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권지하가 다율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 이 매니저 없으면 못 자는 거 알잖아요.”
권지하가 씩 웃으며 다율을 차로 이끌었다. 다율은 멋쩍었지만 또 기분이 살아나는 건 사실이었다. 권지하가 저를 필요로 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키스신 생각은 뒷전이 되었다.
그들은 주차장에 세워 놓은 밴까지 걸어갔다. 조수석 대신 중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널찍한 좌석이 나왔다.
권지하가 먼저 앉았다. 다율은 적당히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권지하에게 손목이 잡혔다.
“이 매니저. 내 위로 올라타요.”
“…예?”
“껴안고 자려면 그래야지.”
“손만 잡고 자는 게 아니었어요?”
“체온 전달해 줘야죠. 어서.”
권지하가 자기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저, 저기. 무릎에 올라타라고요?”
“나란히 누워서도 자면서 새삼스럽게 뭘요. 자, 올라와서 편하게 앉아요. 나 춥다.”
다율은 많이 민망했으나 권지하의 춥다는 말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다율은 조심스럽게 권지하의 허벅지를 타고 앉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몸이 그의 품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으아. 이거 너무 야해.
다율의 엉덩이 아래로 돌처럼 단단한 권지하의 허벅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상체로는 권지하의 성난 팔뚝과 가슴을 낱낱이 맛봐야 했다. 몸이야 즐거웠으나 마음이 불편해 엉거주춤 불편한 포즈가 나왔다.
“손 불편하면 내 목에 감아요.”
“그,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자, 기왕이면 꽉 감아요. 몸 밀착되게.”
권지하가 손수 이다율의 팔을 움직여 제 목에 둘러 주었다. 영문 모르는 이가 보면 꼭 연인들처럼 보일 법한 자세였다. 다율은 부끄러움에 눈을 내리깔고 권지하의 시선을 피했다.
권지하의 눈동자가 다율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으로 향했다. 볼은 통통하고 뽀얘서 어린 느낌인데 속눈썹은 우아하고 섬세하게 뻗어 나와 굉장히 눈길을 끈다. 얼굴만 예쁘장한 게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맡을 수 있는 호두 아이스크림 냄새도 중독성 있다.
그뿐인가. 어디 가서 보기 드문 둥근 귀. 꼭 동물 귀처럼 동그란 귀가 이렇게 울긋불긋 물들어 있을 때면 꼭….
“으음.”
“왜요, 배우님? 저 너무 무거워요? 불편하세요?”
“아뇨. 아니에요.”
다율은 아무래도 제가 무거워서 권지하가 불편한 게 아닐까 신경이 쓰였다. 마른 체형이라고는 해도 키가 보통은 되어서 깃털같이 가벼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는 이리저리 엉덩이를 들썩이며 무게중심을 바꿔 보려 애썼다.
그 바람에 통통한 살집과 권지하의 하체가 열심히 마찰했다.
“으음….”
“역시 무겁죠? 우리 자세 바꿔요. 차라리 제가 아래 깔릴게요. 배우님이 위에서 저를 덮치는 자세로 자는 게….”
“이 매니저.”
“네?”
“그런 말 하면 곤란해요.”
“…왜요?”
“이유는 나중에 알려 줄게요. 일단은 잡시다.”
권지하가 다율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키스신을 지켜보느라 예민해져 있던 다율의 신경이 조금씩 누그러지며 잠이 몰려왔다. 평생 닿지 못할 입술에 대한 갈증도 사그라들었다.
희한하다. 이 남자의 품은 하나도 따뜻하지 않은데 왜 난 이 품이 이다지도 포근하고 안온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율은 권지하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그만의 체취가 꼭 어린 시절 살던 숲속의 공기를 닮은 기분이었다.
다율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권지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다율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너무나 부드러워 손가락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사르륵 빠져나갔다.
“귀엽단 말이지”
권지하가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눈치 없는 구석도 귀엽고.”
슬쩍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촉촉한 피부가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널 어떻게 잡아먹으면 좋을까. 응, 다율아?”
권지하가 다율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다율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그저 짧지만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
따르릉. 다율의 업무 데스크 위 전화가 울렸다. 보통 자신의 직통번호로 전화가 온다는 것은 권지하의 섭외나 스케줄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서둘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YU엔터테인먼트 이다율 매니저입니다.”
-안녕하세요. TVO 예능제작국인데요, 권지하 배우님 담당 매니저님 맞으시죠?
“아, 안녕하세요. 제가 담당 맞습니다. 어쩐 일로 전화 주셨나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이번에 신규 예능을 론칭하는데 배우님하고 매니저님을 모시고 싶어서 섭외 가능한지 확인 전화 드렸어요.
“그건 스케줄 표를 봐야 하는데, 어… 그런데 잠시만요. 배우님 말고 저도 초대한다고요?”
다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특집 프로그램인데 연예인과 매니저가 얼마나 호흡이 잘 맞는지를 겨뤄서 서바이벌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리는 포맷이에요. 매니저님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제, 제가 방송을 탄다고요?”
