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수환은 부쩍 쌀쌀해진 날씨를 느끼며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땀이 날 정도로 더웠던 것 같은데,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 갈수록 날이 추워졌다.
양복 위에 얇은 코트를 걸쳐 입고, 수환은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오늘은 윤현 대신 수환이 연구실에 가서 진행 상황을 검토할 예정이었다.
신약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다가오는 겨울쯤 유럽에서 유행병이 도는 건 아직 수환만 알고 있는 일이다. 그 유행병의 치료제가 HS의 신약이 될 거라는 것도 말이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약이 개발되고, 화명의 도움으로 유통까지 하고 나면 모든 게 완벽할 것이다. 수환은 승현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와 먼 미래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비록 이 세계가 원래는 소설이고, 자신은 이물질에 불과했던 캐릭터에 빙의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결심했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서는 미약한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과연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가 끝이 날까. 메인공인 주건율, 그리고 한성이 HS를 쉽게 포기할까. 무엇보다 이 세계가 순순히 자신과 승현이 맺어지도록 내버려 둘까.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 때가 있었다.
부우웅.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수환이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에 뜬 이름을 들여다봤다. 조금 어두웠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확 밝아졌다.
―형.
“응, 승현아.”
전화를 받은 수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조금 피곤한 기색이 느껴졌다. 승현은 요즘 막바지에 다다른 연구를 돕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시험 기간 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고 승현은 자주 우는소리를 했다.
―어디예요? 지금 오는 중이에요?
“퇴근하고 가는 길이야. 저번에 샀던 빵 좀 사 가려고.”
하지만 다행인 건, 수환의 사수인 윤현이 HS 투자 건의 담당이 되어서 한창 연구 중인 승현을 꽤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윤현이 다른 일로 바빠서 수환이 대신 연구실에 들를 예정이었다. 그리고 가는 김에 연구원들이 좋아했던 빵이 생각나 빵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뭐 하러 사 와요. 그냥 와요.
“하지만 저번에 다들 좋아했으니까.”
―빨리 보고 싶단 말이에요.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온 말에 수환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다른 빵집 입구에서 괜히 주변을 살핀 수환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도, 보고 싶어.”
―그럼 빨리…….
그러자 승현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중간에 껴들었다. ‘밖에 나가서 통화하라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재현의 것이었다. 자신에게 외친 말도 아니지만 수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아, 진짜.
승현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현이 재현의 등쌀에 못 이겨 연구실 밖으로 나가려는 거였다. 수환이 놀라며 승현을 만류했다.
“나 빵만 사고 바로 갈게. 밖에 나오고 그러지 마. 추워.”
―…….
“지금 빵집 앞이란 말이야. 사는 데 시간 얼마 안 걸려.”
거듭되는 말에 결국 승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당부하듯이 덧붙였다.
―대충 사고 와요.
“응, 알았어.”
―어차피 먹어 봤자 살만 찌는데.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야유가 쏟아졌다.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불퉁스럽게 들렸다. 자기는 살 안 찐다고 막말한다는 내용이었다. 재현의 랩실에서 승현을 빼면 가장 나이가 어린 연구원인 김하나일 것이다. 수환이 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 사고 갈게.”
―조심해서 와요.
“응.”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아쉬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승현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서 실물의 그를 만나고 싶었다. 수환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빵집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점원에게 꾸벅 인사하고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소한 빵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수환이 얼른 진열대 쪽으로 다가갔다.
인기 있는 빵집이고, 늦은 오후 시간이라 남은 빵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대충 훑어보니 인원수에 맞춰 사 갈 정도로는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빵을 담을 트레이와 집게를 든 수환이 제법 진지하게 빵을 살폈다. 하나 씨는 분명 망고가 토핑된 타르트를 좋아했었고, 요한 씨는 녹차 맛 카스테라, 재현 교수님은 달지 않은 커피번.
연구원들의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수환이 트레이 위에 빵을 차곡차곡 올려 담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먹을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승현이 먹을 아몬드 쿠키도 챙겼다. 수환이 흐뭇한 얼굴로 계산대에 다가갔다.
“안녕히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계산을 끝내고 점원에게 인사한 수환이 빵집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는 비어 있었던 그의 손에는 묵직한 빵 봉투가 들려 있었다. 수환이 빵을 맛있게 먹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을 때였다.
부우웅.
주머니 안에 넣었던 핸드폰이 다시 진동을 울렸다. 승현인가? 그새를 또 못 참고. 자연스럽게 생각한 수환이 웃는 낯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빵 봉투 때문에 손이 남지 않아서, 한 손으로 핸드폰을 겨우 꺼냈다. 그러나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수환의 웃는 얼굴이 굳어졌다.
[주건율]
“…….”
