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치카치카. 다율은 구석구석 꼼꼼하게 양치질을 했다. 오늘따라 눈 밑이 거무튀튀한 것이 몹시도 피곤해 보여서 세안도 공들여 했다.
따뜻한 물로 온몸을 씻어낸 그는 머리를 대강 말리고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안방 문에 대고 살살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실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방 안에는 작은 스탠드 조명만이 켜져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검은 가운 차림의 권지하가 서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율 쪽으로 걸어와 덜 마른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런. 머리가 덜 말랐네.”
“급하게 나오느라 못 말렸어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배우님 추우시잖아요. 얼른 재워드려야죠.”
“아무리 그래도 머리는 말리고 자죠.”
권지하가 다율을 침대에 앉혔다. 그러고는 화장대 위에 놓인 헤어 드라이기를 길게 빼 들어 전원을 켰다. 위잉- 소리와 함께 갈색 머리에 따듯한 바람이 내려앉았다.
“안 뜨거워요?”
“적당해요.”
권지하가 다율의 보들보들한 갈색 머리를 매만졌다. 살살 바람을 넣어 가며 말렸더니 머리가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고맙습니다. 배우님.”
“그럼 이제 잘까요.”
“네.”
다율이 먼저 침대로 다가갔다. 벌써 몇 달째였지만 이렇게 침대에 누울 때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율은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이불을 젖히고 몸을 눕혔다. 권지하도 곧바로 이불을 젖히고 그 옆자리에 누웠다.
“불 끌게요.”
“네.”
권지하가 수면등을 껐다. 깜깜한 어둠이 내림과 동시에 권지하가 긴 팔을 뻗었다. 그런 다음 다율을 스르륵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향수 냄새와 섞인 보디샴푸 향기가 다율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짙은 남자 냄새도 났다.
서늘하면서도 널찍한 맨가슴에 얼굴이 닿자 다율의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언제 안겨도 적응이 안 되는 야성적인 품이었다.
차라리 뜨겁기라도 하면 몰라. 건조한 피부는 미묘한 서늘함을 띠고 있어서 너무나 야릇한 느낌을 줬다.
두근두근. 다율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혹시라도 이 소리가 권지하의 귀에 들릴까 봐 다율은 몸을 슬쩍 뒤로 뺐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권지하는 다율을 팔다리로 얽어매며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시원한 손이 따끈따끈한 다율의 몸 구석구석을 만졌다.
“가, 간지러워요.”
“이렇게 만지는 게 하루 이틀인가요. 조금만 참아요.”
권지하는 항상 이렇게 다율을 만지작거리다가 잤다.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어깨를 쓸고 때로는 허벅지 사이에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때마다 다율은 식겁했으나 이 또한 매니저의 소양이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간지러움에 벌벌 떨면서도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흐읏. 오늘은… 좀… 살살 만져 주세요.”
“응. 알았어요.”
다율이 소곤거리자 손길이 정말로 부드러워졌다. 마치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에 다율의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끔뻑끔뻑 눈꺼풀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 보니 점점 졸음이 쏟아졌다.
“…저 먼저 잘게요.”
“잘 자요.”
곧 다율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평화롭고도 아찔한 밤이었다.
이튿날 <시티 오브 나이트> 촬영이 개시되었다. 첫 촬영지는 일산에 있는 호수공원이었다. 오전부터 각 배우의 스태프와 제작진이 몰려들어 공원은 소란스러웠다.
“안녕하세요! 권지하 배우님 팀입니다!”
다율은 지나가며 마주치는 PD와 작가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우렁차게 외쳤다.
“어머, 다율 씨! 지하 씨! 일찍 오셨구나. 반가워라. 오전에는 간단하게 리허설부터 할 거거든요. 저쪽 부스로 모여 줘요.”
“네. 감사합니다. 작가님.”
보조 작가가 정면에 있는 부스를 가리켰다.
“잘하고 오세요!”
권지하는 간단한 메이크업 수정을 받으며 촬영 준비를 했다. 그가 부스로 향하기 전, 다율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쳤다. 권지하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 이게 뭐예요.”
“이 매니저님 상비약이잖아. 놓고 나오면 어떡해요.”
권지하가 내민 것은 땅콩 캐러멜이었다. 다율의 눈이 반짝 빛났다.
“와. 고맙습니다.”
“이거 먹으면서 기다려요. 첫 신만 끝나면 바로 식사 시간이니까. 알겠지?”
“네! 안녕히 다녀오세요!”
다율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오직 캐러멜 하나 때문에. 권지하가 저를 두고 성큼 걸어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였어도 외롭지 않았다.
이 캐러멜은 먹지 말고 아껴놔야지. 100년 동안 보관할 거다. 어디에 보관할까? 나무 아래 흙을 파서 덮어 놓을 수도 없고… 흠.
어차피 자기가 장 본 것인데도 오직 권지하 손을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캐러멜이 너무나 소중했다.
“촬영 잠시 중단하고 식사하겠습니다.”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첫 신이 끝났다. 벽면에 자리를 잡고 서서 미어캣마냥 권지하를 살피던 다율이 쪼르르 그에게 달려왔다.
“배우님. 배고프시죠? 오늘 서포트 도시락이 들어왔습니다.”
