 시간 출근이라서 밥을 못 먹고 나왔는데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고마워요. 배우님.”
“고맙긴. 다율 씨 살 좀 쪄야 돼요. 특히….”
“네?”
“아니야. 얼른 마셔요.”
권지하의 시선이 다율의 엉덩이를 향했다. 그의 끈적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다율은 호록호록 율무차를 마시고 건물을 나섰다.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일산까지는 거리가 아주 가깝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출근 시간 직전이라 길이 뚫려 있었다. 덕분에 다율과 권지하는 아침 7시로 예정된 집합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어머! 지하 오빠 일찍 오셨네요?”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저 멀리서 윤혜미가 뛰어오며 알은체를 했다.
“안 그래도 오빠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윤혜미가 눈웃음을 지었다. 다율은 윤혜미가 언제부터 권지하를 오빠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지내기 시작했는지 의문이었다. 분명 지난번 첫 촬영 때까지만 해도 배우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그 사이 친해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다율은 어디까지나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었고 권지하와 윤혜미는 한 프레임 안에 담겨 둘만의 세계를 연기하는 동료이니까.
우울감이 밀려와 다율은 표정이 경직됐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기에 윤혜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배우님 안녕하세요.”
“어머… 이게 누구야. 그… 매니저분이시네. 예능 잘 봤어요.”
윤혜미는 쓴 약을 먹은 사람처럼 떨떠름한 말투로 답했다. 지난 주말은 그녀에게 있어 최악의 시간이었다. 설마 둘이서 한 침대를 쓸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끌어안고 잘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윤혜미는 토요일 밤부터 월요일인 오늘까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눈 밑이 시커멨다. 그러나 여배우의 자존심이 있지 차마 질투 때문에 잠을 설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쪽은 저기 커피차 가서 나랑 지하 오빠 커피 좀 타 올래요? 나는 오빠랑 여기서 이야기 좀 하려고.”
윤혜미가 크고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율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 커피요?”
윤혜미 배우 것까지 가져다줘야 하나. 솔직히 말하면 싫은데. 다율은 곤란했으나 겉으로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티를 낼 수 없었다.
“어서요.”
윤혜미가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다율이 움직이기도 전에 긴 팔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가지 마요.”
“네?”
“윤혜미 씨. 지금 누구 마음대로 내 매니저 부리는 겁니까?”
권지하의 입매는 부드럽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윤혜미는 흠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우리끼리… 대화하는데 매니저가 차 한잔 가져다줄 수 있잖아요.”
“이 매니저. 윤혜미 씨 것 가져올 필요 없어요.”
“아….”
윤혜미는 인상을 썼고 금방이라도 화를 내려는 표정이었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다율이 곤란해하는 동안 권지하가 다율 옆으로 와서 섰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의 귀 쪽으로 입술을 가까이 했다.
“우리끼리 갔다 오죠. 남의 말 듣지 말라고 내가 말한 적 있잖아요.”
“아 네네. 그랬었죠.”
언젠가 조연 천재욱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권지하가 끼어들었었다. 다율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아주 놀고들 있어!”
그 꼴을 본 윤혜미가 씩씩댔다.
“그럼 놀게 놔두세요.”
“아 진짜!”
윤혜미는 팔짱을 끼고 휙 뒤돌아 카메라가 설치된 세팅 장소로 빠르게 걸어갔다.
“배우님, 이래도 되는 거예요…? 화나신 것 같은데요.”
다율이 곤란해하며 권지하를 올려다봤다. 권지하는 올망졸망한 다율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우리 이 매니저는 아무것도 걱정 안 해도 돼요.”
귀에 와 닿는 숨결이 너무나 간지러웠다. 다율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시, 시간 됐어요. 얼른 준비하셔야죠.”
다율은 허둥지둥 권지하의 팔을 치우면서 말을 돌렸다.
“어. 아직 시간 남았는데? 커피나 한잔하죠?”
“아까 율무차 마셔서 전 괜찮아요! 배우님 드실 거면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다율은 권지하의 등을 가볍게 떠밀고 줄행랑쳤다. 커피차가 세워진 방향으로 토도독 도망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지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흠… 아무래도 곧 잡아먹어야겠는데.”
그는 입 안을 혀로 쓸면서 다율의 뒷모습을 진득하게 훑었다.
촬영 내내 윤혜미가 실수를 연발해 밤늦게까지 촬영이 지연됐다. 덕분에 권지하는 체온이 많이 내려가 버렸고 다율은 그를 위해 막히는 길을 요령 있게 운전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