침을 꿀꺽 삼켰다. 한동안 잊으려고 애썼던 세 글자가 수환의 눈에 박혔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수환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왜 전화한 걸까. 역시 아직 승현을 포기하지 못한 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사이 전화가 끊겼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할지 들어 봐야 했는데. 수환이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하네. 일부러 안 받을 것까진 없잖아?”
“……!”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건율이 가까이 다가왔다. 수환이 빳빳하게 굳어 가는 몸을 느끼며 다가온 건율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우성의 페로몬에 짓눌렸던 기억이 몸에 남아 있는 건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막을 길 없이 가늘게 떨렸다.
“오랜만이네.”
얼어붙어 있는 수환을 내려다보며 건율이 씩 웃었다.
“……주건율.”
수환이 겨우 입을 열었다. 창백한 얼굴로 건율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왜 네가 여기 있어?”
“…….”
건율은 대답 없이 흘끗, 수환이 든 봉투를 쳐다봤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 빵 맛있지. 나도 자주 사 먹어.”
“…….”
“여기 우리 집에서 가깝거든.”
수환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건율의 집이 어디 있는지 관심도 없었고, 설마하니 자주 다니는 빵집이 메인공의 집과 가까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수환이 낭패 어린 얼굴로 건율을 마주 보았다.
“왜? 내가 형 스토킹이라도 한 줄 알았어?”
“그…….”
“건너편에서 형이 보인 거 같아서 전화했는데, 설마 안 받을 줄은 몰랐지.”
“…….”
“그때 일 때문에 아직도 내가 무서워?”
재밌다는 듯이 건율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수환은 그 얼굴을 불쾌하게 보다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건율의 눈이 제법 반항적인 수환의 얼굴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해도, 긴장해서 뻣뻣하게 세운 목과 잘게 떨리는 눈동자는 가릴 수 없었다. 건율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우성의 앞에서 열성이란,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에 불과했다.
“볼일? 뭐, 만난 김에 할 얘기 정도는 있지.”
“…….”
“잠깐 얘기나 하고 가지?”
얼굴을 옆으로 비튼 건율이 턱짓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검은 세단이 바로 옆에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저기에 타라는 건가. 수환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세단을 흘끗 쳐다봤다.
메인공인 건율이 어떤 말을 할지는 궁금했지만,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은 여러모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수환은 이미 한 번 그에게 크게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만약 승현의 일로 화풀이라도 한다면 자신은 건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지금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중에, 화련에게 말해 경호원이라도 대동하고 만나는 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건율을 따라가선 안 된다. 수환이 결심하며 입을 열었다.
“안 타.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해.”
“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라면 건율이 허튼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순순하게 굴지 않는 수환을 보며 건율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까지 경계할 일이야?”
“페로몬으로 사람 죽일 뻔한 건 너잖아.”
“아니, 먼저 열 받게 한 게…… 됐다.”
사납게 이를 드러내려던 건율이 별안간 다시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수환은 건율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다시 뻣뻣하게 굳었다. 귓가에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이재현 교수 연구실 가는 길이었지?”
“……!”
“거기에 경호원을 몇 명 세워 놨더라. 세 명? 네 명?”
“너…….”
수환이 경악한 눈으로 건율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건율이 느긋한 태도로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위협적인 어조였다. 수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혼자 생각하곤 했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메인공인 건율은 아직도 메인수인 승현을 포기하지 않았고, HS의 신약도 주시하고 있었다. 재현의 연구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의 숫자를 파악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마음만 먹으면 그깟 경호원들쯤은 치우고 승현과 재현에게 해코지할 수 있다는 듯, 건율은 여유로운 얼굴로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폰을 꽉 쥔 손에서 땀이 났다.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있었던 걸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저 단꿈에 젖어서, 이 세계의 축복을 받은 주인공은 언제든지 자신의 모든 걸 뺏어 갈 수 있는데. 그게 그저 유예의 시간인지도 모르고. 수환의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소설 속의 자신이 죽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저번에 내가 이승현에게 꽤 흥미로운 말을 들었거든.”
“뭐?”
“걔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
“조만간 내가 그렇게 될 예정이라서 말이야. 그 말에 나도 요즘은 동감하고 있어.”
건율은 이번엔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입만 벙긋했다. ‘타.’ 수환은 그 입 모양을 보고도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 저도 모르게 발을 움직이려고 했다. 열성의 형질 때문인가, 자신보다 우월한 우성 형질에게 복종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더러웠다.
“헛소리하지 마.”
“손이 많이 가게 하네.”
건율이 못 박힌 듯 서 있는 수환을 보며 혀를 찼다. 좋은 말로 할 때 같이 가면 얼마나 좋아. 이승현도 그렇고, 그의 페로몬을 여전히 온몸에 묻히고 있는 수환도 만만치 않게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건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윽.”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어?”
“주… 건율.”
