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좋은 기회네요. 우리 배우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이 매니저님, 이해가 빠르시네요. 바로 그겁니다.”
조연출이 박수를 쳤다. 다율은 자신이 삐걱거리며 어색하게 굴든 말든 뭐가 중요한가 싶어졌다. 중요한 건 권지하에게 이 프로그램이 이득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럼 저 열심히 해 볼게요!”
그날 미팅은 간단한 상견례였으므로 금방 끝났다. 앞으로 함께 프로그램을 찍게 될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미팅은 끝났다.
얼마 안 가 가수나 배우, 밴드 등으로 구성된 11팀이 확정되면서 촬영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왔다. 그 말은 곧 스튜디오에 모여 정식 촬영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제작진은 첫 미션이 퀴즈 쇼가 될 것이라고 알려 줬지만,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출제될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다율은 과연 어떤 문제가 나올까. 혹시라도 1라운드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TVO로 향했다.
“오늘 1라운드는 11팀이 모두 참여해 퀴즈를 푸는 시간입니다. 자, 무대 위에 둥근 테이블 11개랑 이름표 보이시죠? 연예인과 매니저분은 제 자리에 착석해 주세요.”
다율과 권지하는 가장 앞자리를 배정받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무대 위로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 촬영팀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탠바이!”
태어나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정식으로 서는 것이었기에 다율은 떨렸다. 심호흡을 해 보았으나 두근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후우… 후우.”
다율은 손이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때 테이블 밑으로 권지하가 손을 잡아 왔다.
“이 매니저. 떨지 마요.”
“배우님.”
“나랑 같이 있잖아.”
가슴이 뭉클해졌다.
“…네.”
“나한테 의지하면 돼요.”
다율은 권지하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사람은 이다지도 다정할까. 난 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다율은 코끝이 찡해졌다.
“고맙습니다.”
다율이 소곤거리고 얼마 안 가 경쾌한 시그널 송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무대에 환하게 조명이 들어왔다.
“본격 매니지먼트 예능 쇼! TOP매니저11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화사하게 갖춰 입은 여배우가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였다. 그녀가 힘 있게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외칠 때마다 다율은 이 상황이 너무나 신기하고 얼떨떨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사전에 열심히 대본을 보기는 했지만, 인생 첫 예능을 촬영하는 다율은 각오가 남달랐다. NG는 안 된다. 떨지 말고 잘해야지.
다율이 한껏 마음속으로 결심을 다지고 있을 때였다. 카메라가 다율과 권지하 쪽으로 스르륵 고개를 틀며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럼 제 바로 옆자리부터 소개해 볼게요. 안녕하세요! 권지하 배우님, 이다율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권지하입니다. 제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은 절 도와주는 우리 매니저님이시고요.”
“이, 이다율입니다.”
다율은 기합이 바짝 들어간 채로 대답했다. 하얀 볼에 홍조가 떠올랐다.
“어머, 너무 귀여운 매니저시네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도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어서, 합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오늘 이다율 씨가 1라운드 통과할 수 있도록 배우님. 열렬한 응원 부탁드립니다.”
“네. 이다율 매니저를 믿습니다. 잘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권지하는 다율을 보고 웃었다. 다율은 그 미소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 팀씩 돌아가며 인사를 한 다음 연예인들은 방청석으로 이동하고, 매니저들만 무대 위에 남았다.
“그럼 첫 번째 코너 시작하겠습니다. 바로 ‘내 연예인의 작품을 맞혀라!’인데요. 여기 있는 매니저분들은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연예인의 영상을 세 개 보게 됩니다. 작품이나 노래 제목을 세 개 모두 정확하게 맞히면 통과. 아니면 탈락입니다.”
이거 너무 어려운 것 아니야? 하나도 틀리면 안 된다니. 매니저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렸다. 다율도 바짝 긴장하며 자세를 곧추세웠다.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맞혀야 했다.
“그럼 첫 번째 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싱어송라이터 박필현 님 매니저. 시작해 주세요.”
“네!”
“첫 번째 문제입니다.”
바로 노래 전주가 흘러나왔다.
“아… 이게 뭐였지.”
박필현의 매니저는 머리를 감싸 안고 곤란해하다가 제한 시간 30초가 지나 버렸다. 바로 탈락이었다.
“아쉽습니다! 탈락이에요. 그럼 2번 팀. 배우 장우식 님 매니저입니다. 화면 보시죠!”
대형 스크린에 영화의 한 컷이 등장했다. 매니저는 땀을 뻘뻘 흘리더니 힘겹게 한 문제를 맞혔다. 두 번째 문제도 제한 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 겨우 대답했다. 하지만 세 번째 문제는 짐작조차 못 하고 시간이 끝나 버렸다.
“아… 이런 두 팀이 연달아서 탈락인데요. 과연 세 번째 팀인 권지하 배우님의 매니저. 이다율 매니저의 실력은 어떨까요? 각오 한번 들어볼게요.”
사회자가 다율에게 질문을 건넸다. 다율은 마이크를 쥐고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오, 진짜요?”
