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따사로운 미풍이 불어와 민들레 홀씨를 팡 흩날렸다. 그 홀씨 중 하나가 둥둥 날더니 살짝 열린 창문 틈을 파고들었다.
<시티 오브 나이트 제작 발표회-KTBC 본사 세미나실>
홀씨는 현수막이 걸린 천장을 지나 유유히 날았다. 단상 아래 구석진 곳에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서 있던 다율의 시야에 그 홀씨가 들어왔다.
엇. 민들레 홀씨잖아! 조심해야지. 다율의 갈색 눈망울에 긴장이 어렸다.
제발 내 쪽으로 오지 말아라. 저거 내 코에 내려앉으면 100퍼센트 재채기 나온다.
그러나 다율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홀씨는 나풀나풀 날아 점점 다율과 가까워졌다.
어쩌지. 나 어떡해.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식은땀이 났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창백해지고 둥글고 큰 귓바퀴는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서둘러 얼굴을 가릴 만한 것을 찾아 고개를 돌렸을 때 홀씨는 기어코 다율의 콧잔등에 철썩 앉아 버렸다.
읍! 간지러워.
다율의 온 신경계가 발작을 했다. 코가 간질간질 재채기의 시동을 걸었다. 다율은 양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홀의 육중한 문에 몸통을 박치기했다.
빨리 사람이 없는 곳으로… 빨리 가야 해!
우다다. 다율의 발소리가 방송국 복도를 울렸다. 그는 정신없이 복도를 누비며 화장실을 찾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직원용 화장실이 보였다. 다율은 다리가 찢어지도록 냅다 뛰어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갔다.
“푸… 푸엥취!”
요란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다율은 사라졌다. 아니 정정. 황금색 다람쥐로 변하며 그의 옷이 허공에서 폭삭 주저앉았다.
다람쥐 다율은 자그마한 앞발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았다. 간신히 위기는 모면했으나 요즘은 꽃가루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이니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그는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인간. 인간이 되고 싶다.
십 초 정도 지났을까. 펑! 소리와 함께 다람쥐는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대신 알몸의 성인이 떡하니 등장했다.
“후… 남들 앞에서 실수하면 안 되니까 앞으로 더 더 조심해야지.”
그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중얼거렸다. 칸 바깥으로 나와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봤다. 그 안에는 순한 인상의 미소년이 비쳤다. 하지만 그는 볼 수 있었다. 거울 너머 진정한 자신의 모습, 황금다람쥐 가문 9대 독자의 늠름한 모습을.
다율은 수인이었다.
그것도 귀하디귀하다는 황금다람쥐 수인.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던 다율이 이곳 서울 상암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은 지난겨울 맞닥뜨린 수인 헌터 때문이었다.
전 인류의 0.1%에 불과할 정도로 개체 수가 적은 수인. 이들은 비주류이다 보니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물론 시민은 시민이라 기본적으로 출생신고와 사망신고가 가능하긴 했지만, 수인들은 웬만해서는 인간 세상에 내려오지 않고 되도록 산속이나 물속에서 지내는 것을 선호했다. 굳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 푸대접을 받거나 나아가 험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수인의 입지는 그만큼 열악했다. 수인을 저임금으로 부려 먹거나 불법적인 노동 현장에 투입하는 등 그들의 수인권은 나날이 바닥에 처박히고 있었으나 정부는 그 작태를 나 몰라라 했다. 극소수 수인권 운동가들은 수인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며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율은 인간 세상에 내려갈 용기가 없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잡혀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변태적인 인간들은 수인을 보양식으로 즐기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약재는 단연코 황금다람쥐였다. 최근 들어 ‘약재로 쓰면 정력에 좋다’는 루머가 돌면서였다. 그러니 수인 헌터라는 직업이 생겨나 전국의 산을 들쑤시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눈 내리던 겨울밤 다율은 수인 헌터를 맞닥뜨렸다. 스산한 달빛을 받아 그들이 등에 짊어진 총이 매섭게 빛났다.
‘황금다람쥐 수인이 여기 속리산에 숨어 산다지? 전국에 열 마리도 안 남았을 텐데. 내다 팔면 몸값 엄청 비싸게 받을 수 있겠어.’
‘내가 지난번 헌팅 때 봤어. 몸이 반질반질 황금빛으로 빛나고 꼬리가 풍성한 놈이 혼자 다니더라고. 무리가 없나 봐.’
‘그럼 사냥하기 딱 좋겠군! 어어, 잠깐만. 저기 저놈 아니야? 저기 쥐새끼 잡아라!’
다율은 기겁하며 도망쳤다. 작은 앞발이 가시덤불에 긁혀 피가 나도 통통한 꼬리가 나무에 걸려 자빠져도 그저 죽어라 도망쳤다.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터져 나올 지경으로 달리고 또 달려 터널을 지났다. 산은 점점 멀어져 갔고 다율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쓰러졌다.
그래도 조금만 더 멀리 도망쳐 보자고 힘겨운 발걸음을 이끌던 그때 갑자기 눈앞에 도시가 펼쳐졌다.
<서울>.
다율은 그 두 글자가 얼마나 무서운 의미인지도 모른 채 도시에 자그마한 발을 디뎠다.