수환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수환의 몸을 건율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감싸 안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픈 친구를 부축하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환은 지금 건율의 페로몬에 짓눌린 상태였다. 수환의 찡그린 눈이 주변을 살폈다. 애석하게도 주변에는 베타만 있는 듯, 이상한 걸 알아채지 못하고 사람들이 휙 지나갔다. 수환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지만, 건율이 부축하며 걸어가니 시선을 떼며 다시 발을 옮겼다.
“이거…… 놔.”
“그래, 그래.”
“윽!”
차 뒷문이 열리고, 수환은 그곳에 억지로 들어갔다. 수환이 들고 있던 빵 봉지가 뒷좌석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걸 꾹 참으며 수환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무언가가 수환의 시야를 막았다.
“읏!”
“가만히 있어.”
“무슨…….”
“도착하면 벗겨 줄게. 남들이 보면 안 되는 길이라서 말이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수환은 어두컴컴해진 시야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원작에서의 진수환은 밤길에 집 근처에서 납치되었다. 그때 그를 납치한 자들이 진수환에게도 이런 복면을 씌웠었다. 수환은 겁에 질린 채 밭은 숨만 겨우 내쉬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곧 벗겨 줄 테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
“형이 협조만 잘해 준다면 말이지.”
짐짓 선심 쓴다는 듯한 어조로 건율이 속삭였다. 그의 눈은 먹잇감을 잡은 뱀처럼 기묘한 희열을 품고 있었다.
‘승현아.’
수환은 가물가물해지는 눈앞을 느끼며 승현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
승현은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을 흘끗 쳐다봤다. 곧 비라도 올 듯이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너무 늦는 거 같은데.”
작게 중얼거리자 곧바로 타박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너 전화 끊은 지 30분도 안 됐어. 미친놈아.”
“벌써 30분이나 지났다고?”
“미친 새끼, 진짜.”
재현이 혀를 끌끌 찼다. 이 정도면 정말로 상담이라도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동생 놈이 의부증에 단단히 걸린 미친놈이에요.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할 수도 없고, 진짜. 재현이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나 전화하고 올게.”
“그래, 해라. 해.”
이제 말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재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승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에 들어갔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연구실 안과 다르게 휴게실은 난방을 켜 놓지 않아 다소 쌀쌀한 편이었다. 승현은 개의치 않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방금 통화했던 연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
처음 건 전화는 수환이 받지 않았다. 승현이 의아한 얼굴로 꺼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빵 산다더니 그쪽에 정신이 팔렸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번, 세 번, 더 걸어 보았다.
―연결이 되지 않아…….
“뭐지?”
수환이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승현은 초조함을 느꼈다. 망설이던 승현이 위치 추적 앱을 켰다. 이젠 따로 뭘 하지 않아도, 앱만 켜면 저절로 로그인되어 수환의 위치가 지도에 떴다. 그걸 보던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지도에 표시된 수환의 위치가 계속 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빠른 속도로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사용자의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
그리고 그렇게 이동하던 아이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알림이 떴다. 수환의 핸드폰 전원이 꺼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승현이 당황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순간 수환에게 그동안 위치 추적을 했던 일이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수환이라면, 멋대로 자신의 위치를 추적했다는 걸 알았어도 막무가내로 핸드폰을 끄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먼저 전화를 하든, 아니면 직접 만나든 해서 왜 그랬는지 물었겠지. 이러는 건 수환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누군가가 수환을 데리고 가면서 핸드폰 전원을 일부러 껐을 가능성이 더 컸다. 아이콘이 그렇게 빨리 이동한 걸 보면 차를 타거나 그만큼 빠른 이동 수단에 수환을 태웠을 것이다. 순간 누군가의 이름이 승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씨발.”
그 정도의 경고로는 부족했던 건가. 승현이 입술을 짓씹었다. 한동안 잠잠한 것 같아서 포기한 줄 알았더니.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승현이 곧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
“으윽.”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며 수환이 눈을 떴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깨질 듯한 머릿속으로 조각조각 난 기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퇴근길에 윤현 대신 연구실에 가기로 했고, 그 길에 빵집에 들렀다. 그리고 빵을 사고 나오자마자 마주쳤던 주건율. 결국 그의 페로몬에 꼼짝도 못 하며 차를 탔고 어딘가로 향했다. 머리에 복면을 쓴 뒤로는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여기까지는 원작 소설에서 진수환이 납치당했을 때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수환은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팔을 문지르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고 했다.
절그럭.
“……!”
하지만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양손은 부자연스럽게 뒤로 묶여 있었다. 놀란 수환이 제 몸을 내려다봤다. 코트와 양복 재킷은 벗겨져 있었지만, 다행히 셔츠와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다. 아마 소지품을 검사하려고 옷을 벗긴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손의 이건…….
