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율은 그가 정색하는 모습에 거짓말이 들킬까 걱정됐다.
“네… 저 해 봤는데요.”
“누구랑?”
누구냐니. 다율은 구체적으로 둘러댈 말이 없었다. 그러니 가장 자연스럽고 평범한 대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게… 아는 분이랑 스무 살 때요.”
“허. 아는 분?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단 거네?”
권지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차마 없는 애인까지 창조해 낼 수 없었던 다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셈이죠.”
“그렇게 안 봤는데 이 매니저 굉장히 개방적이네요.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키스를 하다니.”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당연하죠.”
다율이 보기에 권지하는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뭐 말실수했나? 다리미를 내려놓고 목 뒤를 긁적이고 있는데 권지하가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물었다.
“그럼 나랑도 한번 연습해 줄 수 있어요?”
“네?!”
다율이 펄쩍 뛰며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사귀지 않는데도 한다며. 내가 지금 감정을 잡아야 해서 리허설 개념으로 우리 매니저님이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너무 당황스러우면 말이 안 나오는구나. 다율은 누가 자기를 통에 넣고 360도 회전시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띵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확실한 건 키스를 하느니 죽는 게 낫다는 거였다.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하고 무려 키스를 해? 입술이 닿으면 백 퍼센트 녹아내릴 거다. 좋아하는 티가 완전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말 것이었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온몸은 후들거리겠지. 자기도 모르게 고백이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 어, 어떡하지?
다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귀 끝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을 때였다. 지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연습 싫어요? 너무 정색하네.”
“아 그… 그게 아니라. 그런 연습을 왜 매니저랑 하세요.”
“음… 도와주기 싫어요? 그럼 말고.”
권지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율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키스를 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마 정신이 나가 버리진 않을까.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자빠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딱 한 번이라도 닿아 보고 싶은걸.
키스하고 싶은 마음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맞서 싸웠다.
‘이다율. 그냥 눈 딱 감고 해 버려. 지금 아니면 언제 권지하랑 키스해 보겠어?’
그러자 반대편이 말렸다.
‘무슨 헛소리야. 너 백 퍼센트 들킨다. 좋아하는 티 날 거야. 그러면 권지하 얼굴 어떻게 보려고?’
망설임 끝에 다율은 용기 내 말했다.
“그, 그럼 진짜로 키스하는 건 말고요. 그냥 하는 척 정도면 괜찮아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이다율. 다율은 평생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귓가에서 누군가가 뜯어말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다율은 모른 척했다.
“좋아요. 나도 분위기만 잡으면 되니까.”
“네.”
“그럼 대사 연습부터 해 볼게요. 내가 리드할 테니까 긴장 풀고 편하게 있어요. 상대역은 대사가 없거든요.”
“…알겠어요.”
권지하가 검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쓸어 넘겼다. 눈빛은 어느덧 애수에 잠겨 있었다.
다율은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권지하가 조금씩 느릿하게 다가왔다. 한두 번 가까이 있어 본 것도 아닌데 그와 조금씩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다율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꼭 전력질주라도 한 사람처럼 심장이 뻐근해졌다.
“네가 나 사랑하는 거 모를 줄 알았나 봐.”
“…!”
“눈빛만 봐도 다 티가 나는데.”
마치 다율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대사에 속이 뜨끔했다. 다율은 긴장으로 숨이 막혔다. 권지하가 조각 같은 손을 뻗어 다율의 아래턱을 쥐었다.
마치 악기를 쥔 연주자 같은, 기품 있으면서도 소유욕과 집착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키스할 수밖에 없어.”
“….”
“눈 감아.”
명령과도 같은 말이었다. 다율은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았다. 권지하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눈꺼풀에 한껏 힘을 주고 꽉 눈을 감았다.
진짜로 키스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설마 약속을 지키시겠지.
서늘한 손등이 다율의 뺨을 느리고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다율은 파들파들 떨었다. 다음 순간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결이 스칠 만큼이었다.
이러다가 입술 닿는 것 아니야?! 다율은 공포에 질렸다.
와락. 강한 힘이 다율을 끌어당겼다. 다율은 순식간에 권지하와 전신을 밀착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 눈을 떠 버렸다. 코앞에 권지하의 진지한 얼굴이 보였다. 이건 잘생긴 수준이 아니라 심장을 송두리째 앗아갈 정도였다.
“헉.”
다율은 너무 놀란 나머지 권지하를 밀어냈다. 권지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이다율을 쳐다봤다.
“죄, 죄송해요, 배우님. 너무 놀라서.”
다율은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연습이라는 걸 알면서도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쓰러질 기세였다. 아니 지금 쓰러진다.
“이 매니저. 이 매니저?!”
휘청. 다율의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크게 흔들렸다. 바닥으로 나자빠지려는 그의 허리를 권지하가 간발의 차로 낚아챘다.
“조심해요.”