사람과 마주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과거 속리산에 둥지를 틀고 살 때 가끔씩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내려가기는 했었다. 기본적으로는 동물화한 모습으로 야생에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인간의 물건이 필요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율은 마을의 허드렛일을 돕거나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물건과 돈을 얻었다. 그가 보통 하는 일은 알밤 줍기, 도토리묵 쑤기, 밤 막걸리 만드는 공장에서 잡일하기 등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작은 농촌 마을이었고 비교적 안전했다. 그때만 해도 황금다람쥐가 정력에 좋은 약재로 떠오르기 전이었기 때문에 무시는 당할지언정 잡혀갈 걱정 없이 일을 할 수 있었고. 그러나 이런 대도시는 처음이었고 서울은 너무 냉혹한 곳이었다. 방을 얻으려 해도 큰돈이 필요했으며 밥 한 끼를 사 먹으려 해도 물가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일푼으로 도망친 다율로서는 생존을 위한 일자리가 필요했다.
이미 둥지를 들켰기 때문에 산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 험한 인간 세상에서 버텨야 한다. 다율은 수인 헌터들의 추격을 막기 위해 인간 모습으로 변해 정체를 감춘 채 일을 해 먹고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예전에 따 두었던 운전면허가 도움이 되었다. 그는 무작정 배달 일을 시작해 소액의 돈을 벌게 되었다.
그러다가 성실하게 일하는 다율의 모습을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의 소개로 공사장 일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공사 기간 동안 숙식이 제공된다는 장점에 끌렸다.
다율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벽돌을 날랐고 시멘트를 갰고 아스팔트를 다졌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자 공사는 끝나 버렸고 다율은 임시 숙소에서 쫓겨났다.
난 이제 어떡하지. 다율은 집 한 칸 없는 신세가 처량했다. 방을 구하면 그 비싼 월세도 내야 하고 공과금도 내야 한다. 입에 풀칠할 돈도 필요한데 난 어떡해.
다시 산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냐, 그곳은 너무 위험해. 다시 수인 헌터를 마주치면 어쩔 거야. 그렇게 고민이 깊어만 가던 때, 발견한 게 바로 <매니저 채용 공고>였다.
[연예인 로드 매니저 모집합니다. 경력 무관, 학력 무관. 대신 해당 연예인과 24시간 숙식을 함께해야 함. 위반 시 계약 해지되오니 신중한 지원 바랍니다.]
“헉. 바로 이거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때가 아니었다. 높은 연봉에 안전한 숙소까지 제공이라니. 연예인과 24시간 붙어 지내며 같이 숙식한다는 근무 조건이 다율에게는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당장 면접에 지원했고 최종면접 자리에서 담당 배우 권지하를 만나게 되었다.
세월 참 빠르다. 그렇게 추웠던 겨울이 가고 벌써 봄이 왔네. 솜사탕 같은 민들레 홀씨가 훨훨 봄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계절이 되어 버렸어.
옷매무시를 다 추스른 다율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가 제작 발표회 현장으로 돌아옴과 동시에 행사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와 주신 미디어 취재진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시티 오브 나이트> 감독님과 작가님 그리고 주조연 배우분들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
프로페셔널한 사회자의 진행에 맞추어 단상 위로 여러 명의 남녀가 줄을 지어 올라왔다. 하지만 기자들의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오직 한 명, 정중앙에 우뚝 솟은 남배우뿐이었다.
슬림한 핏을 자랑하는 정장은 그의 귀족적인 골격을 강조했고 네이비 톤의 코디는 전체적으로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그의 이목구비를 십분 살렸다.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에 서늘한 이미지를 지닌 그의 장점을 한껏 살린 코디는 완벽했다.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눈부시게 훤칠한 모습이었다.
한국 연예계 사상 최고의 미남 배우. 누구나 상대역을 하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배우 권지하. 지난 연말 시상식 때 불과 스물일곱의 나이에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조각 같은 얼굴에 타고난 연기력까지 갖춘 그를 막아설 자는 없었다. 권지하는 단언컨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배우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지는 중이었다.
기자들은 셔터를 누르며 정신없이 권지하를 불렀다.
“권지하 배우님! 여기 봐 주실래요. 정면 보이게요. 네네!”
“권 배우님께 질문드려도 됩니까? 이번 작품이 오랜만에 찍는 드라마다 보니 소감이 궁금합니다.”
“배우님! 권지하 배우님! 저희 질문도 받아 주십시오.”
권지하는 벌떼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을 향해 나긋하게 답했다.
“질문은 각 언론사당 하나씩만 받겠습니다. 대신에 사진은 마음껏 찍으세요.”
“저희가 먼저 질문드리죠. 권지하 배우님. 이번 봄 최고 기대작 주연을 맡게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남자주인공으로서 포부를 한마디 밝혀 주십시오.”
한 기자가 들뜬 목소리로 질문했다. 권지하는 자기 몫의 마이크를 쥐고서 여유 있게 웃었다.
“포부랄 건 없습니다. 저는 늘 잘하니까요. 이번에도 최고의 결과가 나오겠죠.”
다소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대답이었는데도 비웃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의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단순히 잘난 외모로 뜬 것이 아니었고 실력이 출중했으며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배우였다. 그래서 자신감이 넘쳐흐르다 못해 폭포수를 이루는 답변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역시 작년 최우수연기자상 수상자다운 대답이십니다. 윤혜미 씨와의 케미스트리도 기대되는데요. 베스트 커플상 기대해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벌써부터 잘 어울리지 않나요?”
권지하가 여배우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좌중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촤르륵. 두 남녀를 찍느라 사방에서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다율은 저 멀리 무대에 오른 그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깔깔하게 목이 탔다. 주머니에 땅콩 캐러멜 있는데 꺼내 먹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지나온 대부분의 나날이 그랬다. 다율은 권지하의 등만 보면 목이 타고 속이 답답했다.
왜냐면 다율은 권지하를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