수환은 절그럭거리는 족쇄를 난감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손목을 감싼 건 검은색 가죽이지만, 가죽 족쇄 중간에 쇠사슬이 이어져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걸 진수환의 BDSM 컬렉션에서 본 것 같았다. 하필 자신이 이런 구속구를 차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원작의 진수환은 마지막에 더 심한 취급을 받았었다.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꽁꽁 묶여 지저분한 창고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런 데가 아니었다. 수환이 예전에 머물렀던 화명의 호텔 스위트룸만큼이나 깔끔하고 호화스러운 공간이었다. 수환은 지금의 상황도 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게다가 손만 뒤로 묶여 있을 뿐, 발은 멀쩡했다. 이럴 거면 왜 손을 묶어 놓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썹을 찌푸린 수환이 멀쩡한 발을 살피다 몸을 완전히 일으켰을 때였다.
“일어났네?”
“…….”
방 안으로 들어온 건율이 태연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수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뚝 서서 건율을 바라보기만 했다. 건율은 느긋한 태도로 수환에게 다가왔다.
“여기 어디야?”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건율에게 당황하며 수환이 물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건율이 피식 웃었다.
“어딘지 알려 줄 거면 형을 그렇게 데리고 왔겠어?”
“…….”
“일단 앉아.”
근처에 있는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건율이 말했다.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건율은 고풍스러운 엔틱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배가 부른 육식 동물처럼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건율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공간과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킨 수환이 건율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 풀어 줘.”
“형은 위스키 좋아했었지?”
“주건율.”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딴청을 피우는 건율을 보며 수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납치하듯이 데려와서 평소처럼 굴려고 하는 모습은 도무지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소름만 끼칠 뿐이었다. 손에 든 술잔을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 둔 건율이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왜? 불편해?”
“당연하지.”
“조금만 참아. 형도 알파잖아. 두 손 두 발 멀쩡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내가 뭘 믿고?”
이상한 말이었다. 우성 페로몬으로 사람을 그렇게 꼼짝도 못 하게 할 땐 언제고. 그는 마음만 먹으면 두 손 두 발 멀쩡한 자신을 언제라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제 몸이 상할까 걱정해야 할 쪽은 건율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수환이 얼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웃기지 마. 이런 곳에 날 억지로 데려온 건 너잖아.”
“뭐…… 그렇지.”
“대화할 거면 손부터 풀고 말해.”
건율의 눈빛이 묘해졌다.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건율이 딱딱한 얼굴의 수환을 훑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러나 미소 짓고 있는 입술과 달리, 그의 까만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형은 아직 자기 처지가 어떤지 모르나 봐?”
“뭐?”
“하여간, 좋은 말로 하면 다들 이런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건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긴 다리로 성큼 걸어와 수환의 앞에 섰다. 영문도 모른 채 수환이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퍽!
“윽!”
앞으로 뻗은 건율의 다리가 수환의 복부를 짓밟았다. 순간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압박감이 느껴졌고, 고통은 뒤늦게 몰려왔다. 수환이 허리를 숙이며 괴로워했다.
“내가 형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건 변덕일 뿐이야. 알겠어?”
“으윽.”
“대답해 봐, 형.”
쇠처럼 단단한 발은 아직도 수환의 복부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어 괴로워하며 바르작거리는 수환을 건율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환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알겠… 어.”
“응, 알았다니 다행이네.”
“헉.”
발을 치우자 수환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수환을 보며 건율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앉아 있었던 의자에 돌아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의 눈이 따르다 말던 위스키로 향했다.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마실까 했더니, 이게 뭐야. 기분 잡쳤잖아.”
“…….”
“형.”
“…….”
“수환 형.”
고개를 숙인 채 대꾸 없는 수환을 건율이 끈질기게 불렀다. 수환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죽거리는 건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이승현 거 맞지?”
“……!”
건율의 손안에서 심플한 은색 팔찌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수환의 구속된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돌려줘.”
수환이 이를 갈며 작게 말했다. 하지만 건율은 듣지 못했다는 듯이 손안에 있는 은색 팔찌를 장난스럽게 빙빙 돌렸다. 승현이 준 팔찌를 건율이 가지고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
“이승현은 왜 형을 선택한 걸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수환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아직도 건율은 승현이를 포기하지 않은 건가. 수환이 불안해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 아직도… 승현이를…….”
“하하, 내가?”
수환이 더듬거리며 묻는 말에 건율은 웃음을 터트렸다. 수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되묻더니 길게 웃음소리를 이어 갔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크게 웃는 건율을 수환이 질린 얼굴로 쳐다봤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건율은 그러다가 갑자기 웃는 걸 뚝 멈췄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주변 공기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생각해 봤거든.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 건지.”
“…….”
“내 생각대로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잖아.”
건율의 시선이 반짝거리는 팔찌로 향했다. 그의 눈에도 익숙한 액세서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승현이 한 번도 빼지 않고 하고 다니던 팔찌였으니까. 수환의 소지품을 빼앗으며 이 팔찌를 봤을 때는 헛웃음이 다 나왔다. 마치 전리품이라도 얻은 것처럼 과시하듯이 승현의 팔찌를 차고 있는 꼴이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건가. 건율은 그동안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계획은 항상 완벽했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수환이 변했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했다. 꼭두각시 인형이 갑작스럽게 실을 끊고 제멋대로 구는 걸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수환은 항상 다루기 쉬운 장기말에 불과했었으니까.