“네. 저는 저희 배우님 작품 대사까지 다 외웁니다.”
“정말인지 한번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화면 주시죠!”
곧 스크린에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막 켜려는 남자의 옆얼굴이 비쳤다. 다율은 화면을 보자마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정답 ‘뒷골목의 연인들’! 정태 역이었습니다.”
“와! 정답입니다. 정말 빨리 맞히시네요. 자신 있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나 봅니다. 대단하십니다.”
한 문제 맞혔어요!
다율은 방청석에 있는 권지하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권지하가 웃으며 박수를 쳐 주었다.
“자, 그럼 이어서 두 번째 문제 가겠습니다. 보시다시피 권지하 배우님이 밤늦은 도로에서 위험한 차량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데요. 이건 어느 작품일까요?”
“‘시속제한 300km/h’입니다. 배신한 부하를 쫓고 있네요.”
“연속 정답! 그러면 마지막 문제 드립니다. 이거 맞히시면 1라운드 통과, 바로 2라운드 진출이에요. 신중하게 답변 부탁드려요.”
“전 자신 있습니다.”
다율은 무대 아래 권지하를 내려다봤다. 그는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해요.’
권지하가 입모양으로 응원을 해 주었다. 다율은 주먹을 불끈 쥐고 스크린을 봤다. 이번에는 어딘지 반항아 같은 눈빛을 한 채 누군가와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어린 권지하가 나왔다.
“‘푸른 청춘’이네요. 저때 한 대사가 명대사예요. 다들 아시겠지만….”
“어머. 대사 기억하세요? 뭔데요?”
“내 인생에 걔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러니까 끼어들지 마.”
“완벽합니다! 정답을 맞힌 이다율 매니저 2라운드 진출입니다!”
“헉, 정말요?”
다율이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했다.
“물론이죠!”
다음 라운드 진출을 알리는 밝은 음향이 흘러나왔다. 다율은 환하게 웃었다.
통과 팀과 탈락 팀이 다 정해진 다음,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다율은 권지하와 함께 출연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권지하는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다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리 매니저님,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내 작품은 언제 다 봤어요?”
“틈틈이 시간 내서 핸드폰으로 봤어요.”
“기특하네.”
배우님의 작품을 열심히 본 보람이 있었어. 비록 사심을 듬뿍 담아 본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써먹을 수 있어서 보람 있었다.
그런데 다율이 시계를 보자 벌써 3시였다.
“어, 그런데 배우님. 벌써 3시예요. 일산 촬영장으로 출발할 시간 아닌가요?”
다율이 율무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오늘 권지하는 최소한의 분량만 찍고 빠지기로 되어 있었고, 3시가 되면 다른 매니저가 권지하를 픽업해서 드라마 촬영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일정을 좀 조정했어요. 어차피 오늘은 내 촬영 분량 거의 없는 날이고. 뭣보다 다율 씨 응원해야죠.”
“정말요?”
“응. 나한테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지금 이 예능이거든.”
권지하가 나른하게 웃었다. 다율은 그저 그 얼굴에 홀려 와아, 감탄할 뿐 권지하가 한 말의 뜻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로 추가 게임과 패자부활전 등이 이어졌다. 다율은 그때마다 성실하게 임했고 촬영 카메라는 다율에게 집중되었다. 다율은 산뜻한 기분으로 촬영을 마치고 녹화장을 나섰다.
“최고였어요. 이 매니저.”
“이게 다 배우님이 응원해 주신 덕분이죠.”
오늘 밤부터 시작될 관찰카메라 촬영은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다율은 그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
“카메라는 거실에 하나, 주방에 하나, 그리고 침실에 하나 설치할 거예요.”
“치… 침실요?”
“관찰 예능에서는 원래 다 이렇게 해요.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다 연예인들 잠자는 침대 비추잖아요. 대놓고 자는 모습도 찍는데요 뭐.”
숙소에 따라온 스태프의 설명에 다율은 아연실색했다. 주방이나 거실 공간을 노출하는 건 괜찮았으나 침실은 곤란했다. 권지하가 매니저를 껴안고. 그것도 밤새 조물조물거리면서 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하나 없을 듯했다.
“아… 그러면 침대는 안 나오게….”
“아니에요. 다 공개하죠 뭐.”
권지하는 쿨한 반응이었다. 어쩌려고 저러지. 설마 당분간 나랑 따로 자겠다는 건가? 그러면 몸에 안 좋을 텐데?
다율이 의문을 품고 있는 동안 스태프들은 집 안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스태프들이 돌아가고 나서 다율은 권지하를 불러다가 귓속말을 했다.
“배우님. 저랑 같이 자는 거 TV에 나오면 안 되잖아요. 따로 주무시려고요?”
“응? 아뇨.”
“그럼 어쩌시려고요?”
권지하가 다율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느긋하게 웃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줘야지.”
“…네?”
“내가 이 매니저 없으면 못 사는 거 보여 주겠다고요.”
이게 무슨 소리야. 다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권지하는 풉 소리 내 웃으며 다율의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인상 쓰지 말고 잠이나 잡시다.”
“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