“아, 팬 카페에서 보낸 건가?”
“네. 완전 다양하고 호화롭게 들어왔어요. 최고예요.”
다율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를 빈 테이블로 이끌었다. 언제 세팅을 마쳐 놓은 건지 데코레이션이 휘황찬란한 도시락이 테이블에 깔려 있었다. 고급 용기 안에는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와 콜드 파스타, 안심을 곁들인 샐러드 등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잠깐만요. 저 사진부터 찍을게요. 팬 카페에 업로드해야 돼서요.”
다율은 수십 가지가 넘는 음식들을 일일이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 다음 권지하에게 커스텀 텀블러를 들고 셀카를 찍게 했다. 그러고 나서야 권지하는 포크를 쥘 수 있었다.
“이 매니저는 안 먹어요?”
권지하가 샐러드를 집으며 물었다. 그러자 다율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는 이것만 있으면 돼요.”
그가 들어 올린 것은 호두, 땅콩, 피칸으로 만든 견과류 디저트였다.
“우와 맛있어. 너무 고소하다.”
디저트 한 조각을 베어 문 다율이 눈을 찡긋거렸다. 입가에는 씰룩씰룩 미소가 번졌다. 열흘 굶었다가 뷔페에 입장한 사람도 저렇게까지 만족스럽게 웃지는 못할 것이었다.
“견과류 되게 좋아하네요.”
“네. 전 이것만 먹고 살….”
다율이 해맑게 대답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너무 견과류에 미친 사람 같잖아. 이러지 말자.
“아. 맛이 썩 괜찮네요.”
그러고 나서 다율은 젓가락을 들어 유부초밥과 오리훈제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간간이 컵에 따라 마시는 건 역시나 아몬드 율무차였다. 권지하의 시선이 다율에게 따라붙었다.
“왜 쳐다보세요, 배우님? 드시지 않고.”
“아니. 너무 편식이 심한 것 같아서.”
“아… 제가 그런가요?”
“한 가지 음식만 좋아하니까 귀엽네요.”
딸꾹! 다율이 너무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 아니… 제가 귀엽다니.”
다율의 얼굴이 빨개졌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귀엽다는 말을 듣다니,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로또라도 살까 싶었다.
“칭찬받아서 기분 좋아요?”
“…조금요.”
“하하.”
권지하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피식 웃더니 다율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입가에 남아 있는 호두 부스러기를 떼어 주었다. 다율은 흠칫하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손길이 너무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나저나 다음 신은 뭐예요? 오늘 어디까지 찍는 건지 체크해 놓으려고요.”
다율은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권지하는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며 그윽한 눈빛을 띠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는 장면이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악센트를 강하게 줬다. 다율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
촬영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두 사람 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다율은 권지하의 내일 촬영에 필요한 옷부터 챙겼다. 옷장 안에는 멋진 옷이 수두룩했지만, 그중 필요한 옷은 하얀색의 셔츠였다. 다율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핏이 좋은 명품 셔츠를 골랐다.
“배우님, 이런 셔츠 준비하면 되는 거 맞죠? 하의는 내일 따로 준비해 주신다고 김 선생님이 그러셨는데요.”
“맞아요. 내일은 흰 옷 입고 찍는 신이 중요해서.”
“알겠습니다.”
간편한 스탠딩형 다리미도 갖추고 살았지만 기왕이면 권지하가 멋있어 보였으면 하는 게 다율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다리미판을 꺼내와 셔츠를 눕히고 정석적인 방법으로 옷감을 다렸다.
치익- 스팀 소리와 함께 옷 주름이 팽팽하게 펴지며 각이 살아났다. 그에 맞춰 다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매니저.”
창가 소파에 앉아 <시티 오브 나이트> 대본집을 읽던 권지하가 그를 불렀다.
“네, 배우님.”
“매니저님은 키스해 봤어요?”
난데없는 소리에 다율의 눈이 커졌다.
“지금 무슨… 뭐라고 하셨어요?”
“키스해 봤냐고요.”
권지하가 남자치고 지나치게 잘빠지고 색깔 또한 오묘한 제 입술을 가리켰다. 다율은 질문이 당황스러웠으나 일단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싶었다.
“그,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내일 키스신 촬영이잖아요. 지금 대본집에서 막 그 장면으로 접어들었거든. 나 혼자 남주 감정 해석하려니까 잘 안 돼서. 이 매니저 도움 좀 받고 싶은데… 어쨌든 그래서 내 질문은, 해 봤냐고요?”
권지하가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다율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해… 봤죠. 저도 스물두 살인데.”
다율의 인생 기조는 최대한 평범하게 살기, 그리고 그렇게 보이기였다. 자신이 알기로는 보통 인간 성인들은 스무 살을 기점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그에 따라 키스 정도의 스킨십을 경험한다.
물론 그 이상까지 가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쪽은 미지의 영역이므로 패스. 어설프게 둘러댔다가는 털릴 수가 있으니 키스만 화제로 삼는 것이 좋았다. 다율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인간 나이 스물두 살이면 키스는 해 봤다고 말해야 자연스러울 것이었다.
“해 봤다고?”
순간 권지하의 얼굴이 경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