“화련 누나랑도 사이좋아졌더라. 다신 만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그건…….”
“고작 편지 한 통으로 그렇게 울고불고하더니 말이야.”
“…….”
“기억나? 그때 형이 나한테 편지도 대신 써 달라고 했었잖아.”
편지……?
수환은 화련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화련은 침울한 얼굴로 과거의 진수환과 있었던 일을 넌지시 말했었다.
‘네가 그런 편지를 나에게 보내고, 화가 많이 난 줄 알았었어.’
‘나에게 많이 실망했겠지만, 이번 기회에 사과하고 싶구나. 그땐 내가 많이 미안했다. 널 혼자 두고 떠났으니 말이야.’
화련이 미국 유학 시절 진수환에게 받았다는 편지. 화련은 그 편지를 받고 진수환이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 오해로 인해 귀국 후에도 서로 만나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편지를 쓴 게 건율이라고? 수환이 눈을 크게 뜨며 건율을 응시했다.
“너… 네가 그 편지를?”
“크큭.”
건율에게서 잔뜩 억눌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 진짜 걸작이라니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요란한 웃음소리가 수환의 귀에 꽂혔다. 건율은 진수환을 이용해서 승현을 가지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진수환을 장기말로 이용하기 위한 준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이어졌을 것이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고 멍청했던 진수환은 건율이 이용하기 딱 좋은 상대였을 거다.
“이 나쁜 새끼.”
화련은 진수환이 부모를 잃은 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두고 유학을 간다고 하니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울고 불며 떼를 쓰면서 어떻게든 화련을 붙잡으려 했겠지.
하지만 어린 진수환이 싫어한다고 해서 훗날 사업에 도움될 유학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화련도 마음이 아프지만 진수환을 두고 떠났고,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진수환이 화련에게 원망하는 편지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진수환과 화련의 사이가 멀어지게 하기 위한 건율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형은 몰랐겠지만, 화련 누나도 만만치 않았어. 그런 편지를 받고도 형한테 답장을 보냈다니까? 중간에 가로채기 얼마나 힘들었던지.”
원작의 진수환은 비록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벌인 쓰레기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까지 삐뚤어진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여기던 화련에게 홧김에 심한 말을 하고 상처를 줘서,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처음에야 화가 나서 막말을 했겠지만, 막상 화련이 떠나니 무서웠던 거다. 정말로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할까 봐.
발을 동동거리던 그는 화련에게 편지를 보낼 결심을 한다. 싸운 뒤라 전화 통화는 부담스러웠을 테고, 시차 때문에 서로 시간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보낼 결심을 하지만, 말주변이 없어서 혼자 쓰기 힘들었을 터였다. 그런 진수환에게 접근해 건율이 대신 편지를 써 준 거고.
단순한 흥미 위주의 이간질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성과 화명의 미래를 저울질하며 치밀하게 짠 각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결국 원작에서는 진수환과 화련의 사이가 끝내 좋아지지 않아서 건율이 진수환을 처리하기 수월했었다.
모든 내막을 알게 된 수환은 질린 얼굴로 건율을 쳐다봤다. 그것 말고도 수많은 것들이 건율의 의도였을 수도 있었다. 진수환은, 그야말로 주건율이 공들여 빚어낸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하아.”
“넌… 너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잖아. 많은 걸 가졌으면서, 왜.”
수환 역시 원작의 진수환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가 한 짓들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 승현에게 끔찍한 짓을 했고,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러니 그를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건율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은 너무나도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점점 더 지금의 상황이 불안하게 다가왔다. 단순히 대화만 나누려는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형 말대로 나는 많은 걸 가졌지. 하지만 형 덕분에 가장 큰 걸 못 가졌잖아.”
“그래서…… 나한테 보복하려고?”
“하하, 말을 너무 살벌하게 한다.”
애초에 승현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마치 게임을 하듯이, 누군가를 전리품으로 얻은 것처럼 생각하는 건율의 심리를 수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복이 아니면 대체 자신을 왜 이런 곳에 데려와 손까지 묶은 걸까. 수환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우리 집 가훈이 좀 그래. 사람이든 물건이든, 내가 가질 수 없으면 망가트려야 하거든.”
“너 그럼 승현이를…….”
“그건 너무 식상하잖아, 형.”
건율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무라는 듯한 말투는 더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수환을 계속 짓누르고 있었다.
“본인 말고, 그놈이 소중하게 여기는 걸 망가트려야 타격이 크지. 안 그래?”
“……!”