이건 또 웬 드라마 속 클리셰적인 자세란 말인가. 다율의 얼굴은 빨갛게 익었다. 민망하고 쑥스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어디 어지러워요? 아파요?”
“그게 아니라… 너무 잘생기셔…서.”
다율이 개미만 한 소리로 중얼댔다. 권지하는 소리 내 웃으며 다율을 껴안았다.
“아, 우리 매니저 최고다. 너무 깜찍해서 내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은데 어떡하지.”
권지하가 다율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다율은 이 순간이 너무나 부담됐다. 권지하의 주머니에 들어가다니. 그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였다.
“됐어요. 놔주세요.”
“싫은데. 따뜻해서 기분 좋아.”
“드레스 룸에 옷 정리하러 가야 돼요.”
“같이 가요.”
다율은 푹 한숨을 내쉰 다음 권지하를 등에 매달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정리했다.
이게 싫다. 꼭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듯이 다정하고 장난스럽게 구는 거. 그렇다고 해서 내 사람이 되어 줄 것도 아니잖아요.
다율은 소리 없는 원망을 하며 권지하 몰래 입을 삐죽 내밀었다.
***
다음 날 촬영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다. 촬영장에 도착해 권지하의 수발을 드는 내내 다율은 우울했다. 오늘은 문제의 키스신을 찍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윤혜미가 있는 텐트를 슬쩍 봤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매니저가 받쳐 주는 우산 그늘 아래에서 그녀는 메이크업에 열중 중이었다. 언뜻 들리는 소리로는 키스, 화끈, 부끄럽다. 대충 이런 말이 그녀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다율이 우울해하거나 말거나 장비와 조명은 제때 갖추어졌고 진행 스태프는 권지하와 윤혜미를 불러냈다.
“액션!”
총감독의 지휘하에 두 배우가 호숫가 산책로에 멈추어 섰다. 윤혜미의 표정은 뻣뻣했으나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는 오늘따라 반짝였다.
권지하가 윤혜미를 향해 대사를 내뱉었다. 간밤 다율에게 연습했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가 여자의 뺨을 감쌌다. 두 남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기어코 입술이 맞물렸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율은 가만히 제 입술을 깨물었다.
키스신은 오래 이어졌다. 컷! 소리가 났을 때 윤혜미는 장난스레 웃으며 권지하의 가슴팍을 때렸다.
“지하 씨, 숨 막히잖아요!”
“음. 내가 배려가 없었구나. 생각을 못 했네요.”
“에이, 정말!”
윤혜미가 밉지 않게 권지하를 흘겼고 권지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다율과 눈을 마주쳤다. 다율은 못 볼 것을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한 번만 다시 갈게요. 액션!”
재촬영 지시가 떨어졌다. 두 배우가 다시금 키스신을 연기했다. 다율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때 마침 눈에 커피 트럭이 들어왔다. 권지하의 외국 팬들이 응원을 위해 촬영장에 보내온 것이었다. 권지하는 인기가 높은 만큼 국내외 팬덤에서 촬영장 서포트 신청이 많이 들어왔다. 그 서포트들의 순서를 맞추고 밥차나 커피차가 들어올 날짜를 조율하는 것 또한 다율의 업무 중 하나였다.
생각해 보니 오늘 메뉴 중에 와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단거나 먹고 기분 풀까? 다율은 커피 트럭 앞을 어슬렁거렸다. 그러자 점원이 우렁차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뭐 드릴까요?”
“와플에 아몬드 토핑 많이 뿌려 주세요.”
“이 정도면 될까요?”
“아뇨. 그거 두 배만큼이요. 메이플 시럽도 끼얹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다율은 점원이 건네는 와플을 건네받아 한 입 앙 베어 물었다. 갓 구운 거라 그런지 바삭하고 달콤했다.
아주 멀리 권지하와 윤혜미가 투닥투닥 장난을 치고 있었다. 스태프들도 둘을 둘러싸고 웃는 분위기였다. NG 이후 상황을 남겨 나중에 블루레이가 나올 때 팬 서비스용으로 삽입하기 위해 찍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다율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권지하 앞에서 당당하게 웃고 키스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너무도 부러웠다.
‘러브신은 연기일 뿐이니 의연해져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눈앞에 펼쳐지면 질투를 참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게 짝사랑이다.
다율은 고독한 사람이 담배를 태우듯, 와플을 꼭꼭 씹어 먹었다. 와플을 다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키스신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마냥 대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율은 호숫가에 서 있는 권지하를 바라보며 우울감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때 권지하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과 함께였다.
어, 나를 부르시네. 얼른 가야겠어.
다율은 종종걸음으로 뛰어 촬영 장소로 돌아갔다.
“잠시 휴식 시간이에요. 한 시간 후에 다시 모이면 된대.”
“그렇군요. 커피차에서 와플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맛있던데.”
“아니야. 그보다는….”
“그보다는 뭐요?”
“차로 가자. 이 매니저한테 부탁할 게 있어요.”
“뭔데요?”
“나 졸려요. 재워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