-그렇습니다. 윗분들과 상의하시고 연락 주세요. 자세한 사항은 이메일로 제안서 보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다율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웬 놈의 예능 출연이야. 이건 안 된다고 잘라야겠지? 그는 이메일로 온 문서를 출력한 다음 맹 실장에게 걸어가 상황을 보고했다. 다율은 맹 실장이 예능 출연을 고사할 것이라 생각했다. 권지하 자체도 예능에 잘 나가지 않는 배우일뿐더러, 다율의 예능 출연을 딱히 원할 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맹 실장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뜻밖의 것이었다.
“콘셉트 좋은데? 권 배우가 워낙 신비주의에 대중 프로그램 노출이 적잖아. 이번에는 간만에 드라마 복귀를 했으니 이런 친근한 예능도 필요하다고 봐. 이 매니저도 같이 나가도록 해.”
“네?”
“권 배우가 남들한테는 싸늘해도 이 매니저한테는 껌뻑 죽잖아. 친근한 이미지를 쌓아서 대중한테 다가갈 수 있을 거야. 협조해.”
“아… 알겠습니다. 실장님.”
상사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다율은 낭패다 싶었지만 하늘 같은 실장의 말을 거역하기란 어려웠다. 그는 그날 저녁 촬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권지하에게 예능 소식을 전했다.
“맹 실장님 이야기가, 저희 둘이 같이 나가래요. 배우님은 어떠세요?”
“나? 난 너무 좋은데.”
다율로서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켜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좋다니 이건 또 웬 말인가.
“예능 출연 잘 안 해 오셨잖아요. 그런데 왜 좋다는 건지 여쭤봐도 돼요?”
“이 매니저랑 같이 나가니까. 벌써 신나는데.”
“진짜로요?”
“어. 난 이 매니저랑 같이 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
권지하는 어두운 차 안이 환하게 밝혀질 정도로 아름답게 웃었다. 다율은 쑥스러운 기분에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며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식혔다,
나랑 나가서 좋대. 그러면 나도 열심히 해야지.
***
“아… 근데 뭘 입냐.”
다율은 자기 짐을 넣어 놓은 작은방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바닥에 옷을 쫙 늘어놓고 30분째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도저히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옷이라고는 회색 후드티, 연한 회색 후드티, 진한 회색 후드티의 향연이었다. 물론 가끔가다가 흰색 후드티가 있었지만 디자인은 똑같았다.
“너무 매니저스러운걸. 조금 화사하게 입고 싶은데 옷 쇼핑이라도 해야 하나.”
다율은 기왕이면 멋져 보이는 게 권지하 이미지에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미 이번 달 월급은 내 집 마련 통장에 알차게 저금한 상태. 옷 쇼핑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난 매니저야. 배우님을 돋보이게 해 주는 사람이지.”
그는 결국 회색 후드티를 챙겨 입고 청바지를 입었다.
“배우님, 출발해요.”
“네. 지금 나가요.”
드레스 룸에서 권지하가 나왔다. 그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을 돋보이게 하는 스트라이프 셔츠에 단추를 두어 개 풀고, 늘씬한 핏의 바지를 입었다.
“와….”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려 감탄사를 내뱉다가 자기 입술을 찰싹 때렸다.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자고 그렇게 결심을 했건만, 멋진 모습만 보면 주책이 흘렀다.
“흠흠. 그럼 TVO 사옥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방송국에 도착한 두 사람은 미팅 룸으로 들어갔다. 작가와 연출진이 그들을 반겨 주었다. 곧 유명 가수, 인디밴드, 중견 배우 등 다양한 연예인이 자기 매니저와 함께 미팅 룸으로 들어왔다. 제작진은 출연진들이 앉은 책상 위에 구체적인 기획안을 한 부씩 올려놔 주었다.
“TOP매니저11? 이게 프로그램 이름인가요.”
다율이 기획안을 보고 호기심을 보였다.
“맞아요. 시청자들이 직접 투표해서 처음 11팀 중에 3팀을 추려내고 막판에는 최종 1팀이 우승하는 서바이벌 식이에요.”
조연출이 친절하게 기획안을 설명해 주었다.
“와… 신기하다. 꼭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같네요. 근데 제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방송은 처음이라….”
“완벽하게 해내지 않아도 돼요. 매니저들은 연예인이 아니니까요.”
“후… 그렇긴 한데.”
각오를 다지긴 했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선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현장에서 열심히 발로 뛰는 것과 남들 다 보는 TV에 나와 자신을 표현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제가 혹시 배우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돼요.”
“매니저랑 배우가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지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리고 사실 여기 출연하는 건 각 연예인분들을 홍보하려는 목적이 커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지시죠?”
“아… 그렇네요. 배우님 홍보.”
권지하에게 대중적인 호감도가 쌓일 것이라 생각하니 다율은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영화를 찍고, 또 영화를 연달아 찍느라 브라운관을 오래 벗어나 있었으니 이 예능은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