주성혁 회장은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오메가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소중하게 여긴 사람의 모든 걸 빼앗고 망가트렸다. 건율 역시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마셔.”
수환의 앞에 다가온 건율이 위스키가 든 술잔을 내밀었다. 수환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술을 마셔서, 자신이 진수환과 다르게 술에 취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더 이상 건율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 수환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마시라니까.”
“…….”
“손이 불편해서 그래?”
“…아니.”
수환은 몸이 떨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건율이 내민 술잔을 외면하는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수환은 주변을 살피며 불안한 눈으로 방 안을 훑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많은 술잔과 술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만약 저걸 들고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면…….
끔찍한 생각을 하던 수환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손이 묶였다. 알파의 힘으로도 가죽과 쇠사슬로 만든 구속구는 쉽게 풀 수가 없었다.
애초에 건율은 우성 알파였다. 그의 페로몬에 짓눌려 여러 번 꼼짝도 못 했는데, 아직도 학습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환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렸다.
“정말 오늘따라 손 많이 가게 하네, 응?”
“읍!”
건율이 억지로 입을 벌려 수환의 입속에 위스키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입 밖으로 주륵 흘러내렸다. 갈색빛을 띤 투명한 액체가 수환의 셔츠를 적셨다.
“잘 받아 마셔야지. 칠칠맞게.”
“윽.”
혀를 차던 건율의 눈이 묘해졌다. 식도를 타고 조금 넘어간 위스키에 수환이 괴로워하는 사이, 건율의 눈은 젖어 있는 셔츠에 향해 있었다. 흰 셔츠가 술에 젖어 들어 속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러난 자국들을 보다가 건율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뭐야. 그런 거였어?”
“윽, 뭘!”
건율의 손이 수환의 셔츠 앞섶을 찢듯이 잡아당겼다. 그 힘에 셔츠 단추가 뜯어져 나갔다. 수환의 희고 긴 목, 그리고 판판한 가슴팍까지 눈앞에 훤히 드러났다.
집요한 흔적이었다.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은밀한 곳까지 피부가 온통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다. 오메가를 품는 알파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흔적들이었다. 그것들을 눈으로 훑으며 건율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동안 실컷 이승현한테 박힌 거였어? 어? 진수환.”
“……!”
“오메가한테 박히니까 기분 좋아? 이 변태 새끼야.”
“윽.”
건율의 손이 수환의 목에 있는 붉은 흔적을 꾹 눌렀다. 섬뜩한 느낌에 수환이 몸을 움츠렸다.
“하지… 마!”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건율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목에서부터 이어진 흔적들을 손가락으로 쭉 훑었다.
“윽.”
차가운 손가락이 몸을 훑어 내리는 느낌은 끔찍했다. 승현이 만질 때와는 전혀 달랐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수환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하하.”
그런 수환을 내려다보며 건율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불쾌한 수수께끼를 이제야 푼 것 같은 상쾌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그래, 그렇구나. 이승현. 그런 취향이었다니. 자신이 가지지 못할 만했다. 설마하니 오메가가 알파한테 박으면서 발정할 줄이야. 대충 눈으로 봐도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흔적들이다. 건율이 혀를 쯧쯧 찼다.
“형, 그렇게 좋았어? 응? 대답 좀 해 봐.”
“이거… 놔!”
수환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들썩거렸다.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대신해 발을 들어 올렸으나, 건율이 무게를 실으며 누르는 통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페로몬을 쓰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메인공의 역할을 맡은 건율과 이물질 역할인 자신에게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는 것 같았다.
건율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몸서리치는 수환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를 이곳에 데려온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원래는 인적 드문 곳에서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었으니까.
꽤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들이 차근차근 무산되었을 때, 건율은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기묘한 희열을 느꼈다. 자신의 의도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들이 되레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분명 이승현을 가지고 싶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주성혁 회장이 으름장을 놓은 뒤에는 HS의 신약을 한성이 손에 쥘 수 있도록 수를 썼지만, 화명의 회장이 된 화련이 완벽하게 방해하고 연구실의 연구원들까지 모두 보호하기 시작했다.
씁쓸하기 짝이 없는 패배였다. 하지만 그에 화가 솟구치기는커녕, 다른 쪽으로 뻗어 나간 생각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향 풀어 봐. 맡아 줄 테니까.”
“윽!”
“응? 어서.”
의자에서 주르륵 밀려난 수환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위를 건율이 덮치듯이 짓눌렀다. 흥분한 우성 알파의 향이 주변에 퍼지기 시작했다.
“왜? 오메가한테 박히더니 향도 잘 안 나와?”
수환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건율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페로몬 샘이 있는 곳에 코를 대고 나서야 열성 알파의 미약한 페로몬 향이 맡아졌다. 언젠가 우연히 맡았던 그때의 향과 똑같았다. 코끝이 간질간질하고 아기 분내처럼 달콤한 향. 어떤 오메가에게서도 맡아 본 적이 없는 페로몬이었다.
이승현도 이걸 환장하며 맡아댔겠지. 열성이라 향이 약해서 어지간히 안달 났겠어. 건율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사실 그런 비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자신 역시 그 오메가처럼 발정 나서 같은 알파의 목덜미에 코끝을 갖다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건율에게도 사실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 정말이지 미치겠네.”
알파가 알파에게 흥분한다니.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쉬쉬해야 할 일이었다. 자칫하다가는 한성의 후계자가 이상 성욕자라는 자극적인 기사가 우후죽순으로 나와 사방으로 퍼질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율 역시 이상 성욕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세상에 매력적인 오메가가 얼마나 많은데, 뭐가 부족해서 같은 알파를 안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알파를 아래에 깔고 거길 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형, 궁금하지 않아?”
“무슨…… 윽.”
“여기에 알파 좆을 넣으면 어떨지 궁금하지 않냐고.”
“……!”
건율의 손이 수환의 배를 꾹 눌렀다. 얇은 천 사이로도 단단하고 굵은 손가락이 느껴졌다. 수환이 몸을 흠칫 떨었다.
수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건율의 새카만 눈과 마주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미친… 새끼.”
“왜? 이승현 거는 좋다고 받아먹었을 거 아냐.”
“…승현이는 달라.”
“하, 뭐가 다른데?”
오히려 더 좋지 않나. 건율은 오메가 따위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라면 수환에게 더 큰 쾌락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싫어하는 그를 억지로 잡아 누르고, 짐승 같은 행위를 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건율은 그대로 수환의 안에 노팅하는 상상까지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아래가 뻐근해지고 있었다.
“어? 뭐가 다르냐고.”
“나는, 승현이가 좋아서…….”
“아, 좋아서 뒤도 내줬다고?”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건율이 비웃는 소리에 수환은 얼굴을 찌푸렸다.
승현의 일로 화가 난 건율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수환도 저 진득한 눈빛과 흉흉한 분위기를 모르진 않았다. 건율이 자신에게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대체 왜 그가 자신에게 욕정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환이 무릎을 올려 건율의 배를 쳤다.
“저리 가!”
“큭.”
조금의 틈이 생겨 수환은 겨우 몸을 뒤로 물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 건율을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집요한 시선이 수환을 따라붙었다.
“그래, 그냥 당하면 재미없지. 계속 도망쳐 봐. 페로몬은 안 쓸 테니까.”
여유로운 태도로 건율이 수환의 뒤를 쫓았다. 마치 막다른 길에 몰린 초식 동물을 사냥하는 육식 동물 같은 느긋한 태도였다.
“읏.”
무작정 다리를 뒤로 질질 끌며 도망가던 수환은 뒤에 있던 테이블에 몸을 부딪쳤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과 술잔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런 것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도망치던 수환의 등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막다른 벽에 몰린 수환이 얼굴을 찌푸렸다. 손이 묶여 있어서 그런지 도무지 힘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벌써 끝이야?”
“윽……!”
다가온 건율이 수환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것만으로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힌 수환은 제대로 바둥거리지도 못했다. 곧 그의 몸이 바닥 위에 축 늘어졌다.
“아쉽네. 조금 더 반항해도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크흑.”
“괜찮아. 내가 그 새끼보다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건율이 혀를 내밀어 수환의 목선을 길게 핥았다. 오메가도 아닌데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이승현도 이래서 환장했던 건가. 물건이었네, 이거. 건율의 다른 쪽 손으로 수환의 셔츠를 찢듯이 벗겼다. 한 손으로도 손쉽게 셔츠를 벗겨내자 탄탄하고 하얀 몸이 불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 흣.”
“하아.”
뜨거운 한숨이 목덜미에 닿아 퍼졌다. 소름이 확 끼쳤다. 너무나도 끔찍했지만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어 신음만 참았다. 승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느끼고 싶지 않았다.
건율은 수환의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생각보다 더 좋았다. 같은 알파의 몸은 오메가와 달리 부드럽지도 않고 딱딱하기만 한데, 희미하게 느껴지는 달콤한 분내 때문인가. 점점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온통 울긋불긋한 다른 놈의 흔적은 눈에 거슬렸다. 이를 드러낸 건율이 바르작거리는 수환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깨물면서 피가 났는지 입안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맛에서도 미약한 단맛이 느껴졌다. 정말로 미쳤나 싶었다.
“악……!”
“하, 씨발.”
“하지 마, 흑, 제발 하지…….”
“더 울어 봐. 존나 꼴리네.”
애석하게도 울면서 애원하는 말은 건율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승현이 남긴 흔적 위에 자신의 것을 덧씌우는 데 몰두했다. 생각보다 살결이 희고 약해서 조금만 물고 빨아도 금방 멍이 들어 불긋해졌다. 참으로 야해 빠진 몸이었다.
“하지… 말라고, 읏, 이 개…….”
“여전히 입이 험하네.”
“윽…….”
신음을 참으려고 악무는 입술도 꽤 탐스러워 보였다. 건율이 시선을 올려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흘끗 쳐다봤다. 저번에는 방해를 받아 저 입술을 맛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방해꾼은 없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건율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형, 입 좀 벌려 봐.”
“읏.”
꺼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을 열면 바로 건율의 입술이 덮칠 것 같았다. 대답하지 않고 이를 악물며 입술을 꾹 사리물자, 건율이 턱 주변을 깨물며 끈질기게 지분거렸다.
“하, 참 쉽지 않단 말이야.”
하지만 쉬워도 재미없긴 하지. 속으로 중얼거린 건율이 수환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수환의 턱을 아플 정도로 으스러뜨리듯 잡았다. 수환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윽……!”
“매번 이래야겠어? 응?”
“싫, 흣……!”
고통으로 인해 벌어진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건율은 충동적으로 수환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러자 입안 가득 단맛이 터졌다. 씨발. 그는 또다시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그리고 무작정 수환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마치 처음 키스해 보는 애송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읍……!”
수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건율과 키스까지 하고 있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리는 것 같았다.
안 돼. 이대로는 안 된다. 축 늘어져 있던 수환의 몸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두 손목이 쇠사슬을 끊어버릴 듯 팽팽하게 당겼다. 동시에 입안을 침범한 불쾌한 살덩이를 혼신의 힘을 다해 깨물었다.
“큭!”
혀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 건율이 입술을 뗐다. 몸을 일으킨 수환이 퍽, 하고 어깨를 밀쳐 건율을 밀어냈다. 예상치 못한 통증과 행동에 건율의 몸이 뒤로 물러났다. 수환은 마지막으로 건율의 배를 발로 걷어차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기분 탓인지, 일어났을 때 손목을 옥죈 쇠사슬이 조금 느슨해진 것 같았다.
절그럭, 손목을 구속하는 쇠사슬이 부딪치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수환은 일어나 무작정 달려갔다. 그의 눈에 건율이 들어왔던 문이 보였다. 어떻게든 몸을 부닥쳐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까지 고작 몇 걸음 남지 않았을 때였다.
“악……!”
어느새 쫓아온 건율이 수환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순간적으로 고통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씨발, 좆같네. 진짜.”
피가 흘러내리는 입가를 닦지도 않으며 건율이 짜증스럽게 욕설을 뇌까렸다. 짐짓 여유롭다는 듯이 더 반항해 보라는 말을 지껄이긴 했지만, 막상 혀를 물어뜯고 도망치니 기분이 더러웠다. 건율이 눈살을 찌푸리며 몸부림을 치는 수환을 내려다봤다. 고작 키스 한 번 했다고 저렇게 싫은 건가. 인상을 찡그린 채 건율이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짝!
“흐…….”
뺨을 얻어맞은 수환의 몸이 비틀거렸다. 건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손을 내리쳤다. 짝! 짝! 살과 살이 부딪치며 마찰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폭력을 견디지 못한 수환이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 그만.”
“왜, 더 반항 안 해? 응?”
“흑…….”
퉁퉁 부은 얼굴을 내려다보는 건율의 얼굴은 광기에 젖어 있었다. 아픔으로 인해 생리적인 눈물이 수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니 더는 화가 나지 않고 흥분됐다. 이 알파는 같은 알파를 짐승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건율이 빠듯해진 하체를 수환의 허벅지에 문질렀다.
“우는 거 존나 꼴리네, 씨발.”
“싫어, 하지…….”
“이승현도 형 꽤나 울렸겠어, 그치?”
혀를 내밀어 수환의 퉁퉁 부은 뺨을 핥은 건율이 씩 웃었다.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웃고 있는 건율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어딘가 잘못 맞았는지, 아까부터 삐- 하는 이명이 귀를 울리고 있었다. 수환은 결국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형?”
“…….”
“씨발, 기절했네.”
툭툭, 손가락으로 뺨을 건드려도 깨어나지 않는 수환을 보며 건율이 혀를 찼다. 이럴까 봐 일부러 페로몬으로 겁박하지 않고 참았던 건데, 다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 건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다 보면 일어나겠지.”
그래도 행위를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건율은 수환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직 맛보지 못한 가슴 쪽으로 입술을 내렸을 때였다.
“말귀 참 못 알아듣네, 주건율.”
“……!”
싸한 냉기가 주변을 감돌았다. 언젠가 느낀 적이 있던 불쾌한 무언가가 건율의 몸을 짓눌렀다.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던 무력감이 그의 몸을 옭아매었다.
“너… 어떻게 여길…….”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싸늘하게 가라앉은 갈색 눈이 보였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인물이 건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방 안에 짙게 깔렸다.
“이승현.”
야차처럼 서 있는 승현을 보는 건율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